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은 라이프 베스트 스코어를 기록한 날, 버디가 연달아 터졌던 날, 혹은 골프장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던 날을 떠올린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기억 한 켠에 캐디의 한 마디, 표정, 또는 태도가 함께 남아있다.
라운드에서의 캐디는 어찌 보면 오늘 하루 내 골프 인생의 가장 긴 동반자다.티잉그라운드에서부터 마지막 퍼팅까지 4~5시간 동안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고 가장 가까이에서 내 샷의 성공과 실패를 지켜보는 사람인 것이다.
어느 날은 이랬다. 라운드 초반부터 티샷이 흔들리고 벙커 탈출도 실패하고 퍼팅은 짧기만 하던 그 날 잔뜩 기분이 가라앉은 나에게 캐디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오늘 골프 치는 거 편안한 사람과 이야기할 때처럼 생각해보세요. 다 맞추려 하지 말고 그냥 흘러가게 두는 거죠.”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이후 샷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마음이 편해져서 실수가 덜해졌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리듬이 돌아왔다. 그날 스코어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라운드의 기분은 분명 달랐다.
그때 생각나는 말이 막역지우(莫逆之友)다.『장자(莊子)』 「대종사」 편에 나오는 고사로 "벗 중의 벗, 아무 거리낌 없는 친구"라는 뜻이다.‘막(莫)’은 ‘없다’, ‘역(逆)’은 ‘거슬림’을 의미하니 서로 전혀 거슬림이 없는 완벽하게 뜻이 맞는 친구를 말한다.
골프장에서는 그런 ‘막역지우’를 동반자에서 찾기도 하지만 의외로 캐디가 그 역할을 해줄 때가 많다. 말 한마디가 무겁지 않되 가볍지 않고 설명은 간결하되 정확하고 거리는 말해주지만 결정은 내게 맡겨줄 줄 아는 사람인 경우가 있다. 좋은 캐디란 결국 내 플레이를 가장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는 골프장에 들어설 때 오늘의 캐디가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한두 번 함께 해 본 캐디라면 이름부터 떠올리고 처음 보는 캐디라면 목소리의 톤과 첫인사에서 그날 라운드의 감도가 느껴진다. 물론 모든 캐디가 막역지우는 아니다.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반대로 너무 방관적이거나 혹은 거리와 클럽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해 오히려 혼란을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진짜 ‘막역지우’를 만났을 때의 고마움은 더 크게 느껴진다.
우리는 라운드가 끝나고 나면 스코어를 기억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숫자는 흐릿해지고 누구와 함께 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만이 마음에 남는다. 그래서 골퍼에게 동반자만큼 중요한 사람은 캐디다. 진짜 좋은 캐디는 단지 클럽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늘 하루 나의 골프가 나다워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력자이자 친구, 바로 그 ‘막역지우’다.
다음 라운드가 기다려지는 이유는 어쩌면 좋은 샷 때문이 아니라 다시 한번 막역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기철 마니아타임즈 기자 / maniarepor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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