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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창립 13人의 인생스토리]①위대한 ‘더 베이브’

2016-03-24 11:44

▲베이브자하리아스(위에서첫번째줄홀로있는사진),헬렌데트와일러,패티버그,베티다노프,헬린힉스(위에서두번째줄왼쪽부터),마릴린스미스,오팔힐,베티제임슨,샐리세션즈(위에서세번째줄왼쪽부터),셜리스포크,루이스서그스,앨리스바우어,말렌바우어헤이그(위에서네번째줄왼쪽부터).사진편집=박태성기자
▲베이브자하리아스(위에서첫번째줄홀로있는사진),헬렌데트와일러,패티버그,베티다노프,헬린힉스(위에서두번째줄왼쪽부터),마릴린스미스,오팔힐,베티제임슨,샐리세션즈(위에서세번째줄왼쪽부터),셜리스포크,루이스서그스,앨리스바우어,말렌바우어헤이그(위에서네번째줄왼쪽부터).사진편집=박태성기자
[피닉스=마니아리포트 김세영 기자]지난주 김세영(23.미래에셋)이 우승한 파운더스컵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창립자(파운더;Founder)를 기리기 위해 만든 대회다. 지난 2011년 창설돼 올해 6회째를 맞았다.

LPGA는 지난 1950년 결성됐다. 당시 창립 멤버는 13명이다. ‘역사상 최고의 여성 운동 선수’로 불리는 베이브 자하리아스(1914~1956)를 비롯해 앨리스 바우어(1927~2002), 패티 버그(1918~2006), 베티 다노프(1923~2011), 헬렌 데트와일러(1914~1990), 멀렌 바우어 헤이그(1934~), 헬렌 힉스(1911~1974), 오팔 힐(1892~1981), 베티 제임슨(1919~2009), 샐리 세션즈, 마릴린 스미스(1929~), 셜리 스포크(1927~), 루이스 서그스(1923~2015)가 그들이다.

현재 생존해 있는 창립 멤버는 스미스, 스포크, 헤이그 단 3명이다. 이들 3명 모두 이번 대회장을 방문했다. 이들은 선수들의 플레이를 관전하면서 응원하는가 하면 자원봉사자나 갤러리들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이번 파운더스컵을 계기로 LPGA를 창립한 13명의 인생 스토리를 시리즈를 통해 알아본다.

13명의 파운더스 모두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선수를 꼽으라면 베이브 자하리아스다. 그녀는 만능 스포츠 우먼이었고, 자신의 명성을 통해 LPGA 투어 대회장에 대중을 끌어들인 인물이었다.

자하리아스는 1911년 노르웨이 이민자의 딸로 태어났다. 그는 올림픽에 출전해 각종 종목에서 메달을 딴 스타다. 1932년 LA 올림픽에 출전해 투창, 80m 허들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며 금메달을 획득화며 일약 유명 스타가 됐다. 자하리아스는 높이뛰기에서도 세계 신기록을 세웠지만 그녀의 배면넘기가 여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는 금메달을 박탈당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베이브자하리아스는역사장가장위대한스포츠우먼이었다.그녀는올림픽육상과투창금메달리스트였을뿐아니라야구,농구,테니스,볼링,당구,롤러스케이팅에재능을보였다.골프에입문해서도당대를순식간에휩쓸며여자골프를대중에알리는데크게기여했다.
▲베이브자하리아스는역사장가장위대한스포츠우먼이었다.그녀는올림픽육상과투창금메달리스트였을뿐아니라야구,농구,테니스,볼링,당구,롤러스케이팅에재능을보였다.골프에입문해서도당대를순식간에휩쓸며여자골프를대중에알리는데크게기여했다.


그녀의 본명은 밀드레드 엘라 디드릭센 자하리아스였지만 ‘더 베이브’(The Babe)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어느 날 야구 한 경기에서 홈런 5개를 기록해 당대 최고의 홈런왕이었던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본 따 그렇게 불리게 됐다. 그녀는 올-아메리칸 농구 선수로 활약했고, 테니스, 볼링, 당구, 다이빙, 롤러스케이팅 등에도 뛰어난 만능 스포츠 우먼이었다.

LA 올림픽 당시 18세이던 자하리아스는 스포츠 평론가로 유명한 그랜틀랜드 라이스로부터 골프를 해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자하리아스는 골프에도 곧 소질을 발휘한다. 올림픽 투창 금메달리스트답게 장타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자하리아스가 골프에 전념하게 된 건 1934년부터다. 1935년 텍사스 여자 아마추어에서 우승을 했지만 2주 뒤 미국골프협회(USGA)는 그녀의 아마추어 자격을 박탈하고, 아마추어 대회 참가를 금지시켰다. 그녀가 야구와 농구 등에서 상금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자하리아스는 8년 뒤인 1943년 아마추어 지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1946~1947년 단 2년 만에 US 여자 아마추어 챔피언십, 브리티시 여자 아마추어 챔피언십을 포함해 아마추어 대회에서 무려 17승을 거뒀다. 브리티시 여자 아마추어 챔피언십에서 미국 선수가 우승한 건 1893년 이래 자하리아스가 처음이었다. 만약 USGA의 조치만 없었다면 자하리아스가 골프에 남긴 족적이 얼마나 더 컸을 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하리아스는 1947년 프로로 전향했다. 그는 쇼맨십이 뛰어난 선수였다. 프로 레슬러였던 남편 조지 자하리아스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자하리아스는 종종 대회에서 “나 베이브가 여기 왔어. 그렇다면 2등은 누구지?”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쳤다. 이런 말은 때론 그의 명성을 깎아먹는 오만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골프장을 찾았다. 그녀의 장타력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는 지금도 회자된다. 그 중 하나는 스코틀랜드 동부 굴레인 코스에서의 일이다. 그녀는 540야드짜리 15번홀에서 드라이버에 이은 4번 아이언으로 그린 뒤로 볼을 넘겼다. 1951년 영국으로 건너가 경기를 벌일 때는 여성용 티를 사용하라는 영국 신사들의 제의를 일축해 그들을 멋적게 했다.

자하리아스는 메이저 10승을 포함해 프로 통산 41승을 거뒀다. 최단 기간에 통산 10승, 20승, 30승을 돌파하는 등 각종 기록을 세웠다. 몇몇 기록은 후대에 의해 깨졌지만 여전히 넘지 못하고, 앞으로도 넘어서지 못할 ‘불멸의 기록’도 있다.

바로 여성 최초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대회 컷 통과다. 자하리아스는 1945년 PGA 투어 대회에 세 차례 출전해 두 번이나 컷을 통과했다. ‘은퇴한 골프 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이나 한 때 ‘천재 골퍼’로 칭송 받던 미셸 위도 PGA 투어 대회에 도전장을 냈지만 모두 남성의 벽을 넘지 못했다.

자하리아스는 1953년 두 차례의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녀는 병을 이겨내고 투어에 복귀해 이듬해 베어 트로피(시즌 최저 평균 타수상)를 수상했다. 1955년 또 한 차례의 수술을 받았지만 그녀는 수술 한 달 만에 출전한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암이 다시 재발해 1956년 9월,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하리아스는 짧은 생을 불꽃처럼 살다간 위대한 여성 골퍼였다. 그의 명성과 쇼맨십 덕에 여자 골프는 발전할 수 있었다.

피닉스=김세영 기자 freegolf@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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