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건물이지만, 저 창문 너머 공간에서는 지금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을 수도, 사이좋은 연인이 밀회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그러한 상상을 공포 장르로 풀어내는 걸 즐깁니다. 기차를 타고 갈 때도 산간벽지에 불빛이 보이면 '저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라는 생각에 이어 그곳에서 벌어질 법한 무서운 일들을 자연스레 머릿속에 그려보는 식이죠."
2일 전야개봉하는 공포 영화 '소녀괴담'으로 상업 영화 데뷔식을 치르는 오 감독은 그동안 공포 장르에 특화된 독립 영화를 만들어 오면서 그 연출력을 인정받은 신예다.
최근 서울 삼청동에 있는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무서움과 짜릿함에 따른 쾌감"을 공포 영화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마음껏 소리지르며 공포에 떨지만, 극장을 나서면서는 놀이공원 귀신의 집을 벗어날 때처럼 '그래도 현실은 영화보다 안전하잖아'라는 대리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오 감독은 공포 장르 중에서도 피칠갑 캐릭터들이 난무하는 슬래셔무비를 선호한다고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이블 데드' '서스페리아'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같은 슬래셔무비를 보면서 '저런 장르도 쾌감을 줄 수 있다'는 신세계를 접했죠. 이블 데드는 조악한 예산으로 공포 장르의 최전선을 보여줬다고 봐요. 그때부터 공포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죠."
이러한 공포 영화는 학창시절 오 감독이 학업 스트레스 등에 따른 힘든 현실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을 줬단다. 그는 소녀괴담을 보게 될 학생들 역시 극장을 나서면서 현실의 스트레스를 풀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실 소녀괴담은 위의 슬래셔무비들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 영화로서 청소년 세대의 감성을 건드리려는 의도가 짙게 밴 만큼, 공포 수위 조절에도 몹시 신경쓴 만듦새를 지닌 까닭이다.

"수위 높은 공포를 원하는 10만 명의 마니아 관객들에게는 욕을 먹기로 작정했죠. 다만 오프닝 시퀀스의 지하철과 오피스텔 장면, 후반부 창고신에서는 기존 관습적인 공포 요소로 임팩트를 주려고 했어요.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공포 장르를 쉽게 즐기는 분위기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일단 친숙하게 다가가고 싶었죠. 극중 남녀 주인공의 감성 표현에 공을 들인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 일상의 소리를 활용해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연출법이 인상적이더라.
"예전부터 사운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가장 친숙한 일상의 것들이 가장 낯설고 무서운 것이 되는 법이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공포가 될 수 있다. 극중 봉지에서 피가 떨어지는 소리의 경우 강력하게 주장해 다른 소리는 일절 배제했다. 캐릭터가 그 소리를 공포로 받아들이는 지점이 바로 관객이 무서움을 느끼는 순간일 테니까. 잔인함을 덜어낸 만큼 새로운 느낌의 공포감을 주고 싶었다."
- '여고괴담'(1998)에 등장하는 유명한 장면을 재현했던데.
"시나리오에는 없던 것인데, 여고괴담에 대한 오마주 성격이 짙다. 여고괴담 개봉 당시 그 장면이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그대로 따라했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 점프컷의 충격을 지금 세대에게 새롭게 전달하고 싶은 욕심이 컸다."
- 남녀 주인공의 애정신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채워졌다.
"그러한 신에서는 기시감과 친숙함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새로운 느낌을 주면 공포로 연결되는 지점이 매끄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가 되지 않았을까. 이는 우리 영화와는 맞지 않는다. 로맨스의 상투성이 공포를 극대화시키는 장치가 되는 만큼, 일상의 연인이 밥 먹고 차 마시는 것처럼 친숙한 상황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 극중 캐릭터들이 어릴 적 인연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설정은 따뜻했다.
"인연의 연결고리를 주고 싶었다. 예전에 단편을 만들면서도 강조했던 점이다. 개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장면들도 곳곳에 들어갔는데, 개연성보다는 특별한 감성을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데는 개연성보다 뭉뚱그린 감성의 영향을 많이 받지 않나."

"반어법적인 성격이 강하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을 예방한다는 온갖 문구가 난무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다. 학교폭력을 외면하는 방관자로서 학교 구성원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었다. 학생들은 어떤 사안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는 세대니까, 현재 학생들에게 보다 체감도가 높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담아내는 데 공들였다."
- 소녀괴담의 주요 관객층은 학생들인가.
"개인적으로 학교 다닐 때 재밌게 본 영화들의 단상이 지금도 크게 남아 있다. 영화감독이 되면 학교 다닐 때 갖게 되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 왔다. 진지하고 심각한 사회 드라마보다는 재밌게 다가가려 애쓴 이유다."
- 영화를 만들 때 메시지를 강조하나.
"메시지는 두 번째다. 최우선순위는 재미다. 장르적 재미 말이다. 대중들에게 지루하지 않게 다가가자는 것이다."
- 공포감을 극대화시키는 노하우가 있다면.
"결국 공포감은 타이밍 뺏기인 듯하다. 잔인한 비주얼보다 이게 더 무섭다. 극중 검은 봉지가 터질 때 과연 저게 언제 터질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면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만 강조한다. 관객의 예측보다 빠르거나 늦게 효과를 가져가는 것이 포인트다."
- 상업 영화 데뷔작을 끝낸 소감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도시괴담을 소재로 한 단편 영화 네 편을 묶은 '십이야: 챕터1' 후반 작업을 하던 중 소녀괴담 연출 제의를 받았다. 상업 영화를 처음 하면서 느낀 것은 혼자만의 고집과 욕심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까. 상업 영화는 더 많은 대중을 두루 만족시키는 작업으로 다가왔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되 창작에 관한 타협을 절충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욕심을 자제하고 다르게 풀려고 애썼다. 제 경우 공포 장르 단편을 찍으면서 재미를 강조해 왔는데, 그게 나름 훈련이 됐던 듯하다."
- 다음 작품도 공포 영화인가.
"공포를 생각하고 있다. 조선판 '엑소시스트' 같은 호러 사극 등 하고 싶은 게 많다. 직접 쓴 시나리오로 작업을 하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면 굳이 제 시나리오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공이 쌓이면 공포를 바탕에 깐 액션, 스릴러에 도전해 보고 싶다. 한 인간이 처절하게 망가지는, 공포를 가미한 블랙 코미디에도 관심이 많다."CBS노컷뉴스 이진욱 기자 jinuk@nocu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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