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체전 100년의 추억

이신재기자

필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승인 | 2020-07-07 10:57

0
101회 전국체육대회가 열리지 않는다. 전국체전이 열리지 못한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이후 70년만이다.

대한체육회는 6일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올해 열릴 예정이던 전국체육대회를 비롯 이미 예정된 다섯 차례의 전국체육대회를 순차적으로 1년씩 연기하기로 했다.

체육회는 1950년 취소된 31회 전국체전을 횟수에 포함하고 1951년 대회를 32회 대회로 개최한 사례에 비춰 내년 경북에서 열리는 체전을 102회 대회로 하기로 했다. 101회 대회는 건너뛴다.

center


전국체육대회 100년의 추억

국민축제 전국체육대회

대한민국 스포츠의 젖줄 전국체육대회가 100년의 역사를 쌓았다. 일제 강점기 시절 민중의 아픔을 보듬었던 첫 전국체전은 야구 단일종목에 기껏 200여명이 참가하는 조촐한 대회에 불과했으나 전 국민이 참여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진화에 진화를 거듭, 47개 종목에 3만여명이 참가하는 국민적 축제로 승화되었다. 프로화와 국제화로 최근에는 관심도가 떨어졌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전쟁의 혼란속에서도 면면히 어어 온 전국체전은 우리나라를 스포츠 강국으로 이끄는 기폭제였다.

1. 첫 체전 전조선야구대회

1920년 7월 출범한 조선체육회는 11월4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를 열었다. 중학단(5년제) 5개팀(배재고보, 경신고보, 중앙고보, 보성고보, 휘문고보), 청년단(일반부) 5개팀(경신구락부, 천도교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 중앙YMCA)이 출전, 사흘동안 열전을 치른 끝에 중학단에선 배재고보가 경신고보를 4-2로 누르고 우승했고 청년단결승에선 배재구락부가 경신구락부를 꺾었다.

조선체육회는 이후 전조선 규모의 단일 종목 대회를 다양하게 주최했다. 전조선이 붙은 단일종목대회는 1928년 제9회까지 비슷한 형태로 유지되다가 조선체육회 창립 10주년인 1929년에 3개 대회를 합해 대회가 치러졌다. 첫 종합대회로 제10회 전국체육대회이다.

10회 전 조선야구대회, 9회 전 조선정구대회, 6회 전 조선육상경기대회가 제10회 전국체육대회 종목으로 613일부터 15일까지 경성운동장에서 열렸다. 가장 인기 있었던 축구가 빠진 것은 경기 때마다 심판 판정에 불복하는 사례가 잦았고 크고 작은 불상사들이 잇달았기 때문이었다.

야구 소학단에선 공옥보통학교, 중학단에선 휘문고보, 청년단에선 전 배재가 우승했다. 정구 는 소학단 공옥보통학교, 중학단 경신학교, 청년단 보성전문이 우승했다. 육상은 소년부, 청년부, 일반부 등 3개부가 다양한 세부종목으로 나눠 실시됐다.

종합경기대회가 다시 부활한 것은 5년이 지난 1934년이었다. 1934112일부터 4일 동안 경성운동장, 철도국 운동장,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열렸다. 종합이었지만 개회식, 폐회식이나 종합성적 집계는 없었고 종목별로 경기만 치뤘다.

김인식(전 배재)100m 12, 유장춘(체신)1m 333초로 각각 우승했고 축구는 충신학원(소학부), 숭실중학(중학부), 보성전문(전문부), 평양축구단(일반부), 농구는 중동학교와 고려농구단이 중등부와 일반부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야구는 일반부에 두팀이 참가해 멕시코팀이 월성단을 9-4로 눌렀고 정구는 중동학교가 우승했다.

1935년 제16회 대회는 유도, 씨름, 역도, 검도가 추가 된 9개 종목으로 1022일 열렸으며 1936년과 1937년에는 탁구, 권투, 수영(당시는 수상) 3개 종목을 더 추가되었다.

193718회 대회는 일제 강점기 시절 마지막 전국체전이었다. 조선체육회 해체로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었다. 94일부터 10월 말까지 수영, 농구, 배구, 권투, 씨름, 탁구, 유도, 축구, 육상, 정구, 역도, 검도 등 12개 종목에 걸쳐 경성운동장, 휘문고보 등에서 다채롭게 진행했다.

수영은 경성운동장 풀에서 자유형, 평영, 배영, 혼영, 계영 등 5개 부분으로 나눠 종합점수제로 나눠 실시됐는데 휘문이 95점으로 3연패했다. 농구 학생부는 중동학교, 일반부는 연희전문, 배구는 제2고보, 축구 중등부는 배재고보가 패권을 차지했다. 권투는 플라이급, 밴텀급, 페더급, 라이트급, 웰터급 등 5개 체급으로 나뉘어 거행됐으며 씨름은 재령명신이 우승했다. 마라톤에선 오동우(철도)2시간281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2.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연 첫 체전 26회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26회 전국체육대회)19451027일 수 만 관중의 환호속에 서울운동장에서 막이 올랐다. 개회식에는 갓 귀국한 이승만 박사와 제11대 체육회장으로 뽑힌 여운형 조선건국동맹위원장, 이상백 조선체육동지회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승만 박사는 개회식에서 꿈에도 잊지 못하던 동포를 서울 하늘 아래서 만나는 기쁨은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격입니다. 미국에서 나라 없는 백성으로 방랑의 슬픔을 맛보고 있을 때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세계 제패 소식을 듣고 우리 민족이 아직 기개를 잃지 않고 있다고 여겨 얼마나 고무되었는지 모릅니다.” 며 감회 어린 축사를 했다.

개회식은 입장 행진 없이 종목별 표지판 뒤로 선수단이 정렬하였고 손기정 기수 뒤에는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마라톤 6위인 김은배가 총 지휘자로 자리 했다. 육상, 야구, 정구, 축구, 농구, 탁구, 배구, 럭비, 자전거, 마술 등 10개 종목에 걸쳐 4,100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시도대항이 아닌 팀 대항이나 개인대항이었고 선수들은 자유참가였다.

육상은 처음으로 여자부가 신설돼 60m, 100m, 200m와 멀리뛰기가 열렸다.

1946101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2차 조선올림픽대회에는 이승만 박사와 5,0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대회는 5일간 열렸고 경기종목은 연식야구, 송구(핸드볼), 경식정구(테니스), 체조, 역도, 권투 등 6개가 추가돼 총 16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19471013일부터 일주일동안 서울운동장과 보조구장에서 열린 제3차 조선올림픽대회에는 수영과 조정 종목을 신설해 한강 명수대(흑석동)에서 각각 개최했으며 올림픽 종목인 레슬링과 하키가 종목에 추가됐다. 27회와 제28회 전국체육대회로 기산되는 제2~3차 조선올림픽대회는 올림픽 출전의 염원을 담아 그렇게 명명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조선체육회는 새로운 헌장(정관)과 새 집행부 구성을 의결했다. 새 헌장에 따라 조선체육회의 명칭을 대한체육회로 하고 각 경기단체 이름도 조선을 대한으로 변경했다. 또 전조선종합경기대회, 조선올림픽대회 등 종합대회 이름을 전국체육대회로 일원화했다. 새로 구성된 대한체육회 회장은 신익희 국회의장이 맡았고 김동성 옥준진이 부회장을 맡았다.

정부수립경축대회 겸 제29회 전국체육대회는 10월20일부터 26일까지 서울운동장과 보조구장에서 3천여 명이 참가해 성황리에 개최했다. 육상, 야구, 배구, 농구, 축구 등 시도대항전이 가능한 종목은 자유참가와 시도대항 경기를 구분하여 진행하고 종합채점으로 시도별 순위를 정하는 방식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서울이 33.5점으로 1위를 차지했고 경기 15.5점으로 2위, 전남이 13.2점으로 3위에 올랐다.

한편 제29회 전국체육대회하계대회는 9월4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운동장 수영장에서 열렸고 동계대회 빙구(아이스하키)는 1949년 1월22일부터 이틀 동안 한강특설링크, 동계스키대회는 1949년 1월28일부터 3일 동안 울릉도 성인봉 나리분지에서 열렸다.

대한체육회 창립 30년을 기념해 열린 제30회 전국체육대회는 1949년 10월15일부터 23일까지 서울운동장을 비롯해 서울시내 각종 보조경기장에서 21개 종목에 4천여 명의 임원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개회식은 서울시취주악단의 선도로 대회 표지판-총지휘자-태극기-대한체육회기-경기단체 기수단-서울선수단-각도 선수단이 차례로 입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윤석중 작사, 김순애 작곡의 체육대회가가 첫 선을 보인 대회로 경기여중 합창단이 불렀다.

신익희 대한체육회장(국회의장)이 “내년 제31회 대회는 남북통일이 이루어져 이 운동장에서 만나기를 다 함께 축원한다.”는 요지의 개회사를 했고 이범석 국무총리, 안호상 문교부장관, 구영석 보건부장관, 김효석 내무부장관,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축사를 했다. 경성전기 축구부 주장 이범태은 선서문을 낭독했다.

개회식을 마친 선수단은 시도별로 을지로와 종로로 나뉘어서 시가행진을 해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서울시내 남자중학교 연합 체조 매스게임과 여자중학교 체육무용 연합 매스게임이 개회식 공개행사로 선보였다.

서울(65.52)에 이어 경남(42.33점)이 경기(42.04점)를 누르고 2위에 올랐고 경북(19.5점), 전남(11.5점), 충남(4.8점), 전북(4.0점) 강원(3.5점) 충북(2.83점)이 그 뒤를 이었다.

195010월 서울에서 개최할 예정이던 제31회 전국체육대회는 전쟁으로 치루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 해인 1951년에는 제32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32회 체전을 이끈 것은 조병옥 회장과 이상백, 구용서 부회장의 새 집행부였다.

피난 시절의 전국체육대회로 개회식 없이 1027일 오전 9시 광주 서중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다. 개회식은 조병옥 회장의 개회사, 체육발전에 힘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체육인에게 보내는 격려 메시지, 보스턴마라톤 우승자인 육상 함기용의 선수대표 선서로 이어졌다. 행사 요원으로 현역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광주시내 여중생 연합합창단이 체육대회가를 불렀다. 경기장은 광주서중, 무덕관, 전남여중, 광주고, 금융연합 정구장, 광주사범, 중앙초등학교 등의 운동장과 강당을 활용했으며 15개 종목에 2,239명이 참가했다.

마라톤은 최윤칠(경남)2시간2515초의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고 역도의 김성집과 이규혁도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서울이 참가하지 못한 가운데 전남이 1, 경북이 2, 경남이 3위를 차지했다.

대한체육회 본부가 여전히 부산에 머물고 있는 속에서도 1952년 제33회 전국체육대회가 10월 18일부터 일주일 동안 서울에서 열렸다. 10개 시·도 3,400여 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서울운동장을 비롯해 경복중학, 이화여고, 경기여고, 서울중학, 덕수상고, 유도중앙도장, 석호정(궁도) 등 9개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선수단 대부분이 피난지에서 거주하고 있어 철도청에서 선수단 수송을 위하여 영남, 호남 방면으로 특별열차를 운행했다.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가운데 오전 10시 서울운동장에서 이기붕 대한체육회장의 개회사에 이어 이승만 대통령(대한체육회 총재)이 치사를 했다.

미8군 사령관인 밴 푸리트 장군, 백낙준 문교부 장관, 김태선 서울특별시장이 축사를 했고 최윤칠이 대표선수 선서를 했다. 처음 제정한 학생올림픽의 노래(대한체육회 제정, 명제익 작사, 김동진 작곡)가 선을 보였다.

제33회 전국체육대회는 1951년 3월 7일 중등학교 5년제를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분리한 교육법 정에 따라 처음으로 중등부와 고등부가 나누어 열리게 됐다. 또 연식야구, 경식정구(테니스), 송구(핸드볼), 럭비축구, 마술(승마) 등 5개 종목이 추가, 20개 종목으로 늘어났다. 1위 서울, 2위 경상북도, 3위 경상남도.

제34회 전국체육대회는 환도 후 처음으로 열린 대규모 행사였다. 10월 17일부터 22일까지 서울운동장과 학교 보조경기장에서 11개 시·도 4,980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20개 경기종목에서 열전을 벌였다. 재일동포 선수단이 처음 축구 종목에 참가했다. 서울 1위, 경북 2위, 전남이 3위에 올랐으며 육상, 자전거, 역도에서 신기록이 많이 수립되었다.

제35회 전국체육대회는 1954년 10월 19일부터 7일간 서울운동장을 중심으로 서울체육관, 유도중앙도장, 사직동 황학정(궁도) 등에서 개최 되었는데 21개 종목에 11개 시·도에서 6,132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다. 해군군악대가 선수단 입장을 흥겹게 했으며 축구선수 이기주가 대표 선서를 했다. 창덕여고와 숙명여고는 대규모 마스게임으로 3만 여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특별상을 수상했고 2년 연속 참가한 재일동포 선수단은 입장상을 받았다.

경기장은 그동안 미군이 관리하던 서울운동장을 미군으로부터 인수하여 전부 사용했다. 육상경기에는 미국의 세계적인 봉고도(장대높이뛰기) 선수인 로버트 리챠드가 번외경기에 출전해 4m45㎝를 기록했다.

3. 성화 등장하다 제36회

1955년 제36회 전국체육대회는 6,773명이 참가한 가운데 10월 15일부터 9일 동안 서울에서 열렸다. 검도, 사격이 추가돼 경기종목은 23개로 늘어났다. 대한체육회 총재인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탄신 기념대회를 겸하면서 처음으로 대회 기념우표도 발행되었고 전국체육대회 최초로 성화가 등장했다.

성화는 이상백 대한체육회 부회장의 기획 작품으로 그는 성화 채화를 강화도 마니산에서 하는 것까지 결정했다. 성화 봉송은 총 46㎞를 주자 54명이 54개 구간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마니산 참성단(강화군수 이규복)을 시작으로 온수리–초지리(해군LST)-인천부두(강화군수-인천시장)-부평-구로리(경기도지사-서울특별시장)-신길동-용산-갈월동-남대문-광화문-종로2가(최충식)-종묘앞(최윤칠)-동대문-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최종주자 손기정에 전달되었다. 개회식이 오후(2시)에 열린 대회로 손기정이 성화에 점화하는 순간 1,000마리의 비둘기가 날고 대통령의 80회 탄생 축가 합창이 터졌다.

입장상은 경남이 1위, 서울이 2위, 경북이 3위를 차지했고 종합순위는 서울(115점)이 1위, 경남(63점)이 2위, 경기(61점)가 3위를 했다. 4위 경북(55.6점), 5위 전북(36.6점), 6위 전남(33.5점), 7위 충남(21.6점), 8위 강원(14.1점), 9위 충북(6.6점).

제37회 전국체육대회는 1956년 10월 3일부터 9일까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새 희망 알차게 보다 힘차게’라는 구호 속에 24개 종목 6,773명의 선수 임원이 참가했다.

육상에서 남녀 각 3개씩 한국신기록이 작성되었고 서울특별시가 5연패를 이루었다. 경상남도가 4년 연속 2위, 경상북도가 3위를 했다.

대회가 끝난 지 한 달 남짓 지나 열린 멜버른올림픽에는 7개 종목에 임원 14명, 선수 35명 등 모두 49명이 참가했다. 전국체전 우승자인 복싱 밴텀급의 송순천은 우리나라 올림픽 출전사상 첫 은메달을 획득했다.

1957년 제38회 전국체육대회는 처음으로 지방에서 열렸다. 10월 18일부터 일주일 동안 부산직할시에서 열린 대회에는 필드하키와 펜싱이 정식종목으로 추가되고 매스게임을 공개행사 종목으로 변경하여 실시했으며 24개 종목에 5,579명의 10개 시·도 선수단과 재일동포 선수단이 참가해 부산공설운동장(구덕운동장)과 동래중학 등 8개 보조경기장(승마는 서울에서 실시)에서 열렸다.

10월 9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태양열로 채화한 성화는 서울-수원-천안-대전-김천-대구-마산-김해를 거쳐 10일 동안 598.5㎞를 차량과 계주로 봉송되었으며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서윤복이 점화했다.

경남(부산 포함)이 만년 우승인 서울에 불과 7.5점 차로 종합 2위에 올랐다.

대회 첫날 매스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주경기장(부산공설운동장)에 입장하던 여학생 한 명이 개막식을 참관하려고 밀려든 인파에 밟혀 사망했다. 또 개회식 도중 육상경기 심판용 게시대가 넘어져 어린 남학생 두 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다쳤다. 전국체육대회 초유의 참사였다. 폐막식 직전에 진행된 축구 일반부 결승전은 심판 판정에 불복해 경기를 중단하고 퇴장함으로써 부산시민들의 비방과 야유를 받았다.

정부수립 10주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열린 제39회 전국체육대회는 1958년 10월 3일부터 일주일동안 서울운동장 등 10개 보조 경기장에서 재일동포 선수단을 포함해 24개 종목에 5,579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정부 수립 10주년 기념대회답게 스포츠사진과 운동용구 전시회를 비롯해 국군의장대의 시범연기, 민속놀이인 수도여자고등학교의 강강수월래, 서울사범학교의 답교놀이에 이어 트럼블린 50명(신흥대학교), 곤봉체조 50명(이화여자대학교), 무용매스게임 204명(서울공덕초등학교), 연합체조 700명(양정고등학교) 경축매스게임 1,700명(상명여자고등학교), 체조와 피라밀스틴츠 520명(인창고등학교) 등 대규모 매스게임과 다양한 행사들이 함께 펼쳐져 관중들의 시선을 끌었다.

서울이 7연패 했고 경상남도는 6년 연속 2위, 경상북도는 3년 연속 3위를 차지했다.

제40회 전국체육대회는 대한체육회 창립 40주년 기념대회로 다양한 부대행사와 함께 1959년 10월 3일부터 10일까지 열렸다. 전국체육대회 기간을 체육주간으로 정하고 전국에 있는 체육시설을 개방했으며 각 지방체육회에서는 체육전시회를 열어 체육 붐 조성에 힘썼다.

개회식을 2시간 앞둔 정오 10개 시·도 7,530명의 각 시도 선수단은 서울시청에 집결해 2개조로 나눈 뒤 시·도별 표지판과 기수, 선수단들이 군악대를 앞세워 을지로와 종로로 서울운동장까지 가두행진을 벌여 서울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개회식에 입장했다.

공개행사는 바다의 용사를 주제로 한 동대문초등학교 800명이 벌인 매스게임, 경북모성교양회 부인 200명의 매스게임, 인청중고등학교 800명의 협동통일, 동명여자중고등학교 1,000명의 칼춤, 신흥대학교 30명의 덤블링 및 조립운동, 조선대학교 13명의 기계체조, 그리고 노동조합 4개 팀의 줄다리기, 미8군 로걸스팀과 성균관대학 미식축구 경기 등 모두 3,000여명이나 되는 최대 인원이 참가했다.

서울특별시가 8연패를 이룩했고 경상남도와 경상북도가 각각 2, 3위에 올랐다.

제41회 전국체육대회가 1960년 10월 10일부터 16일까지 충남 대전에서 개최됐다. 제38회 부산 체전에 이어 두 번째 지방대회로 열린 대전체전에는 재일동포를 포함해 11개 시.도 선수단 7,626명이 참가했다.

대전 체전에서는 윤보선 대통령이 총재로, 그리고 장면 국무총리, 백낙준 참의원 의장, 곽상훈 국회의장, 배정현 대법원장이 고문으로 참여해 행정·입법·사법 3부의 수장들이 모두 전국체육대회 본부 임원이 되는 이색 기록을 남겼다.

참가선수, 임원과 학부형들까지 거의 10,000여명이 체전에 참여, 숙박시설이 부족해 여인숙에까지 숙식을 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할 수밖에 없어 지방에서 개최하기 위해서는 숙소 문제가 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남겼다.

4. 윤보선대통령과 박정희의장 제42회

제42회 전국체육대회(1961년 10월 11일~15일)에는 윤보선 대통령 내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참석했다.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개회식에서는 성화 점화 순간 비둘기 1,000수를 날리고 불꽃을 터뜨렸다. 선수단 이 퇴장할 때에는 승리의 노래(김광섭 작사, 이홍렬 작곡)를 합창했다.

1962년 제43회 전국체육대회는 경북 대구에서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개최되었다. 대구 체전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체육대회 대회기’가 게양되었다. 대회기의 도안은 당시 실무자였던 배순학이 고안한 것으로 대한체육회 핀의 도안에 11개 참가 시·도를 상징하는 링 11개로 둘러싸고 위에는 월계수 잎으로 장식했다. 현재 대회기의 링은 시·도의 숫자에 따라 17개로 늘어났다.

성화는 마니산부터 대구까지 7일 동안 총 435㎞m를 225명의 주자가 봉송했으며 배드민턴이 정식종목으로 추가되어 경기 종목이 총 25개로 늘어났다.

제43회에 이어 제44회 대회도 지방인 전북 전주에서 개최했는데 당시 전북 지사가 김인 현역 육군소장이었다. 체육에 관심이 높았던 김 지사는 지방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울운동장과 같은 형태의 스포츠타운을 만들었다. 즉 전주시 덕진동 주경기장에 메인스타디움인 육상장을 비롯해 야구장, 정구장, 농구장(옥외), 배구장(옥외), 승마장과 교육도시답게 문화회관(체전 때 프레스센터로 사용)까지 건설한 것이다. 또 체전 사상 처음으로 인구 7만의 전주시가 13,934명의 참가 선수단의 숙소를 개인 집을 활용한 민박으로 해결, 인정체전을 선보였다.

한편 종합우승한 시·도에는 대통령 상배가 처음 제정되어 우승기와 함께 수여되었고 경남에서 분리된 부산직할시가 단독으로 참가함으로써 재일동포를 포함해 12개 시·도로 늘어났다. 태수도(태권도)가 정식종목으로 추가되었다.

1964년 제45회 전국체육대회에서는 12개 시.도 13,479명이 참가했다. 도쿄올림픽 준비 관계로 평소보다 1개월 앞당겨 9월 3일부터 8일까지 인천에서 열렸다.

1965년 제46회 체전은 1965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전남 광주시 임동 광주종합경기장에서 12개 시·도에서 26개 종목에 13,152명이 참가했다. 14년 만에 다시 열린 전국체전 개회식을 보기위해 5만 여 명의 관중이 스탠드 밑 공간까지 차지할 정도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오전 10시에 시작되는 개회식을 보기 위해 새벽 3시부터 관중들이 광주종합경기장에 모여들기 시작, 주최 측이 경찰에 연락을 했으나 경찰은 한 시간이 지난 새벽 4시가 지나서 출동했다. 결국 정문에 밀어닥친 수많은 인파로 정문 문짝이 부서지면서 14명이 압사하고 1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사고에도 불구하고 역도, 육상 등에서 세계주니어 신기록 2개, 주니어세계타이기록 1개, 올림픽 타이기록 1개, 한국신기록 8개, 한국타이기록 4개, 대회신기록 45개, 대회타이기록 8개, 한국학생신기록 2개 등 신기록 풍년을 거두었다. 전남이 2년 만에 2위 자리를 되찾았고 서울은 14연패했다.

제47회 전국체육대회는 네 번의 지방대회를 마치고 5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1966년 10월 10일 오전 10시 서울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 개막됐다. 보스턴 마라톤 우승자 함기용이 새롭게 제작된 대형 성화로에 점화했다. 성화봉이 고체연료봉으로 바뀌었다.

개회식 전야제가 최초로 야간경기 시설을 한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렸고 시도 경쟁을 부추기는 종합득점제가 시행되었다.

48회 카드섹션 등장 48회 전국체육대회

카드섹션이 처음 등장했다. 스탠드 매스게임으로 불리는 카드섹션은 민관식 회장이 도입한 것으로 한성여고 2,500명이 스탠드에서 가로·세로 40㎝의 정사각형 종이 카드로 개회식 순서와 시·도선수단이 입장할 때마다 그 지역의 특성을 살린 그림을 연출해 관중들의 탄성과 갈채를 받았다.

제49회 전국체육대회(1968년 9월 12일~17일)는 멕시코올림픽(1968년 10월 12일~27일) 참가로 1개월 여 일찍 열렸다.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각 시도 선수단은 10열에 25명씩 군대식 행렬을 이루어 입장했다. 멕시코올림픽에 참가할 대표선수단 76명이 이병희 선수단장(대한농구협회장)의 인솔하에 마지막으로 입장했다.

입상장 첫 수상지역은 부산선수단(부산시장)이었다. 개회식 마지막 선수단 퇴장 직전에 대통령이 직접 시상했다. 경북이 서울의 독주를 깨고 첫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5. 굳센 체력, 알찬 단결, 빛나는 전진 51회

제50회 전국체육대회(1969년 10월 28일~11월 2일·서울)는 50돌 기념대회였다. 전국체육대회가 단순한 체육대회의 성격을 넘어 범국민적인 축제임을 입증한 대회로 전국체전을 기념하는 5종의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축제의 첫 상징은 성화의 전국 일주였다. 체전 개막 닷새 전인 10월 23일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에서 태양열로 채화된 성화는 제1코스 부산-대구-대전-수원-서울(524.2㎞), 제2코스 광주-전주-대전에서 1코스 성화와 합류(236.7㎞), 제3코스 춘천-청평-서울(101.6㎞), 제4코스 강화도 마니산-인천-서울(79㎞), 총 943.5㎞를 전국고등학교 육상선수 1,586명의 주자들에 의해 전국을 일주했다.

그리고 개회식에 처음으로 이북 5도 임원들의 입장했고 카드섹션은 움직이는 화면을 연출했다. 한성여고 3,000여명이 고도의 기술로 각 경기 특유의 동작들을 움직이는 그림(이동화면)으로 형상화했다. 민속놀이가 처음 등장한 것도 50회 체전이었다. 경북 안동고등학교 400여명의 학생들이 ‘차전놀이’를 선보였다.

마라톤 박봉근(경남 해군)이 2시간18분18초로 ‘마의 19분대’ 벽을 깨고 3년만에 한국최고기록을 수립하는 등 육상과 역도에서 13개의 한국최고기록이 수립되었다. 서울이 종합우승을 1년 만에 되찾았다.

1970년 3월 23일 태릉국제수영장이 문을 열었다. 덕분에 전국체육대회의 시기가 통일되었고 수영의 기록 향상이 이루어졌다. 1970년대를 연 제51회 전국체육대회는 1970년 10월 6일부터 11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다. ‘굳센 체력, 알찬 단결, 빛나는 전진’이 이 대회 때부터 영구적인 전국체육대회 모토가 되었다. 참가인원은 처음으로 15,000명(16,332명)을 넘어 비대화를 걱정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개회식 입장권이 하루만에 매진, 체전의 위상이 한층 높아졌다.

경북이 다시 종합우승을 서울로부터 가져왔다.

개회식 매스게임에 경기여자 중·고 1,800명 재학생이 출연해 후프체조 마스게임 ‘새 역사 창조’를 연출했다. 학교 자청 행사로 이후 제52회에는 경기고등학교(1,400명), 제53회에는 경복고등학교(1,500명)와 이화여자고등학교(1,500명) 등이 자발적으로 참가했다.

1971년 10월 8일부터 13일까지 열린 제52회 전국체육대회는 참가규모가 16,507명이나 되었다. 인원이 너무 많아 지방 개최가 곤란, 서울에서 열렸다. 양궁이 여고부에 한해 시범경기로 처음 채택되었다. 당시 양궁은 대한궁도협회가 국궁과 같이 관리했는데 1970년 문교부가 양궁을 안보체육의 하나로 채택하면서 서울 4개교, 나머지 11개 시도에 1개교 씩 모두 15개교 여자고등학교를 양궁 시범학교로 지정하는 덕분에 경기가 가능해진 것이었다.

서울이 경북을 제치고 1위 자리를 되찾았고 경북, 경기에 이어 도세가 약한 전북이 깜짝 4위를 했다.

6. 재미동포 첫 참가 제53회 전국체육대회

제53회 전국체육대회에는 재미동포가 처음으로 참가했다. 11개 시·도에 재일, 재미동포 등 13개 시·도로 늘어났으나 소년체육대회의 창설로 중학부가 분리되면서 고등부와 대학부, 일반부만 참가하게 돼 참가인원은 12,999명으로 줄어들었다.

제54회 전국체육대회(1973년 10월 12일~17일)는 부산직할시가 경상남도에서 분리된 뒤 개최한 대회였다. 제54회 대회부터 기록 향상을 위하여 신기록 등급에 따라 세계신 100%, 한국신 50%의 가산점을 주었다.

제55회 전국체육대회(1974년 10월 8일~13일)는 경기운영면에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양궁에서 국제방식에 따라 4명의 선수가 표적지 기록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서로 합의해 점수를 조작한 것이 밝혀진 것. 이들 기록들은 모두 몰수처리가 되었지만 전국체육대회 사상 처음으로 승부조작이 일어났다는 점에서 충격을 안겼다.

또 한가지는 배구에서 발생했다. 사전 열람할 때는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던 선수자격을 경기에서 패한 팀이 뒤늦게 소청서를 제출하자 경기단체 심판부가 등록규정을 적용해 승자 측에 몰수선언을 했다. 그러나 대회본부가 사전열람 규정에 따라 몰수선언을 다시 무효로 판결, 승자의 손을 들어주는 사건이 일어났다.

전국체육대회는 광복 30돌을 기념하는 1975년 제56회 전국체육대회부터 본격적으로 지방순회 개최 시대에 접어들었다. 지방 도시들이 전국체육대회 개최를 원하게 된 것은 전국체육대회가 체육, 문화행사와 함께 볼거리, 먹거리를 풍성하게 제공하는 전국적 축제(體典)였기 때문이었다.

전국체전은 경기와 함께 각종 문화행사와 볼거리, 먹거리 등이 함께 이루어졌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자연스럽게 도시를 홍보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제공했다. 국고를 지원받아 새롭게 도로를 만들고 도시를 정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 관광지를 전국에 소개하는 효과도 낳았다. 전국에서 몰려 든 선수, 임원뿐만 아니라 관광객들로 인해 경제적인 효과도 엄청났다.


스포츠적인 측면에서의 장점도 많았다. 전국체육대회 개최도시마다 국제 규격의 메인스타디움이 건설되고 실내수영장, 실내체육관들이 들어섰다. 노후 장비들은 최신식으로 교체됐다. 전국체육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팀들도 창단되었다. 당연히 경기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지방 체육인들의 중앙무대 진출도 늘어났다.

때문에 각 시도에서는 전국체전을 유치하기 위해 ‘전국체육대회 유치위원회’를 꾸려 유치경쟁을 벌였다. 전국체육대회 지방 순회 개최로 서울은 1981년 제62회 전국체육대회 이후 38년 만인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를 열수 있게 되었다.

광복 제30주년 기념 제56회 전국체육대회는 1975년 10월 7일부터 12일까지 경상북도 대구에서 개최됐다. 제57회 전국체육대회는 부산 개항 100주년을 기념해 10월 12일부터 17일까지 부산 구덕경기장에서 열렸다. 몬트리올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양정모가 성화 최종주자로 나섰으며 삭발 투혼의 조재기가 선수대표 선서를 맡았다.

1977년 제58회 전국체육대회는 빛고을 광주에서 10월 10일부터 6일 동안 열렸다. 전라남도는 ‘총화체전·질서체전·절약체전’의 기치를 걸고 예술제전도 마련했다. 광주시의 중·고교들이 총 동원되다시피한 개회식은 향토색 짙은 마스게임으로 갈채를 받았다. 특히 해남 해녀들이 직접 부른 ‘강강수월래’는 개회식의 백미였다. 경기도가 서울의 7연패를 막으면서 사상 첫 종합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제59회 전국체육대회(1978년 10월 12일~17일)는 정부수립 30주년과 인천 개항 95년을 맞아 인천에서 열렸다. 경기도는 경기장뿐만 아니라 도시 기반 시설들을 정비하고 개축하여 새로운 도시로 탈바꿈했다.

개회식에는 1973년 제54회 전국체육대회 이후 5년 만에 대통령이 참석했고 사우디아라비아 선수단도 첫 선을 보였다. 개최도인 경기도가 서울을 누르고 2년 연속 종합우승했고 충남이 단숨에 3위에 올랐다.

7. 목봉체조 선보인 회갑 체전

‘갑년 체전’인 제60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한 충남은 19년 전 제41회 대회를 개최한 대전공설운동장을 없애고 3만5천명 수용 규모의 최신형 메인스타디움에다 국내 최대 실내수영장과 사격장도 마련했다.

개회식 매스게임으로 목봉체조가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남녀 각 1명씩 2명이 성화 최종주자와 선수대표 선서를 맡았다. 서울이 2년 만에 1위를 탈환했으며 개최지 충남은 2년 연속 3위를 기록했다.

1980년 제 61회 전국체육대회도 어김없이 열렸다.

60회 체전 후 1년간은 온통 변화의 소용돌이 속이었다. 정치적인 사건들이 체육회로 이어져 7월 14일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 사임하고 제26대 조상호 회장이 취임했으며 9월 1일에는 전두환이 제11대 대통령 취임식을 가졌다. 체전은 10월 8일부터 6일 동안 전라북도 전주를 비롯해 군산과 이리에서 3개 도시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체육기자단 선정 최초의 최우수선수(MVP)로 남자 양궁 90m 더블 세계신기록(606점)수립자인 박익수(전남·전남체육고)가 뽑혔다. 경기도가 2년 만에 서울을 누르고 3번째 종합 우승했고 3위는 제51회 대회 이후 10년 만에 전라남도가 차지했다.

제62회 전국체육대회는 7년 만에 서울에서 개최됐다. 대구와 인천이 경북과 경기도에서 직할시로 분리되어 국내는 13개 시·도가 되었고 해외 동포는 일본·미국·캐나다·독일·사우디아라비아·홍콩에 이어 스웨덴 동포선수단이 처음으로 참가해 7개국으로 늘어났다.

종합성적은 변화가 컸다. 전년도 종합우승을 차지했던 경기도가 인천시의 분리로 7위, 경북이 대구의 분리로 11위로 떨어졌다. 전남, 충남이 서울을 잇는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제63회 전국체육대회는 마산과 창원을 중심으로 진주, 진해 등 4개 도시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붐 조성을 위해 내륙의 모든 시·도를 연결하여 2개 코스로 성화를 봉송했다. 제1코스는 마니산-수원-대전-전주-광주-순천-진주-마산으로, 제2코스는 마니산-서울-춘천-원주-충주-김천-대구-경주-울산-부산-구포-김해을 거쳐 마산으로 와서 합치는 방식으로 주자만도 2,232명이나 되었고 봉송거리는 1,575km에 달했다.

8. 인천 개항 100주년 기념 대회-대회 중 버마(미얀마) 아웅산 폭파 사건 발생

제64회 인천 전국체육대회는 서울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에 대비해 전산화를 실시한 ‘과학체전’이었다. 컴퓨터가 일반화되지 않은 상태여서 전산화라는 말조차도 생소하게 느끼던 시절이었다.

대한체육회는 경기기록 및 채점, 대진 추첨을 전산화했다. 메인전산장비 운영의 오류로 추첨한 내용이 무효가 되어 부득이 1일간 연장하여 종전과 같이 수작업으로 진행해야 했지만 처음으로 전산화의 길을 열긴 했다.

인천공설운동장의 성화는 천연가스로 개선했다. 대회기간 중 버마(미얀마) 아웅산 폭파 암살사건이 발생하여 폐회식은 아웅산 사태를 규탄하는 체육인 궐기대회가 되었다.

1984년 제65회 전국체육대회(10월 11일~ 16일)는 경북에서 직할시로 분리된 대구에서 열렸고 제66회 전국체육대회(1985년 10월 10일~ 15일)는 사상 처음으로 강원도가 개최했다.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인 볼링이 전국체육대회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강원체전은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대비하여 요트, 카누, 근대5종 종목을 정식종목으로 채택했다. 그리고 사상 처음으로 선수촌 아파트를 신설 운영함으로써 1년 앞으로 다가 온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 운영을 시험했다. 강원도는 춘천 후평동에 신축 중인 주택공사 아파트를 대회기간 중 선수단 숙소로 활용해 13개동 410세대에 3,600명을 수용했다.

9. 문화, 경제 통합체가 되다 68회

서울이 ‘바덴바덴의 기적’을 이루며 1988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뒤 1986년 아시안게임도 유치함으로써 우리나라 스포츠는 2년 터울로 열리게 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으로 모든 초점이 맞춰졌다.

정부조직에 체육부가 설치되고 체육우대정책이 실시되면서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출범에 이어 민속씨름이 탄생하고 농구, 배구 등도 프로화에 뛰어들었다. 말 그대로 ‘스포츠 공화국’으로 볼거리가 풍성해지면서 핵심선수들이 빠진 아마추어 종목의 전국체육대회는 관심의 중심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되었다.

제67회 전국체육대회는 서울아시안게임(1986년 9월 20일~10월 5일)을 3개월 앞둔 6월 20일 서울, 경기도에서 열렸다. ‘전국체전 서울답게, 86, 88 주인답게’라는 구호 아래 열린 서울아시안게임조직위원회가 아시안게임 최종점검을 겸해 경기운영과 개회식 전반에 경험축적을 위해 참여했고 아시안게임 25개 종목은 실제 경기가 열리는 대회 경기장을 사용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를 한해 앞둔 1987년 제68회 전국체육대회(10월 13일~18일)는 광주가 직할시 승격 1주년 기념으로 광주직할시와 전남의 7개 시·군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제67회 전국체육대회에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두 불참했던 것과는 달리 제68회 전국체육대회에는 다음해 올림픽에 대비한 경험축적을 위해 전원 참석해 대회사상 최대의 신기록이 작성되었다.

양궁의 김수녕 선수의 70m 개인종합 비공인 세계신기록 2개를 비롯하여 한국신기록 44개 한국타이 3개 주니어 신기록과 타이기록 10개, 대회신기록과 타이기록 475개 등 534개의 기록이 작성되어 최다 신기록을 작성하였다. 특히 소년체전을 통해 성장한 역도의 전병관(전주고)은 인상(111.5kg)과 용상(150.0kg)에서 한국신기록을 수립하고 다음해 서울올림픽에서 역도 최초의 은메달,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전국소년체전 출신 최고의 선수로 기록되었다.

1988년 제69회 전국체육대회는 5월 9일부터 22일까지 종목별로 전국체육대회라는 표기만 하고 경기단체가 주최하는 대회와 겸하여 종목별로 개최했으며 종목별 종합시상만 하고 시·도 종합시상, 종합 개·폐회식은 하지 않았다.

제70회 전국체육대회는 1989년 9월 26일부터 6일 동안 경기도 수원을 주 개최지로 하여 열었다. 세계 48개국 1,326명의 해외 동포들이 참가하는 제1회 세계한민족체육대회와 함께 치뤘다. 전국체육대회가 한민족 축제로 확대된 것이었다.

경기에는 대전이 직할시로 분리돼 15개 시도에 9개 해외 동포 선수단 등 34개 종목 20,447명의 사상 최대 인원이 참여했다.

경기도가 3년 만에 종합우승을 되찾았고 경상남도가 3위에 올랐다.

제71회 전국체육대회(1990년 10월 15일~ 21일)는 충북에서 열렸다. 대회에 대한 관심도를 높이기 위해 첫날은 개회식만 거행했고 충주호의 물결을 이용해 대회 사상 처음으로 성화를 수상 봉송했다.

제72회 전국체육대회는 1963년(44회) 1980년(61회) 대회를 개최한 전라북도가 전주를 주 개최지로 이리, 군산, 정주, 남원, 김제, 부안 등 7개 시·군에서 1991년 10월 7일부터 7일간 분산 개최했다.

제73회 대구 전국체전(1992년 10월 10일~16일)에는 시·도 선수단에 이어 바르셀로나올림픽 메달리스트 전원이 입장해 개회식 열기가 대단했다. 대구가 직할시로 승격한 뒤 처음 3위를 기록하며 성취상까지 받았다.

10. 차 없는 거리 금남로 제74회

1993년 제 74회 전국체육대회는 광주에서 열렸다. 37개 종목에 22,447명이 참가했다. ‘빛의 축제’로 명명한 개회식 전날 전야제행사에서는 금남로를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 1부 길놀이, 2부 거리 축제로 나누어 진행했다.

마라톤 이봉주가 레이스 도중 발가락 부상으로 운동화에 피가 흥건하게 비치는 가운데서도 투혼을 발휘하여 종전기록을 2분14초나 앞당기는 2시간10분27초의 대회신기록으로 우승,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IOC창립 100주년기념 “스포츠 및 올림픽 이상 실현의 해” 기념 대회로 열렸던 1994년 제75회 전국체육대회는 10월 27일부터 7일간 대전에서 열렸다.

광복 50주년 기념대회인 제76회 전국체육대회(1995년 10월 2일~8일)는 전국체육대회 사상 처음으로 경상북도의 중소도시인 포항시를 주 개최지로 9개 시군(경주,김천,안동,구미,문경,경산,예천,울진,점촌)이 협력해 개최했다. 전국체육대회가 각 시도의 중소도시로 확산된 것으로 전국체전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포항체전은 역대 체전 가운데 경기장이 가장 많은 9개 지역으로 분산 배치되었다.

강원도 춘천, 원주, 강릉, 속초 4개 지역에서 열린 제77회 전국체육대회(1996년 10월 7일~13일)는 체전사상 처음으로 반달곰을 형상화한 ‘달곰이’란 이름의 마스코트가 등장했다.

제79회(1998년 9월 25~10월 1일) 전국체육대회는 우리나라 시도 가운데 유일하게 대회를 개최하지 못한 제주도가 처음 개최한 전국체전이었다. 성화대는 한라산을 본떠 만들었고 개회식 시도 표지판수 복장도 해녀 복장의 의상과 물안경을 이마에 걸치는 특이한 모습이었다. 공개 행사도 해녀들의 꿈과 희망을 태왁춤으로 표현하고 식전행사로 물허벅춤, 제주방언으로 특이하게 꾸며 제주도답게 멋지게 치뤘다.

제80회 전국체육대회(1999년 10월 11일~17일)는 인천시가 준비했다. 역도105kg급 인상과 용상에서 아시아신기록을 수립한 김태현이 대회MVP로 선정 되었다. 경기도가 65,008점으로 4연패를 했다. 개최지 인천이 서울에 이어 처음 3위를 했다.

새 천년 첫 전국체육대회는 2000년 2월 14일 개막된 제81회 전국동계체육대회였다. 이때까지의 동계체전 개회식은 보통 설상 경기가 열리는 주경기장에서 치러졌으나 이때만큼은 개·폐회식을 모두 태릉에서 열었다. 태릉 국제실내스케이트장의 개장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2000년 제 81회 전국체육대회는 10월 12일부터 18일까지 부산광역시에서 열렸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의 리허설을 겸했다. 마니산 참성단 ‘마니산 성화’, 금강산 옥류동 무대바위 ‘통일의 불’, 포항 호미곶 ‘영원의 불’ 등 3개 지역에서 채화된 성화가 각종 행사를 곁들여 전국을 일주하며 전국체육대회 분위기를 한껏 돋우기도 했다.

경기도가 1996년 강원체전 이후 5연패를 달성하고 서울이 5년 내리 준우승을 했으며 개최지 부산이 1987년 이후 다시 종합 3위에 올랐다. 대회 최우수선수(MVP)에는 역도 여고부 5개 체급에 걸린 금메달 15개 가운데 14개를 휩쓴 전라북도 순창고 역도부가 선정됐다. 체전 MVP에 개인이 아닌 단체가 수상한 것 첫 사례였다.

제82회 전국체육대회(2001년 10월 10일~16일)는 천안을 주 개최지로 충청남도에서 열렸다. 개최지 충청남도가 종합점수 68,996점으로 서울(66,959점)에 단 37점차 앞서 사상 처음으로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11. 제주도에서 열리다 제83회

제83회 전국체육대회(2002년 11월 9일~15일)는 제주도에서 열렸다.

제주도 체전 성화는 한라산 백록담 정상에서 처음 채화되었다. 나름 의미가 있었지만 역대 성화채화 장소였던 경기도에 돼지 콜레라가 발생해 부득이하게 장소를 변경한 것이었다.

2003년 전북체전 개회식은 월드컵 축구경기장에서 야간에 열렸다. 2004년 충북체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았다. 1979년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불참한데 이은 두 번째 사례였다.

생활체육이 전국체전에 등장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으로 전라북도 전주에서 열린 제84회 전국체육대회(2003년 10월 10일~16일)는 바둑과 산악을 처음으로 전시종목으로 채택했다. 제85회 충북체전(2004년 10월 8일~14일)은 수상스키, 공수도, 인라인스케이팅 마라톤, 스쿼시 등을 전시종목, 시범종목으로 편입시키며 생활체육의 영역을 넓혔다. 2004년 제85회 충북체전은 경제와 문화를 체전에 접목했다. 우수 벤처제품 박람회, 농특산물 장터를 개설했다. 조사결과 생산유발효과 1100억 원, 소득유발효과 398억 원이었다.

제86회 울산전국체전(2005년 10월 14일~20일)은 스포츠에어로빅, 여자검도(단체전), 세팍타크로, 당구를 전시종목으로 채택했다. 울산전국체전은 맑아진 태화강을 중심으로 처용문화제를 비롯한 구·군 문화제, 음식문화축제, 노동문화제, 온양 옹기축제 등 다양한 축제들을 함께 했다.

제87회 경북체전(2006년 10월 17일~ 23일)에서는 남자 소프트볼, 컴파운드 양궁에 문호를 개방했고 제88회 광주체전(2007년 10월 8일~ 14일)에는 마라톤, 야구, 정구, 복싱, 유도, 검도, 소프트볼, 인라인롤러스케이트, 당구, 공수도, 바둑, 양궁, 산악, 수상스키를 동호인 참가종목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2008년 제89회 여수체전에서는 베이징 올림픽 남자 수영 400m의 박태환을 비롯해 장미란과 남자 역도의 사재혁, 사격의 진종오, 배드민턴의 이용대와 남녀 단체전 동반우승의 양궁선수 등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모두 출전, 체전을 뜨겁게 했다.

2009년 제 90회 대전체전(10월20일~26일)에서는 처음으로 항공스포츠가 동호인 종목으로 전국체육대회에 모습을 보였다.

7. 전통과 첨단, 민속과 아이돌의 어울림 91회

제91회 진주전국체전(2010년 10월6일~12일) 폐회식에는 시크릿, SG워너비, 박현빈, 휘성 등 인기가수들이 등장해 청소년들의 열렬한 환호속에 콘서트장을 방불케 했고 ‘강남스타일’로 단숨에 세계적인 가수로 떠오른 싸이가 개회식에 등장한 제92회 대구체전(2012년 10월11일~17일)은 입장권을 추가로 발급하는 사태가 일어날 정도였다.

관중동원을 위한 궁여지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훌륭한 시도였다. 2011년 제92회 경기도 고양 전국체전(10월6일~12일)은 개회식을 사상 처음으로 메인스타디움이 아닌 일산 호수공원 한울광장에서 개최하고 성화를 경인뱃길과 제트스키를 이용해 봉송했다.

22년 만에 경기도가 개최지가 된 제92회 고양체전에서는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가 관중을 몰고 와 리듬체조를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첨병 역할을 톡톡히 했다.

2016년 제97회 전국체육대회는 충남 아산시에서 열렸고 2017년 제98회 체전은 충북 충주에서, 2018년 제99회 체전은 전북 익산에서 개최됐다.

2019년 제 100회 전국체육대회는 체전 발상지인 서울이 개최했다. 10월 4일 오후 6시30분 잠실종합운동장 메인스타디움에서 선수단 입장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다. 국민의례, 문화체육부장관의 개회선언, 대한체육회장의 개회사, 서울특별시장의 환영사, 대통령의 치사로 이어지는 진행은 예년의 전국체육대회와 차이가 없었지만 ‘몸의 신화, 백년의 탄생’이란 주제로 20분간 펼쳐진 공연과 성화 점화 장면은 지난 100년 전국체육대회가 갖는 의미를 되돌아보게 했다.

새롭게 100년을 시작하는 2020년 전국체육대회는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합동으로 여는 체전으로 다시 한번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통합되기 전 두 단체는 별도로 체전을 진행했다. 대한체육회는 전국체육대회, 국민생활체육회는 전국생활체육대축전이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report@maniareport.com
<저작권자 © 마니아리포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마니아TV

  • 5번째 내셔널 타이틀 따낸 유소연의 예선 라운드 샷(ft. 안...

  • 한·미·일 여자 프로골프를 대표하는 고진영, 최혜진, 이보...

  • [영상] 안소현, 외모보다 빛나는 티샷 '천사가 따로 없네'

  • [투어프로스윙]국대출신, 2년차 윤서현의 드라이버 스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