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일 국립현충원에 묘택을 잡은 고 천규덕씨의 명복을 빕니다.
고단한 삶의 청량제
프로레슬링은 프로복싱과 한시대를 같이한 인기스포츠였다. 김일, 장영철의 프로레슬링이 열리는 날은 거리가 텅 빌 정도였다. TV가 많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프로레슬링을 보기위해 동네 가장 부자집의 마당에 앉아 브라운관을 통해 통쾌무비의 레슬링을 지켜보았다.
경기가 시작되면 마당은 시끌벅적했고 한편에선 “김일의 박치기가 최고다”, “아니다 장영철의 모두발차기가 최고”라면서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온 국민을 TV앞에 모여 들게 했던 프로레슬링은 그러나 어느 날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말 한마디에 국민들은 정말 거짓말처럼 돌아서버렸다. 1965년 쯤이었다.


1. 플라잉킥과 박치기
1961년 6월 17일 서울 운동장에서 ‘5.16 혁명 기념 전국 프로레슬링 대회’가 열렸다. 많이 알리지도 못했는데도 관중은 차고 넘쳤다. ‘붕 날라서 두 발로 상대의 가슴팍을 때리는’ 모두발차기의 명인 장영철과 당수도의 1인자 천규덕은 금세 인기를 모았다. 장영철은 턱수염, 천규덕은 역도산처럼 몸에 짝 달라붙는 검은색 타이즈가 심볼마크였다. 이들은 이듬 해에도 대회를 열었다. 20여명의 선수가 참가했으며 장영철이 한국 챔피언에 올랐다.
1963년 1월 8일, 역도산이 방한, 한국 프로레슬링에 새로운 모티브를 던졌다.
새로운 전략으로 일본에서 프로레슬링의 붐을 일으킨 역도산. 그는 한국명 김신락(金信洛)으로 1923년 함경남도 용원면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던 그는 풍운의 꿈을 안고 17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처음 그는 한국 씨름과 비슷한 스모 선수로 활약했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다 1951년 프로레슬링으로 전향했다.
역도산은 프로레슬링을 이벤트화 할 아이디어가 있었다. 1953년 일본프로레슬링협회를 창립하고 거구의 미국선수들을 데려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집단 우울증에 걸려있던 일본 사람들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았다. 역도산은 승전국인 미국의 레슬러들을 일본 무도인 가라테에서 이름을 딴 가라데촙으로 한 방에 잠재우면서 일본 열도에 역도산 바람을 일으켰다. 기량과 힘을 겸비하긴 했지만 역도산 프로레슬링의 성공은 바로 전략의 성공이자 이벤트의 승리였다. ‘미국을 강타하는 일본인’은 당시 상황에선 분명 영웅이었고 그런 바람을 타면서 역도산은 일약 전국적인 거물이 되었다.
역도산은 한국의 프로레슬링 붐에 일조하고 선수를 스카우트하기위해 방한한 것으로 실제로 천규덕을 스카우트 할 마음까지 있었다. 하지만 야쿠자의 칼에 맞아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마음속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단 팬을 확보한 프로레슬링은 장영철, 천규덕 두 간판스타를 앞세워 꾸준히 흥행몰이를 했다.
장영철, 천규덕은 역도산이 승전국 미국의 선수들을 도쿄로 불러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때려 눕히며 패전국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었던 것처럼 일본선수들을 국내로 끌어들여 무참히 깨뜨림으로써 우리 국민들을 신나게 했다.
장충체육관 개관과 동양방송 개국은 프로레슬링의 양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1964년 장충체육관에선 한, 두달 건너 한일 프로레슬링 대항전이 열렸다. 장영철은 일본 선수에게 단 한번도 지지않았다. 천규덕은 가끔 싱글매치에선 졌지만 이어 벌어지는 태그매치에선 일본팀을 꺾고 반드시 이겼다. 관중들은 장영철이 위기에 몰리면 드롭킥을 하라며 고함을 질렀고 그때마다 장영철은 멋지게 드롭킥을 성공시켜 경기를 끝냈다. 천규덕이 궁지에 몰리면 당수를 외쳤고 소를 맨손으로 때려잡기도 한 천규덕은 당수도로 일본선수들의 가슴팍은 두어 차례 가격, 역전승을 이끌어 냈다.
장영철 등이 한창 줏가를 올리고 있을 때 본토의 김일이 나타났다. 김일은 역도산의 3대 제자중 한명이었다. 일본식 링네임 오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김일은 호남 씨름판을 휩쓸던 장사였다. 1929년 3월 전남 고흥 거금도 생으로 역도산과 일본 프로레슬링에 흥미를 갖게 돼 27살이던 1956년 무작정 밀항, 일본으로 갔다. 시모노세키에서 단속경관에 걸려 수개월 여 보호소에서 갇혀 지내야했다. 시작도 하지못하고 귀국하게 된 김일은 역도산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혼신의 노력 끝에 결국 역도산의 도움으로 역도산 휘하에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역도산의 제자가 된 그는 1959년 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 데뷔했다. 역도산의 코치를 받고 자신만의 특기인 박치기를 연마했다. 특별히 내세울것이 없으면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역도산의 지론이었다. 김일은 이 박치기를 주무기로 1963년 WWA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이후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스무차례나 방어전을 치뤘다.
박치기는 김일을 스타로 키운 그만의 특기였다. 하지만 박치기의 데미지가 쌓여 훗날 건강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김일은 스승 역도산의 갑작스러운 죽음, 한일국교정상화, 조국에서의 프로레슬링 흥행 등 여러 가지 이유로 1965년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박정희대통령은 김일의 팬으로 김일레슬링이 열리는 날이면 장충체육관을 부인 육영수여사와 직접 찾아 구경하며 프로레슬링 발전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한일국교정상화로 일본선수들의 방한이 훨씬 자유로워 졌다. 장영철, 천규덕의 레슬링 시절에도 일본레슬러들의 방한경기가 없진 않았지만 김일 이후 경기도 많아졌고 내용도 한층 업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1961년부터 1964년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국내파 장영철, 천규덕을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만든 것이었고 이같은 갈등은 국내 프로레슬링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먹구름이 되었다.
1965년 8월초 김일이 주측이 된 대회가 열렸다. 구름관중이라고 할 정도로 장충체육관은 인산인해였다. 동네 부자집 앞마당에 설치된 흑백TV앞에도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렸다. ‘극동 헤비급 선수권 쟁탈전’이라는 명칭하에 벌어진 이 대회는 한국 프로레슬링협회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한국 대표는 김일을 비롯 장영철, 천규덕 등 10여명이었다. 일본에서는 역도산의 제자 4명등 에이스급이 출전했다. 8월7일 열린 준결승전은 모두 한일전이었다. 김일은 요시무라(吉村)을 2대1로 눌렀으나 천규덕은 일본의 요시노 사도에게 패배하였다. 11일 열린 결승전에서 김일은 초반 약세를 보이다가다 막판 박치기를 작렬시키며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제1회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대회는 완전 성공이었다. TV는 물론 신문에서도 이 경기를 대서특필했다. 호랑이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링에 등장하는 ‘한국대표’ 김일은 35년간 한국민을 괴롭혔던 일본의 거구들을 일거에 제압, 삶에 시달렸던 국민들에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일본선수의 반칙으로 이마를 다친 김일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막판 몰아치기로 승리를 따내 국민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당시 김일의 프로레슬링은 기. 승. 전. 박치기였다. 초반 수세였다가 공세로 돌아 쉽게 이기는가 싶을 때 일본레슬러가 쇠붙이로 김일의 이마를 그어 피를 흘리게 한다. 피를 본 관중들이 “일본놈 죽여라”고 아우성을 치면 체육관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만다. 이때 김일이 분노에 찬 박치기를 가하면 상대는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관중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터뜨리며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그 스토리는 장영철이나 천규덕도 비슷했다. 어떤 경기든 일방적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초반 이런 저런 곡절을 겪은 후 막판 결정타가 터지는 것으로 ‘비호’ 장영철은 드롭킥, ‘당수왕’ 천규덕은 온몸의 힘을 다 모은 당수가 마무리 한방이었다.
김일의 프로레슬링은 한국 무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사실 김일의 성공은 이미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익히 알려져 영웅시 되었던 역도산의 후광이 있었고 일본 선수들을 충분히 투입할 수 있는 자원과 자본이 있었던 터에 정권 실세들의 뒷받침까지 있었으니 실패할 리 만무였다.
그러나 김일의 등장으로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난 장영철의 국내파들은 이런 추세가 못마땅했다. 억지춘향격으로 한때 링에 함께 올랐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울기가 심해지면서 대립각을 세우게 되었다.

프로레슬링은 쇼다
1965년 11월 27일 장충체육관.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 마지막 날 김일의 파이널에 앞서 세미파이널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링 위의 선수는 우리나라의 장영철과 일본의 오쿠마. 두 선수는 1승1패를 주고받으며 3번째 판을 벌이고 있었다. 장영철의 우세가 점쳐진 경기였으나 장은 의외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때 오쿠마가 보스턴 크랩을 장영철에게 시전했다. 일명 새우꺾기로 제대로 걸리면 그 누구도 빠져나올 수 없었고 오쿠마의 기술은 완벽하게 걸렸다. 주심은 허리가 꺾일 지경에 이른 장영철에게 수차례 항복할 것인가고 물었으나 장영철은 얼굴이 일그러지고 온몸이 뒤틀어지는 고통으로 비명을 내지르면서도 절대 항복의사를 표시하지 않았다. 큰 부상을 입을 것이 뻔했지만 일본의 중상급 선수에게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오쿠마는 그 이전 천규덕에게 패한 선수여서 한국을 대표하는 장영철로선 죽어도 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만약 패했다가는 국내파 선수들의 설 자리가 없어질 판이었다.
이래저래 절체절명의 순간, 링사이드가 어지러워지더니 장영철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링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공격을 가하고 있던 오쿠마를 밀어제치는 등 폭행을 가했다. 경기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경기 역시 바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오쿠마의 고소로 장영철과 링 난입의 레슬러들이 폭행치상죄 혐의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은 경찰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장영철의 진술을 바탕으로 ‘프로 레슬링은 쇼’라고 보도했고 국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일로 장영철은 오랫동안 배신자라는 오명을 썼으며 국민들은 점차 프로레슬링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말을 입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다만 그럴싸한 진술을 했고 프로레슬링의 속사정을 몰랐던 경찰이 한 발짝 더 나갔고 사건 담당 기자들이 또 한 발짝 더 나가 ‘쇼’라는 단정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번져 간 것이었다.
쇼라는 제목이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진 것은 전부터 프로레슬링은 짜고한다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이었다. 권투는 한 경기를 하고나면 적어도 한 달을 쉬는데 프로레슬링은 보기에 그보다 훨씬 격하게 움직이고 경기중 부상으로 피범벅이 되었음에도 다음 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또 경기에 나섰다. 그리고 뻔히 보이는 공격도 어떨 땐 전혀 피하지 않고 있다가 결정적 일 땐 한 순간에 그것을 뒤집는 기술을 구사하여 경기를 역전시키니 충분히 의심을 살만했다.
장영철은 두가지 면에서 그날의 사건을 진술했다.
한 가지는 프로레슬링 나름의 약속된 룰 이야기였다. 프로레슬링은 격한 운동으로 자칫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 그래서 평소 훈련을 철저히 하지만 막상 경기에 나서면 지나치게 몰입,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때문에 사전에 여러 가지 룰을 정하는데 새우꺾기의 경우 제대로 걸리면 풀지 못하므로 그 기술에 걸리면 알아서 기권의사를 표시해야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기술을 건 선수가 스스로 풀어 다른 동작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선수들 간에 이루어진 약속이다. 그런데 장영철이 위험한 상황임에도 항복을 하지 않았고 장영철은 그 경우 오쿠마가 기술을 풀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쿠마가 치명적인 부상을 입힐 요량인지 압박을 가하며 약속을 어겼다고 강조했다.
또 한 가지는 느닷없이 폭행죄를 뒤집어 쓰게 된 제자들을 위한 비호 발언이었다. 폭행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링 난입 역시 사전 각본에 있었던 것이어서 폭행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설명을 했다.
‘프로레슬링은 각본대로 하는데 오쿠마가 룰을 어기고 너무 심하게 공격을 했다’는 것이 진술요지. 장영철이 강조한 것은 오쿠마가 룰을 어겼다는 점이었지만 프로레슬링에 정통하지 못했던 경찰은 각본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었다.
각본에 의한 것이라면 원래 ‘짜고 하는것’이냐고 반문했고 각본이라는 말에 여러 가지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자니 말이 길어지고 앞뒤가 맞지 않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이것이 ‘짜고 하는 것’이면 ‘결국 쇼가 아니냐’로 과대포장 된 것인데 경찰 진술이라는 사실까지 합해져 기정사실화 되고 말았다.
결국 링의 폭행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고 장영철의 제자 레슬러들도 바로 석방되었지만 프로레슬링은 큰 상처를 입었으며 국내 프로레슬링을 주도했던 장영철과 김일도 위축되었다. 장영철은 배신자라는 오명을 썼고 김일은 장영철을 꺾기위해 오쿠마를 내세운 장본인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장영철을 위시한 국내파들은 이 사건후 입지가 현저하게 좁아졌지만 김일은 그 후로도 한동안 인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더 이상 ‘민족의 한과 아픔을 달래주던 민족스포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서서히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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