[대한민국 스포츠100년](12)조선체육회 창립에 이르기까지(상)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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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4-0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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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모를 쓰고 두루마기릉 입은 채 짚신을 신고 축구를 즐기는 1916년도의 경신학교 학생들. 뛰기를 싫어하는 양반들은 참여하지 않았다.[사진으로 보는 경신학교 130년사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여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가 보스니아의 18세 청년이자 대학생에게 암살된 소위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돼 이해 7월 28일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발발한 전쟁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은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동맹국과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연합국과의 전쟁으로 확대돼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에 이어 11월 11일 11시 휴전조약이 성립되면서 막을 내린 장장 4년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일본은 연합국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의 편에 서서 독일을 적국으로 삼아 전쟁을 벌였다. 1900년이 시작할 즈음 세계의 강대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미국 등이었고 실질적인 세계의 패권 국가는 영국, 즉 대영제국이었다. 미국은 1889년 스페인을 격파한 뒤 태평양 지역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유럽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맺지 않은 영국은 러시아의 팽창을 막기 위해 1902년 일본과 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어 1904년 러일전쟁까지 승리하면서 1905년부터는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섰다. 이에 일본은 영국에 참전을 요청했고 1914년 8월 23일 독일, 8월 25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국 침략의 길로 들어섰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국내 인사들은 독일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독일의 승리는 곧 일본의 패배를 의미했으며 일본의 패배는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와도 통했다.

“지금의 정세로 미루어 독일이 승세를 타고 있어 왜적이 멸망할 기운이 박두하였고 우리나라가 광복할 호기는 바로 이때다. 국내외의 인사 1만여 명의 연서로 비밀리에 독일 수뇌부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청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는 그릇된 세계정세 판단이었지만 여기에는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우리의 독립을 기대해도 된다는 강한 희망을 담고 있었다. 이즈음 전통적으로 중립정책을 지켜 온 미국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고 독일과 러시아가 단독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연합국 측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미국이 가담을 결정한 것이다.

미국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 직전인 1918년 1월 8일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미국 의회에서 전쟁 종결을 위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민족자결주의라고도 부른 ‘윌슨의 14개조 평화원칙’은 일반론 5개조, 특수 문제 9개조로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약소민속, 또는 점령지역의 독립 및 복귀와 관련된 내용이 7~8개 항에 달했다.

즉 민족자결주의의 기본 정신은 식민지나 점령지역에서의 피지배 민족에게 자유롭고 공평하고 동등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결권, 즉 민족자결의 원칙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윌슨의 선언은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독립 의지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되었다. 자결권의 정신은 우리나라의 3·1운동,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비폭력운동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식민지 상태의 약소민족들이 민족자결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강대국들의 정치적 군사적 힘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했다.

3·1독립운동과 일제의 유화정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은 국내 유지들을 비롯해 일본 유학생 그룹, 연해주와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들, 그리고 미국과 중국에서 활약하던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19년 2월 1일 만주 지린에서 만주와 연해주, 미국, 중국 등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39명의 이름으로 사기와 강박으로 이루어진 한일병합조약은 무효이며 육탄혈전으로라도 독립을 쟁취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소앙이 기초한 ‘무오독립선언서’(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어 일주일이 지난 2월 8일에는 도쿄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조선 유학생 400~600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와세다 대학 철학과에 재학하던 이광수가 작성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이 독립선언서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은 한일합병이 조선 민족의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았고 생존 발전을 위협하고 동양의 평화를 요란케 하는 원인이 되므로 독립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조선 민족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기회를 주기를 요구했으며 민족자결주의를 조선 민족에게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아울러 이 요구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일본에 대해 영원히 혈전을 벌일 것을 선포하고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일본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 선언의 영향을 받아 3월 1일 서울에서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과 함께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3·1운동이 2·8독립선언에 견주어 비교적 덜 조직적이기는 했지만 3·1운동을 계기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쿄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은 일제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여기에 일본이 사건의 발발을 감지하지 못한 하세가와 총독을 소환하고 그의 후임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를 총독으로 임명했으나 사이토는 부임한 첫날 강우규 의사의 폭탄 저격을 받았다. 폭탄이 다른 데로 떨어져 무사한 사이토는 다음날 무단정치를 버리고 “언론·출판·결사·집회 등에 대해서는 질서와 공안 유지에 무방한 한 상당히 고려를 가하여 민의창달을 기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발표, 문화적인 방법으로 식민통치를 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로 인해 언론사 발행 허가, 민간 임의단체 구성에 융통성이 생겼지만 한편으로 일제는 민족운동의 약화를 시도하고 억압을 하는 두 얼굴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새로운 친일세력 육성, 이(李) 왕가 약체화, 조선 귀족의 선택적 보호, 직업적 친일분자 육성, 친일 지식인 육성, 지주와 예속자본의 보호 이용, 친일단체 조직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여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1운동 이후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민족 언론의 신문이 창간된 것이 큰 사회적 변수로 등장했다. 1919년 10월 조선총독부가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어느 정도 허용한 이래 3년째인 1922년 9월의 한 통계에 따르면 전국 청년단체가 759개에 이르고 그 가운데 종교단체가 488개나 되었다.

이 무렵인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립한 것 또한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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