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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3) 두번이나 5년 징계를 받은 배재학교

2020-05-12 07:39

1887년 개교 당시의 배재학당의 모습
1887년 개교 당시의 배재학당의 모습
두 번씩 5년 출전 징계 받은 배재학교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배재학당(현 배재중고등학교의 전신)은 근대 우리나라 학교체육사 뿐만 아니라 근대 체육 발전에도 빼놓을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 중등학교 교육과정이 5년제가 되면서 배재고등보통학교(배재고보)로 교명이 바뀌었지만 배재는 체조, 정구, 축구, 야구, 육상, 농구, 유도, 검도, 권투, 럭비, 수영, 탁구, 씨름, 역도, 사이클, 배구, 등 16개 종목을 육성해 우리나라 근대 학교체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만큼 배재 재학생 뿐만 아니라 졸업생들은 체육에 관한한 최고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경성(서울)에는 배재고보를 비롯해 경신학교, 휘문고보, 중앙고보, 보성고보, 양정고보 등도 각종 경기들을 육성하면서 서로가 질 수 없다는 경쟁심이 대단했다. 이런 상호 경쟁심은 우리나라 초창기 근대체육들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과격한 운동장 사고로 사회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앞서 '운동회에 독아 드러낸 일제'(제4회)에서 언급했지만 조선체육회가 출범하기 전에 가장 큰 운동장 사고는 일제가 서울에 있는 사립학교들의 연합 운동회를 강제로 중지시킨 '청파정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체육회가 출범한 뒤에도 조선체육회 임원들이 가장 신경을 곤두 세웠던 부분도 바로 경기장 소란이었다.

1919년 3·1 독립선언을 계기로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었다고는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조선인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매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체육회 출범하기 1년 전에 조선체육협회가 먼저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인들만의 단체인 조선체육회를 또 창립하자 더욱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판에 청파정 사건과 같은 운동장 소란이 일어난다면 일제가 어떤 방법으로 방해를 하고 와해공작을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체육회 초대 장두현 회장을 대리해 이사장으로 사실상 전권을 행사하고 2대 회장으로 취임한 고원훈 회장은 보성법률상업학교(뒤에 보성전문학교로 현 고려대학교의 전신) 교장으로 누구보다 청파정 사건에 대한 파장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고원훈 회장은 심판 판정 불복이나 경기장 소란에 대해 항상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가운데 1921년 2월에 전국에서 18개 팀이 참가해 열린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청년단 배재구락부(전배재)와 숭실구락부(전숭실)의 준결승전에서 오프사이드 판정을 둘러싸고 서울과 평양 응원단들이 서로 갈라져 주먹다툼이 벌어지는 사단이 난 것. 이 바람에 중학단과 청년단까지 우승팀을 내지 못하고 유야무야로 끝나고 말았다. 이것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1921년 운동장 소란에 덩달아 관중들까지 흥분해 사고가 더 커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진은 1921년 축구대회 소란으로 흥분한 관중들 모습
1921년 운동장 소란에 덩달아 관중들까지 흥분해 사고가 더 커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사진은 1921년 축구대회 소란으로 흥분한 관중들 모습
경성시내 7개 교장들의 자체 결의…1년 3개월만에 해제돼
이 사고가 난 지 불과 4개월 만인 6월 25일 조선체육회가 후원한 제1회 전조선소년야구대회에서 이번에는 유혈사태가 나고 말았다. 또 배재학교가 문제였다. 결승전에서 배재학교가 성서주일학교에 4-2로 패하자 배재응원단에서 성서에 나이 많은 선수가 있다고 항의를 하면서 배재응원단 400여명이 관중들과 충돌하며 경기장에 난입해 눈에 보이는 대로 때리고 부수고 난동을 부렸다. 심지어 한 관중은 배재학교 아펜젤러 교장에게 뺨을 맞았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결국 일제 경찰들이 나서 소란이 진정되었으나 배재학생들에게 매를 맞은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으며 5~6명은 중상을 입었고 조선체육회서 심판으로 파견됐던 현홍운, 박천병도 매를 맞아 부상을 입었다. 이런 불상사에 서울시내 경신학교, 보성고보, 보성초등학교, 보성법률상업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중동학교 등 7개 학교 교장들은 앞으로 5년 동안 배재가 참가하는 대회에는 불참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배재고보는 7개 학교장들의 결의에 따라 첫 번째 5년 징계를 받았으나 1년 3개월만인 1922년 9월 21일 다시 7개 학교 교장들의 탄원으로 해제가 됐다.

하지만 배재 응원단의 소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23년 5월 17일 제4회 전조선야구대회 청년단 준결승에서 중앙체육단과 배재구락부가 맞붙어 17-4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일어났다. 배재응원단이 중앙체육단 선수가 불손한 언동을 했다고 소란을 피우자 윤치영 주심이 중앙체육단 박석윤 주장과 배재 마춘식 감독에게 퇴장명령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주심의 퇴장 조치에 불복해 소란이 계속되자 응원단 소란이 배재측이 더 심하다고 판단한 윤치영 주심은 배재 측 응원단 전원에게 퇴장명령을 내렸고 이에 불복에 배재구락부는 경기를 기권해 버렸다. 경기장 소란을 이유로 응원단 전체에게 퇴장 명령을 내린 것은 이례적이기도 하지만 당시 경기장 소란에 심판들이 얼마나 민감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체육회 결의로 5년 징계…만 2년만에 해제
배재의 사고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체육회가 창립 1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야구, 정구, 육상을 한데 묶어 종합대회로 치른 1929년 6월 17일 제10회 전조선경기대회 마지막 날 배재고보와 휘문고보의 중학단 야구결승전에서도 터졌다. 별 문제가 없이 진행되는 8회 초 2-1로 배재가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휘문이 1사 만루의 기회를 잡았다. 이때 투수가 2루 주자를 잡으려고 볼을 던졌으나 심판이 세이프를 선언하자 배재측은 아웃이라고 항의를 하다 배재가 기권을 하자 심판은 “배재 측 기권으로 9-0으로 휘문 승리”를 선언했다. 이것이 발단이 돼 배재 응원단 일부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세이프를 선언한 김태호 2루심을 집단으로 폭행하고 말았다.

이에 조선체육회는 6월 17일 긴급이사회를 열어 배재 또는 배재 관계 단체가 앞으로 5년 동안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어떤 대회라도 참가를 못하도록 금지하는 한편 마춘식 감독은 조선체육회 회원에서 제명하고 어떤 자격으로도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대회에 참여할 수 없도록 했다. 또 이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조선체육회 제6대 위원장을 지내고 상무이사를 맡고 있던 김규면, 경기부 상무간사 신기준, 서무부 상무간사 박영진, 선전부 상무간사 김동철은 인책 사임했다.

이와 함께 경신학교, 중앙고보, 휘문고보 3개 학교도 야구부장 회의를 열고 “앞으로 5년 동안 배재고등보통학교생도 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관계자가 배재고보의 이름 또는 배재고보와 관계있는 명칭으로 참가하는 야구대회에는 일체 참가하지 않는다.”고 결의하기도 했다. 배재학교의 두 번째 5년 출장정지였다.

배재학교는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2번씩이나 5년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배재학교가 육성한 모든 종목에서 모두 우승을 다툴 정도로 우리나라 학교체육의 선봉이었고 또 그만큼 응원단의 열성도 대단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배재학교의 징계는 1차때와 마찬가지로 5년을 넘기지 않았다. 햇수로는 3년, 만 2년이 다 되어 가는 1931년 5월 9일 조선체육회 이사회에서 무조건 해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마무리됐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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