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66. ‘풍운아’이회택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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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1-04-1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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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일학이었다. 그가 운동장에 서면 바람이 휘몰아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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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지휘봉을 잡은 이회택감독.

선수들이 마구 뒤엉킨 속에서도 그는 자유인처럼 그 누구에게도 속박 받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했다. 순발력과 체력을 타고난 그는 그 시절 아시아 최고의 다리였다.

이회택은 1965년 청소년대표로 발탁되었다. 동북고 3학년이었으나 나이는 스무살이었다.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고 자리를 잡지 못해 축구 낭인의 생활화를 했기 때문인데 당시엔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회택이 처음 축구공을 접한 건 김포농고 2학년 무렵이었다. 딱히 축구선수라기보다는 축구를 좋아하는 정도였지만 놀다가 매력을 느낀후 선수가 되자고마음 먹었다.

하지만 ‘동네축구왕’이 갈 곳은 별로 없었다. 무작정 상경 하다싶이 해서 한양공고를 찾았다. 스피드는 인정받았으나 기본기가 없던터라 바로 내 처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도 그것이 이회택의 축구인생을 결정지은 모멘텀이었다.

폭발적인스피드를 눈여겨 본 영등포공고가 그를 데려갔고 몇 개월 공을 차본 후 나간 전국고교축구선수권대회 데뷔전에서 2골이나 뽑았다. 덕분에 그의 축구 기틀을 다져준 동북고로 날아갈 수 있었다.

스카우트지만 학년은 하나 내렸다. 더 많이 써 먹기위해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래서 스물살짜리 고교 3년생 청소년대표가 탄생할 수 있었다.

동북고 시절 타고난 스피드와 순발력을 가다듬은 이회택은 대학교도 고등학교만큼이나여기저기 다녔다. 치열한 스카운트전의 결과이고 당시만해도학제가 어수룩해서 가능했다. 처음 성균관대학교에 발을 들였지만 상황에 따라 옮겨 다녀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에 차례로 적을 두었다.


졸업은 한양대. 때문에 그의 경력은 고교 3군데, 대학 3군데를 다녔어도 동북고, 한양대다.

차원이 다른 이회택 축구. 이회택은 곧 국가대표팀으로 월반하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의 북한과 맞서기 위해 만든 양지팀의 일원이 되었다.

양지팀은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한다’는 중앙정보부의 모토에서 딴 것으로 초법적인 팀이었다. 북한을 잡기위해 정부가 만든 팀으로 양지는 당시로선 꿈도 꾸지 못했던 해외원정을 밥 먹듯이 다녔다.

이회택은 양지팀 소속이었던 1967년 메르데카컵에서 주전으로 뛰며서 아시아 올스타에 뽑혔다. 축구를 제대로 시작한 시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급성장이었다.

1970년 버마와 공동우승을 차지했던 아시안게임에선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로 활약했다. A매치 82경기에서 21골을 넣으며 활약했던 이회택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숱한 화제를 뿌리며 최정민-이회택-차범근-최순호-박지성-손흥민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축구 스타플레이어 계보를 썼다.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168cm의 작은 키가 전혀 핸디캡이 되지 않았다. 힘을 앞세운 빠른 돌파는 가히 무적이었다. 상대팀의 수비를 하나하나 쓰러뜨리며 진군하는 모습이었다.

돌파력도 뛰어났지만 볼에 대한 감각이 천부적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 공이 간 것 갔지만 사실은 이회택이 공이 갈 지점에 미리 가 있었다. 체력을 바탕으로 한 순발력의 결과로 그는 시대를 앞서 간 축구 천재였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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