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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65)올림픽 참가를 위한 염원②미 군정청이 발행한 첫 여권의 주인공 전경무와 브런디지 회담

2021-03-10 07:47

올림픽대책위원회 전경무 부위원장(왼쪽)과 브런디지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올림픽대책위원회 전경무 부위원장(왼쪽)과 브런디지 미국올림픽위원회 위원장
1946년 7월 15일 구성된 올림픽대책위원회(위원장 유억겸)는 이해가 저물어 갈 무렵 전경무 부위원장을 미국으로 파견했다.

평안북도 곽산 출신인 전경무 부위원장은 6살 때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미시간대학 정치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학창시절 동양인으로는 처음 미국대학웅변협회 회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하와이에서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단체인 단합회에 가입하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한국광복진선을 결성해 임시정부 지원에 힘을 쏟았다. 1945년 4월 ‘평화를 준비하기 위한 연합국회의’를 앞두고 재미한족 연합위원회 파견대표로도 활동했던 그는 광복을 맞아 조국 재건을 위해 구성된 재미한족 대표단의 일원으로 조국 땅을 밟았다.

또 전경무 부위원장은 탁월한 국제 감각으로 이승만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광복 후 미 군정청이 발행한 첫 여권이 바로 전경무의 여권이었다는 사실에서 당시 그의 무게가 느낄 수 있다. 여권 직업란에 외교사업가로 기재되어있는 점에서도 짐작되듯이 그는 세련된 섭외능력과 외교 감각을 지닌 인물이었다.
전경무 부위원장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위원장이자 국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인 애버리 브런디지를 12월 4일 만났다. 이 만남은 이상백이 주선했다. 이상백은 일본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한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브런디지를 만나 두터운 교분을 유지해 온 덕분이었다.
시카고에서 브런디지를 만난 전경무는 12월 5일 올림픽대책위원장 유억겸에게 전보를 띄웠다.

"작일 부런데지씨와 회담. 미국올림픽위원회의 조력 확약. 아즉도 각 방면으로 예비적 활동이 필요하나 조선의 런던대회 참가는 유망하다고 확신한다."

즉 브런디지가 조선의 올림픽 참가 가능성이 크며 미국올림픽위원회가 적극 돕겠다고 약속했다는 내용이었다.

런던올림픽에 참가하려면 NOC를 구성해 IOC의 승인을 받고 이에 따라 런던올림픽 조직위원회가 초청장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아직 IOC 가입절차를 밟지 않은 터라 참가가 불투명한 터였다. 이 때문에 모두 노심초사하고 있는 가운데 전경무가 보낸 전문은 반갑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브런디지 위원장이 조선은 통일된 독립국가 되어야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고 보도한 1946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 보도 지면
브런디지 위원장이 조선은 통일된 독립국가 되어야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다고 보도한 1946년 12월 28일자 조선일보 보도 지면
올림픽 출전을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들떠있을 즈음 외신을 통해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날아 들었다. 브런디지 부위원장이 “최근 조선의 올림픽 참가여부에 관해 질문을 받았으나 나의 생각으로는 조선은 통일된 독립국가가 되어야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외신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 말은 조선이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먼저 정부를 수립해 독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런던올림픽 참가가 유망하다고 전경무에게 밝혔던 브런디지가 말을 바꾼 셈이 되니 들떠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이에 올림픽대책위원회는 미국에 체류 중인 전경무에게 급히 실상을 조사하라는 전문을 보내는 한편 이상백 부위원장의 명의로 담화를 발표했다.

"이것은 통신원의 오전(誤傳)이나 혹은 속단일 것이다. 나는 올림픽경기의 정신으로나 관례로나 조선이 당연히 참가할 자격이 있으며 또 우리의 희망이 능히 관철될 것이라고 믿는다. 과거 일제시대라도 일본이 반대만 하지 않고 조선에 NOC만 있었다면 조선 단위로 참가했을 것이다. 이 예를 들면 비율빈 카나다 애란 호주 남아프리카 애급 인도지나 파레쓰타인 등은 예전부터 당당히 독립단위로 승인을 받고 참가하고 있으며 다만 법규상으로 올림픽경기 일반규정 제9조에 의하야 정식참가신청은 국내올림픽위원회, NOC를 거칠 필요가 있으므로 NOC가 없는 곳에는 이것을 창설해서 IOC에게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아즉 IOCOOC의 정식교섭도 연락도 되지 못하고 부란데지 씨와의 연락이 이번 전경무씨의 도미로 겨우 시작된 것뿐이니 대외교섭에 여러 계단은 많이 취하겠으나 조선참가는 확신이 있다고 단언한다. 참가선수를 양성하는 각 경기단체는 자신을 가지고 선수를 양성할 것이고 일반도 적극 후원해주기를 바란다. 언제든 통일된 정권이 서고 완전독립이 하로라도 속히 되기를 고대하는 열의는 올림픽 문제를 떠나서도 국민의 일원으로 바라는 바이나 그러나 올림픽 법규와 관례상 우리는 당당히 런던 올림픽 참가를 주장할 근거와 자신이 있다."

1947년 봄 전경무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이번에는 브런디지에게 올림픽 참가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이상백의 편지를 품에 지니고였다. 오랜 지기 이상백의 편지를 본 브런디지는 협조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6월에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IOC 총회에 대표가 참석하면 자신이 다른 IOC 위원들에게 소개도 하고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열망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브런디지는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도 협조를 요청했다. 만능 스포츠맨 출신인 맥아더는 1928년 USOC 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부위원장이 브런디지였다.

맥아더 사령관은 즉각 주한미군 사령관인 하지 중장에게 ‘조선의 런던올림픽 참가를 적극 지원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하지 중장은 브런디지 부위원장으로부터도 ‘조선의 런던올림픽 출전에 협조해달라.’는 전문을 받은 터였다. 이에 하지 중장은 이튿날 이상백과 오찬을 함께 하며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IOC 가입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는 당부와 함께 지원을 약속했다.

1947년 4월 17일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
1947년 4월 17일 제51회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
상황은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4월 17일 미국에서 열린 제51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서윤복이 세계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한 것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보스턴마라톤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마라톤 대회였다. 때문에 일제의 식민 지배를 갓 벗어난 조선을 세계에 알리기에 서윤복의 우승은 최고의 소재였다.

이에 고무된 공보부가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서윤복 선수가 우승하여 조선의 1948년도 올림픽 대회참가 가망성도 농후하게 되었다고 뉴욕에서 전하여지고 있는데 만약 올림픽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서윤복 선수와 손기정 선수도 물론 출장하게 될 것이다.’라고 성급히 발표까지 할 만큼 분위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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