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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1551] 북한에선 왜 ‘스포츠’ 대신 ‘체육’이라는 말을 많이 쓸까

2025-09-21 04:23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대련 시범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대련 시범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1년 5월 세계청소년축구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 경기 취재차 평양에 갔을 때, 경기장이나 체육 시설은 구호로 가득찼다. 능라도 경기장, 김일성 경기장, 안골 체육촌에는 ‘체육강국 건설!’, ‘온 나라에 체육열풍을!’이라는 붉은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었다.

북한에선 해방이후부터 줄곧 ‘체육(體育)’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남한에서 체육과 함께 외래어 ‘스포츠(sport)’ , ‘운동(運動)’ 이라는 말을 함께 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남한에선 학회, 체육단체, 교육 기관 등에서 필요에 따라 같은 의미를 다르게 쓰고 있지만, 북한에선 체육이라는 말을 일관되게 쓰고 있는 것이다.

‘체육’은 한자어로 ‘몸을 기르고(體), 기른다(育)’라는 뜻이다. 체육이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일제강점기 때 부터였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체육이라는 말이 딱 두 번 나온다. 순종실록에만 이 말이 등장한다. 191982'조선체육협회에 일금 150원을 하사하였다. 시민 체육 발달을 위해 새로 설치하기 때문이다192152조선체육회에 일금 200원을 하사하였다는 대목이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출범할 무렵이었으므로 체육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순종 이전 조선 시대에는 체육이라는 의미나 개념이 없었다.
일본에선 메이지 시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니시 아마네(西周) 등 개화 사상가들이 서양 문화를 수입하면서 영어 스포츠체육으로 번역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을 거쳐 이 말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쓰인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본 코너 2영어 'sport'는 왜 체육으로 번역되었을까?‘ 참조)

북한에서 영어 ‘sport’ 대신 한자어 ‘체육’을 고집하는 것은 단순한 언어 선택이 아니다. 외래어를 거부하고 주체적 민족어를 내세우려는 의도와 함께 오락성을 배제한 국가적 단련의 성격이 겹쳐 있다. 개인의 즐거움보다 집단의 건강, 나아가 체제 유지가 우선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북한의 체육정책은 해방 직후 소련식 교육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자리 잡았다. 개인의 성취보다 집단의 규율, 기록보다 충성심을 우선한다. 어린이집에서부터 군대, 직장에 이르기까지 체육은 체제 유지의 교육 프로그램으로 편입돼 있다. 학교 수업은 물론 직장 체조, 아침 달리기, 군사식 체력 단련이 생활화돼 있다. 경기장에서의 승패는 ‘사회주의 강국 건설’의 성과로 선전되고, 국제 대회에서의 메달은 ‘수령의 영도’를 입증하는 증표로 포장된다.

북한은 1960~70년대부터 ‘주체어’를 내세워 외래어를 대거 순화했다. 영어식 ‘스포츠’, ‘게임’은 ‘미제 문화’로 간주되었고, 순수 한자어나 조어로 대체했다. ‘체육’은 이미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용하던 용어이기에 반제국주의·반미 정서에도 부합했던 것이다. 북한이 ‘체육’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서구식 개인 스포츠가 아닌, 국가가 주도하는 집단적 신체 단련과 사상 교육을 강조하기 위함 때문이다. 이 말 속에는 건강· 군사력· 노동력을 우선하는 사회주의적 가치와 반미·자주 노선이 동시에 담겨 있는 것이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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