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 ‘bunt’는 원래 야구에서 만들어진 말은 아니다. 폴 딕슨 야구용어 사전에 따르면 .bunt는 16세기 영어에서 ‘butt’의 변형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철도 현장에서 화차를 세게 치지 않고 툭 밀어 움직이게 하는 행위를 뜻했고, ‘가볍게 밀어 힘을 죽이는 동작’이 그대로 야구 번트의 의미로 이어졌다. 미국 야구에선 19세기 후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
우리나라 언론은 미국에서 야구를 먼저 받아들인 일본의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때부터 번트라를 말을 썼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따르면 조선일보 1925년 7월6일자 ‘비장(悲壯)히 번복(飜覆)되는 최후결승전(最後決勝戰)에 일점차(一點差)로배재석패(培材惜敗)’ 기사는 ‘중등(中等)『리구』의 최종전(最終戰)은 배재중앙전(培材中央戰)인그만큼『리구』중(中)가장긴장(緊張)되엿다▲중앙군(中央軍)은 적년(積年)의 분패(憤敗)를 설욕(雪辱)하고저하야 필사(必死)의역(力)을다하얏고▲배재군(培材軍)은 동군(同軍)의중진(重鎭)인 명유격(名遊擊)과정포수(正捕手)의부상(負傷)에 투수(投手)까지 출장(出塲)을 보지못하게되엿스나▲사기(士氣)를다하야『뻬스트』를내이어 최후(最後)까지 강적(强敵)과 싸호는광경(光景)은어데인가 처참(悽慘)한 기분(氣分)이 농후(濃厚)하야보엿다▲배재(培材)가 선수(選手)의 충실(充實)한 중앙(中央)에 대전(對戰)히야 육회말이사만루(六回末二死滿壘)에 사번타자 장병선군(四番打者張炳善君)의 초구(初球)를 좌월(左越)하야 당당(堂堂)한 삼루타(三壘打)에일거삼점(一擧三點)을어돈것은『리구』뿐아니라과연(果然)『챤스』를어든드몬 맹타(猛打)이엇다▲그러고 중앙군(中央軍)은 잔루삼(殘壘三)에 배재(培材)는구(九)의잔루(殘壘)를두고득점(得點)을엇지못함은『번트』의부족(不足)이엇다▲양군(兩軍)의장래(將來)가 더욱 유망(有望)하기를 바린다’고 전했다. 당시 기사는 중등(중학교) 야구 리그 최종전 기사로, 야구 문체와 전술 인식을 잘 보여주는 자료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번트의 부족’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1920년대 조선 야구에서 번트는 이미 주자를 진루시키는 기본 기술, 찬스를 득점으로 연결하는 필수 교과서적 플레이로 인식되고 있었다.
북한 야구에선 번트를 ‘살짝치기’라고 부른다. 살짝치기’라는 말은 번트의 결과보다 동작의 본질을 먼저 드러낸다. 번트가 희생, 작전, 전술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반면, 살짝치기는 힘을 빼고 공을 맞히는 치기 방식 그 자체를 가리킨다. 강하게 때리지 않고, 의도적으로 힘을 줄이며 공을 살짝 건드리는 행위. 그 기술적 성격이 말 속에 그대로 들어 있다. 외국어를 알지 못해도, 야구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라도 이 표현만으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명명법은 북한 스포츠 용어 전반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북한에서는 플레이를 ‘작전’이나 ‘기지’보다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규정된 기술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번트 역시 순간적 판단의 산물이 아니라, 반복 연습을 통해 누구나 동일하게 수행할 수 있는 타격 기술로 자리 잡는다. ‘살짝치기’라는 말은 개인의 감각보다 집단적 훈련과 재현 가능성을 강조하는 체육 이념과 맞닿아 있다.
북한 야구 용어를 보면 치기는 대체로 힘과 방향에 따라 나뉜다. 세게치기, 멀리치기, 날려치기, 그리고 살짝치기. 이 체계 안에서 번트는 예외적인 작전이 아니라, 가장 약한 힘을 사용하는 타격의 한 갈래가 된다. 살짝치기는 ‘덜 치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치는’ 기술이다.
여기에는 외래어를 배제하고 의미가 바로 드러나는 말을 쓰려는 언어 정책도 작용한다. 번트라는 음차어 대신 살짝치기를 쓰는 순간, 야구는 전문 영역의 은어가 아니라 생활 속 언어가 된다. 바깥마당지기(외야수), 등불경기(야간경기)와 마찬가지로, 살짝치기는 플레이를 설명하는 말이 된다. (본 코너 1626회 ‘북한에선 왜 ‘야간경기’를 ‘등불경기’라고 말할까‘, 1635회 ’북한 야구에선 왜 '외야수(外野手)'를 '바깥마당지기'라고 말할까‘ 참조)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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