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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34)일제강점기의 지방체육⑧조선체육회와 쌍벽을 이룬 관서체육회

2020-06-18 10:27

관서체육회가 1931년 1월 대동강 위에서 개최한 빙상대회 경기장을 관중들이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이렇듯 관서체육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방 체육의 중심역할을 했다.
관서체육회가 1931년 1월 대동강 위에서 개최한 빙상대회 경기장을 관중들이 완전히 둘러싸고 있다. 이렇듯 관서체육회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북지방 체육의 중심역할을 했다.
1920년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립된 뒤 평양에서는 이보다 2년 뒤인 1922년 4월 19일 평양체육회가 출범했다. 평양체육회는 평양에 산재해 있는 각 체육단체의 통합과 일반인들을 위한 체육진흥을 위한다는 목표로 출범은 했지만 출범이후 이렇다 할 활동을 보여주지 못하고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평양체육회가 활동을 하지 못한 데는 평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로 사업을 시작해야 하지만 평양체육회가 출범하기 한해 전인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가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이미 개최하고 있어 딱히 내세울 만한 사업이 없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25년 2월 27일 평양에도 체육기관이 필요하다는 체육인들의 뜻에 따라 평양기독교청년회관에서 관서체육회를 창립했다. 평양부 수옥리 314번지 동아일보사 평양지국에 사무실을 둔 관서체육회는 이날 무기명투표로 이사 20명을 선임하고 이사 가운데 정세윤을 회장으로 선임하고 회칙을 일부 수정해 통과시켰다.

회칙 가운데 중요한 조항은 ►회원은 찬성회원 및 정회원으로 하고 ►정회원은 입회금 1원, 회비 매월 50전을 납입해야 한다는 부분이다. 또 회는 이사제로 운영하고 서무부, 야구부, 정구부, 축구부, 육상경기부, 빙상경기부, 배구 및 농구부 등을 두기로 했다.

관서체육회는 이듬해인 1925년 5월 7일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 3개 신문사 평양지국의 후원을 받아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단숨에 자리를 잡았다. 소학단에 평양의 신흥학원, 기명학교, 약송공보, 종로공보, 광성사보, 숭덕학교, 기성의숙, 평양공보, 상유공보와 황해도의 광진교 등 10개 팀, 중학단에 광성고보, 숭인상업, 숭실중, 평양고보 등 4개 팀, 청년단에 재경유학생단, 평양숭실대, 광양용사단, 평양무오단, 평양학우단, 서울의 조선축구단 등 6개 팀, 모두 20개 팀이 참가해 성황을 이루었던 것.

하지만 관서체육회는 이보다 5~6년 앞서 평양기독교청년회가 주최하며 보급한 축구, 야구, 정구 등 대부분 경기종목에서 똑같은 사업을 펼침에 따라 필연적으로 평양기독교청년회와의 마찰이 야기됐다.

대표적으로 평양기독교청년회는 평양에 같은 이름의 전국 규모대회를 2개나 둘 필요가 없다며 자신들이 주최하던 전조선축구대회를 1926년 제6회를 마지막으로 관서체육회에 개최권을 넘기고 말았다.

관서체육회는 이때부터 전조선축구대회를 5월 단오절 전후에 개최하게 되었고 일개 지방에 있는 체육단체라기보다는 경성에 있는 조선체육회와 함께 조선 스포츠계의 쌍벽을 이룬 체육단체로 발돋움했다.

관서체육회의 주요 사업은 1월 전조선빙상경기대회, 5월 전조선축구대회, 6월 전조선씨름대회, 7월 전조선수상경기대회, 8월 전조선야구대회, 9월 관서체육회 체육대회, 10월 전평양농구연맹전, 11월 전조선탁구대회를 각각 개최했다. 부대사업으로는 덴마크의 보건체조를 보급시키는 동명체조단을 조직해 남녀노소 누구나 참가할 수 있게 하였고 여름철에는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일광욕과 수영강습을 시키기도 했다. 특히 일광욕은 전 평양시민들이 참가한다고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관서체육회에서는 또 최능진, 강진구, 차재일 3명의 추전에 따라 품행이나 기술에서 모범이 될 만한 선수를 선발해 연 1회 표창을 하기도 했다. 경영은 회원의 의무금과 일시금 십원, 특별회원의 찬조금이 있으나 최대의 재원은 전조선축구대회 수익금이었다. 1932년 관서체육회의 수지상황을 보면 수입 1,862원 5전으로 연간 사업을 마치고 862원78전을 이월시켰다. 또 1933년에는 수입 2334원5전, 지출 2216원9전으로 오히려 조선체육회보다 앞섰다. 이 대부분의 수입이 축구대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니 당시 평양의 축구열기를 짐작할 만 하다.

일제의 축구통제안에 강력 반발해 상경 투쟁해

1934년 4월 조선총독부 학무국은 축구통제안을 작성해 사전에 이를 슬쩍 누설했다. 한반도 내에서 일본인들의 축구는 일찌감치 금지를 시킬 정도로 축구를 싫어했던 총독부는 축구 경기와 학교 팀의 참가를 제한하는 이 안을 만든 뒤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내용을 흘린 것이다.

축구통제안의 주요 내용은 (1) 전조선 축구대회는 연 1차에 한하되 학무국장의 허가가 있어야 대회를 개최할 수 있고 (2) 각 도내의 축구대회는 도 체육협회(일본인 단체)와 축구연맹의 주최로 하며 (3) 2개 도(道) 이상의 축구 대항 대회는 관계 도 체육협회의 주최로 할 것 (4) 경기는 원칙상 토요일과 일요일에 행하되 평일에는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오후 3시 이후에 할 것 등이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조선체육회나 관서체육회가 개최하는 전조선축구대회는 학무국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지방에서의 대회는 모두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도 체육협회나 그 산하 연맹의 재량에 맡긴다는 이야기였다. 즉 축구대회만 열리면 관중들이 초만원을 이루며 거국적으로 열광을 하는 조선축구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고 있어 한반도에서 일본인들에게는 축구 자체를 금지시켰던 일제가 학업을 빌미삼아 ‘축구통제안’이라는 해괴한 모습으로 속내를 드러낸 셈이다.

여하튼 이 통제안에 대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평양의 관서체육회였다. 이 통제안대로 된다면 관서체육회가 10년간 주최해 온 전조선축구대회가 일개 지방대회로 전락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없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관서체육회 조만식 회장은 1934년 4월 10일 동아일보 평양지국이 있는 수옥리 회관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단호하면서도 논리 정연한 논리로 축구통제안에 대해 의견을 피력했다.

통제안의 전체를 알지 못함으로 여기에 시비를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문지상을 통하여 그 기준이라는 것을 본다면 민간단체를 전연 무시하였는데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당국자가 과거와 현재에 있어서 민간단체의 조선체육계의 그 공로를 무시하는 용감과 또 민간단체의 그 장래를 기대할 만한 아량이 없는 금도의 좁음에 놀랄 수밖에 없다. 우리 관서체육회는 과거 10년간 조선인의 체육발달을 위하여 실로 눈물겨운 활동을 계속해 온 자로 이러한 통제안의 실현을 그대로 묵과하기에는 피와 눈물로 얽힌 10년의 우리 역사가 용인할 수 없고 이 단체를 통하여 묶인 우리의 양심이 허락지 않음으로 앞으로 우리는 그 반대의 대책을 강구함에 주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관서체육회는 총회 결의에 따라 김병연 부회장과 송석찬 상임이사가 4월 26일 총독부 학무부 다케우치 체육주사를 만나 “관서체육회가 주최하고 있는 전조선축구대회 개최의 기득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고려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관서체육회의 논리 정연한 요구에 축구통제안은 나타날때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없어져 버렸지만 대회 참가학교에 대한 학무국의 간접적인 제약으로 인해 관서체육회뿐만 아니라 조선체육회 주최 전조선축구대회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이처럼 관서체육회 재정의 뒷받침이 되었던 전조선축구대회는 일제 총독부의 강권으로 조선체육회가 1938년 7월 4일 일본인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돼 강제해산한 뒤에도 조선축구협회가 인수하여 이해 11월 1일 전조선종합축구대회로 이름을 바꾸어 그대로 이어갔다. 하지만 이마저도 1940년 제21회 전조선종합축구대회를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 축구경기는 광복 이전까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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