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61)민족체육으로 새 출발한 대한체육회①끊어진 전국체육대회 맥 이은 자유해방 경축 종합경기대회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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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1-02-1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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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광장 앞에서 광복에 환호하는 시민들[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상백을 중심으로 조선체육동지회 구성
1945년에 접어들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데 이어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진주만까지 공습했던 일제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에 참패하면서 패전의 수렁으로 빠져 들었다.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사흘 후 나가사키에도 똑같은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미국이 터뜨린 원자폭탄이었다. 그 가공할 파괴력에 놀란 일왕 히로히토는 엿새 후인 8월 15일 정오 방송 마이크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다.

6년 동안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낳은 제2차 세계대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광복은 이렇게 찾아왔다. 36년 동안 이어진 일제 식민통치가 끝나고 마침내 나라를 되찾았다. 모든 사람이 환희와 희망을 노래했다.

광복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새 기운을 몰고 왔다. 체육계도 다르지 않았다. 광복 이틀 후 서울의 체육인들은 모임을 갖고 7년 전 맥이 끊긴 조선체육회의 재건에 뜻을 모았다. 1938년 7월 4일 일본인들의 관제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흡수돼 사라진 뒤 7년이 지나 조선체육회 재건이 막 오른 것이다.

체육인들의 집결장소는 종로 YMCA였다. 개화기인 1903년 황성기독교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들어온 YMCA는 서양문화 유입에 큰 역할을 했으며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거쳐간 곳이기도 했다. YMCA는 또 야구 농구 배구 수영 등의 도입에 창구 역할을 한 스포츠 요람이니 만큼 일제의 핍박 속에서 뿔뿔이 흩어졌던 체육인들이 광복을 맞아 다시 이곳으로 모이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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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뒤 조선체육회 재건을 위해 설립된 조선체육동지회 구성에 앞장선 이상백 위원장(왼쪽)과 권태하 총무위원.


조선체육회 재건에 앞장선 사람은 이상백이었다. 일본 와세다대학교 재학시절 농구부 주장을 맡았던 이상백은 일본농구협회 임원을 거쳐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일본선수단 임원으로 참가했고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를 역임하는 등 체육의 탁월한 이론가였다.

뜻을 같이 할 체육인들을 규합한 이상백은 조선체육회 재건을 위해 먼저 9월 5일 조선체육동지회를 구성했다. 그 면면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이상백 △총무위원=장권 이영민 이종구 권태하 정상희 정상윤 임동수 △평의원=김규면 이길용 조동식 안동원 이춘호 이운용 홍성하 이세정 조병학 김동철 서상국 이병학 서상천 임병혁 김기도 이여성 손효준 김영술 성의경 △상무간사=염은현 김관우 △간사=김화집 김은배 조인상 이윤용 최해룡 안중희 안영식 김영석 신기원 손기정 △사무국장=최감 △총무부=김용구 장일강 유해붕 김재홍 △재무부=박영진 민용규 손희준 이상훈 △기획부=안중희 조인상 김복경 손광식 △서무부=이순재 권철섭 이석한 조동환 △연락부=진번 유장춘 임창식 이혜택

구성원들은 각 종목 유명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당시 체육계 전체가 조선체육회 재건을 위해 혼연일체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장권 정상윤 등은 당초 치안유지대에 몸담았다가 조선체육회 재건에 의기투합해 조선체육동지회에 참여한 케이스다.

치안유지대의 주력 역시 체육인이었다. 치안대장 장권은 1910년대 여운형이 YMCA 체육부장으로 있을 때 간사로 재임했으며 유도계 원로인 석진경 방영두 이제황 등의 스승이다. 사무국장 정상윤은 농구, 사무차장 장일홍은 자전차, 총무부장 송병무는 육상, 지역동원본부장 조영하는 수영, 경리부장 석진경은 유도, 학도부장 이규현은 역도, 소방대장 방영두는 유도, 감찰대장 안태경은 농구인이었다.

전국에 162개 지부를 두고 수원지와 전기, 철도 등 주요시설 경비를 맡았던 치안유지대는 9월 6일 미군정이 치안을 장악하면서 해산됐다. 해산과 함께 치안유지대의 체육인들은 대부분 조선체육동지회에 합류한다.

조선체육동지회가 구성된 지 닷새 후인 9월 10일에는 조선체육지도연구회가 발족했다. 조선체육지도연구회에는 중등교사 120명을 포함해 체육인 200여명이 참여했다. 위원장에는 김현국이 취임했고 부위원장은 최주남, 위원은 원희덕 김명덕 김종섭 강필상 이진형 유근석 홍영희 배상봉 최경달 정을수 서정학 김문환 이규현 조영하가 맡았다.

조선체육동지회는 경기 개최와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이는 명맥이 끊긴 체육에 관한 관심을 고조시켜 그 호응을 조선체육회 출범으로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9월 30일 YMCA 실내코트에서 열린 해외동포 자선 조 · 미 친선 농구대회가 그 첫 삽이다.

이 대회에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24사단 팀과 서울 팀,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귀환한 장병 팀, 세브란스의전 팀이 참가했다. 경기 결과 연희전문과 보성전문 출신이 주축을 이룬 서울 팀은 미군 팀을 61대48로 물리쳤고 귀환장병 팀은 세브란스의전 팀을 24대5로 대파했다.

10월 6일 휘문중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축구 경기도 연전과 보전출신의 OB와 현역대결로 벌어져 OB팀이 2대0으로 이겼는데 별다른 볼거리가 없던 당시 두 대회는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이어 10월 6일 열린 서울시 일주 단축마라톤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으니 조선체육회 재건의 분위기는 이미 조성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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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처음으로 열린 자유해방 경축 종합 경기대회 개회식에서 태극기를 든 손기정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에 겨워하고 있다.
닷새 동안 이어진 자유해방 경축 종합경기대회
일제하에서 중단됐던 전조선종합경기대회도 부활했다. 조선체육동지회 주관으로 10월 27일 막이 오른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가 그것이다. 전국체육대회 효시로 삼은 1920년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부터 기산해 26회 전국체육대회에 해당하는 이 대회는 조국을 되찾은 기쁨을 만끽하며 닷새 동안 이어졌다.

1937년 10월의 제18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끝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중단됐다가 7년 만에 다시 열린 이 대회는 육상 축구 농구 야구 배구 정구 럭비 자전거 탁구 승마 등 10개 종목에서 4000여 명의 선수단이 뜨거운 경쟁을 벌였다. 38선 이북지역의 선수들도 이 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가 광복 이후 전국체전에 북쪽 선수들이 참가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관중이 스탠드를 가득 메운 가운데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개막식에는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갓 귀국한 이승만 박사와 광복 후 일제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아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던 여운형도 참석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을 앞세운 선수단을 감격스런 모습으로 지켜보았다.

독립운동가이자 훗날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오르는 이승만은 “저기 태극기를 든 선수가 손기정 아닌가. 내가 미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방랑의 슬픔에 젖어있을 때 손 선수의 올림픽 마라톤 제패 소식을 듣고 얼마나 고무되었는지 모른다.”고 토로했다. 이승만의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손기정은 내내 눈물을 흘리다 연설이 끝나자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또 조선체육회 초대회장으로 부임하는 여운형은 “얼마 전까지 일장기가 걸려있던 국기 게양대에 오늘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보니 조국을 되찾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여러분은 우리 체육을 되찾은 것을 평생의 감명으로 삼고 새로운 국가 건설의 역군이 되라.”고 강조했다.

개회식은 입장 행진 없이 종목이 적힌 표지판 뒤로 선수단이 정렬하면서 진행됐다. 태극기를 든 기수 손기정 뒤에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에서 6위를 차지한 김은배가 총지휘자로 자리를 잡았다.

경기 방식은 시 · 도 대항전이 아닌 팀 대항이나 개인전이었다. 선수들도 당연히 개인자격으로 자유롭게 참가했다. 육상은 여자부가 신설돼 60m, 100m, 200m와 멀리뛰기 경기가 열렸고 축구는 5년제인 중등부에 22개 팀, 일반부 24개 팀이 참가해 인기를 과시했다. 축구경기에는 미군정청팀도 참가해 이채를 띄었는데 중등부 우승은 중동중학이, 일반부 우승은 경성구락부가 차지했다.

농구경기에는 일반부에 15개 팀이 출전해 결승전에서 전연희전문이 전보성전문을 누르고 우승했으며 일반부 9개 팀이 출전한 야구경기에서는 계림구락부가 정상의 기쁨을 누렸다. 배구경기에서는 전보성전문과 이화여전이 남녀 일반부에서 우승했고 자전거 경기에서는 권익현이 3관왕에 올랐다. 육상경기에서는 유장춘이 5000m와 마라톤에서 우승하며 노장의 투혼을 과시했다.

자유해방경축 종합경기대회는 이듬해 1월 한강특설링크와 창경원 춘당지에서 열린 동계경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한강특설링크에서는 빙속 경기가, 춘당지에서는 빙구 경기가 열렸다. 이 대회가 제26회 전국체육대회 동계대회다.

각 종목 경기단체들이 설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광복 직전인 7월 27일 창립한 조선송구협회(회장 이병학)가 첫 테이프를 끊었고 이어 9월 1일 조선체조협회(회장 서상천), 9월 23일 조선육상경기연맹(회장 김승식), 9월 28일 조선탁구협회(회장 조동식)가 출범했다.
[대한민국 체육 100년사 발췌]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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