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대한민국 스포츠100년](19)제1회 전국체육대회(상)

2020-04-27 07:17

잔국체육대회 효시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던 옛 배재고보 운동장(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터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 서울시가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를 기념해 설치했다.
잔국체육대회 효시인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던 옛 배재고보 운동장(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터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 서울시가 2019년 제100회 전국체육대회를 기념해 설치했다.
전국체육대회 효시, 전조선야구대회의 탄생까지
동아일보가 창간(1920년 4월 1일)되고 10일만에 변봉현이 '조선의 체육기관의 필요성을 논함'이라는 논설 기사를 세 차례 내보낸 뒤 불과 3개월만인 7월 13일 조선체육회가 창립했다. 말 그대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이렇듯 조선체육회가 재빠르게 창립을 했지만 살림살이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무(
無)였다. 일정한 기본재산도 없었고 임원들이 제대로 근무할 수 있는 사무실도 없어 창단 준비하면서 임시사무실로 활용했던 유문상의 경성직물회사와 이원용의 광신양화점으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지내야 했다.

조선체육회는 조선인의 체력향상을 위해 각종 대회 개최를 규정한 회칙에 따라 어떤 경기를 열어야 하느냐를 두고도 논란이 빚어졌다.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를 했거나 임원으로 이름을 올린 경기인들은 나름대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종목의 대회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혼란이 있었다.

실제로 당시에는 축구와 야구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조선체육회는 출범한 직후인 7월 말에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를 배재고보 운동장에서 먼저 열기로 했다. 하지만 당시 축구는 규칙이나 심판 등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그냥 크게 멀리 차면 최고로 치는 소위 ‘뻥축구’였다. 이 바람에 걸핏하면 판정을 두고 서로 싸움하기 일쑤여서 자칫 파행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컸다.


결국 축구대회 대신 야구대회 개최로 바뀌고 말았다. 조선체육회가 출범한 지 거의 4개월이 지난 1920년 11월 4일에야 첫 사업으로 야구대회를 개최하게 된 것도 열악한 재정과 근무 환경이 크게 작용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체육회 첫 경기대회 개최 종목을 두고 축구와 야구가 경쟁을 벌인 탓도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축구 대신 야구를 첫 행사로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도쿄 유학생 출신으로 이중국, 이원용, 윤기현, 변봉현, 권승무 등 야구인들이 조선체육회 창립 위원으로 많이 참여한 덕분이었다. 이들 도쿄유학생으로 이루어진 야구단은 1911년부터 매년 전국을 순회하며 모국 방문경기를 펼쳤고 1912년 10월에는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소속 야구부원 11명이 조선 야구사상 최초로 일본 원정을 가기도 했다. 1915년 6월에는 조선공론사 주최로 용산철도구장에서 전조선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조선 최초 야구대회가 7이닝 경기로 개최되기도 하는 등 나름대로 대회를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특히 1915년 창설된 오사카아사히신문사(大阪朝日新聞社)가 주최한 전일본 중등학교야구우승권대회(일명 갑자원대회)에서 사용한 야구규칙과 대회 요강, 연도별 대회 기록 등을 입수해 이를 참고로 하면 야구대회를 잘 치를 수 있다는 자신감이 크게 작용했다. 이에 따라 규칙과 경기요강 및 기타 자료들을 이원용과 이중국이 유문상의 집에서 번역하고 그 교열은 배재고보 교무주임으로 있는 이중국의 형인 이중화가 보았다.


이때 마련한 대회 요강, 경기규칙 및 심판규정을 살펴보면 당시 한국 야구계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요강이나 경기규칙, 심판규정들을 모두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 가운데 경기규칙(야구 규칙은 아님) 첫 머리에 ‘심판은 최종으로 함’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아주 당연한 말이지만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이전에 열린 야구경기에서 심판 판정에 일체의 이의나 불복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각종 경기가 처음 도입되면서 정확한 경기규칙이 채 정립되지 않은 탓에 심판 판정에 불복하는 사례가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경기장은 이때 서울에서 야구를 할 수 있는 장소는 용산철도야구장과 배재고보야구장, 경성중학운동장 등 세 곳 정도뿐이었다. 3·1 운동 이전에 야구를 자주했던 훈련원 구장은 대청이 있던 자리에 동대문소학교(전 덕수고 자리)가 학교를 건축하게 되면서 쓸 수가 없었다. 용산철도구장이나 경성중학은 모두 일본인들이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체육회가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체육활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아펜젤러가 교장으로 있는 배재고보 운동장이었다.

배재고보 운동장은 1902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1916년에 비스듬한 언덕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어 축구, 야구 등 구기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혔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배재고보 운동장에 이때 이미 축구 골포스트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골포스트라고 하지만 소나무를 잘라서 양쪽에 세우고 크로스바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이어 만든 것이었다.

축구 골문을 만들면서 배재학당 아펜젤러 교장은 윤치호, 이상재 등 민족지도자들과 상의를 한 끝에 흰색으로 골 전체를 칠하기로 했다. 흰색은 백의민족을 상징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 날 경찰이 들이 닥쳐 진행 중인 경기를 중단시키고 무조건 골포스트를 철거하라고 우겼다. 흰색이 조선민족의 항일의 상징이라는 것이었다. 아펜젤러 교장은 그렇다면 다른 색으로 고치겠다고 약속, 일단 일본 경찰들을 물리친 뒤 흰색을 검은 색으로 바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야구대회를 위해 골포스트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시설을 꾸몄는데 다이아몬드 네 모퉁이에 베이스를 두고 공이 밖으로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망이 아닌 어망과 같이 실로 만든 네트를 치고 경기를 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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