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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년 전 패배한 '남한산성'에 삶의 길을 묻다

[노컷 리뷰] 비장한 사극 '남한산성'이 던진 이야기들

2017-09-28 06:00

380년 전 패배한 '남한산성'에 삶의 길을 묻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어떻게 삶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만약 척화파와 주화파의 명분 논쟁이 전부였다면 영화 '남한산성'은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될 영화였을 것이다.

영화는 차디찬 1636년의 겨울,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는 인조와 조정 대신들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명분만 챙기는 그저 그런 사대부들 중 유독 눈길을 끄는 이들이 있다. 바로 예조판서 김상헌과 이조판서 최명길이다. 혹독한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백성들과 군인들은 지쳐가고, 조선은 항복 아니면 항전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남한산성에서 어떻게든 담판을 지어야 하는 시점이 다가오는 것이다.

무고한 백성들을 살려야 한다는 결론은 같다. 그러나 그 결론까지 이르는 과정은 전혀 다르다. 최명길에게 명예로운 죽음은 삶의 길이 아니다. 삶의 길은 말 그대로 어떠한 치욕과 굴욕 속에서도 살아남는 것이다. 응당 군주라면 적 앞에 머리를 조아리더라도 백성들과 함께 살아날 길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군주가 걸어야 할 삶의 길이다. 그가 '주화'를 주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러나 김상헌에게 그런 삶은 곧 죽음의 길이다. 살아도 사람답게 살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생의 죽음을 뜻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도를 찾기 보다는 죽어마지않겠다는 각오로 싸워내면 삶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 신념을 배반하는 삶은 이미 죽어버린 껍데기의 연명일 뿐이다.

380년 전 패배한 '남한산성'에 삶의 길을 묻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는 함부로 따질 수가 없다. 그들 각자의 말에 모두 그만한 정당성과 논리가 존재한다. 다만 최명길은 밖에서, 김상헌은 안에서 자신의 신념을 따라 움직인다.

영화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47일 간 몸을 피했다가 결국 청나라에 굴욕적 항복을 했다'는 역사의 짧은 한 문장 속에 얼마나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치열한 생존법이 숨어 있었는지 펼쳐낸다. 소설 속 중심 사건을 따라 시종일관 진지하고 묵직하게 흘러가지만 이들의 운명이 모두가 아는 결말에 도달하기 직전까지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최명길과 김상헌, 두 사람이 최악의 상황 속에서 각자 생각하는 삶의 길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조력자로, 때로는 희생자로 등장하는 민초들은 '남한산성'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또 다른 존재들이다. 사대부인 최명길과 김상헌은 '남한산성'의 전시에 수많은 백성들과 마주하며 결국 그들에게는 명과 청 둘 중 누구를 섬기느냐는 논쟁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그저 자신의 식구들과 끼니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삶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조선 왕조나 사대부들과는 너무도 다른, 그들이 걷고자하는 삶의 길이다.

김상헌이 결국 모든 옛것들이 사라져 새로이 시작되어야 비로소 백성들이 살고자하는 길이 열린다고 이야기하는 건 사대부로서 가진 신념을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얻게 된 깨달음이다.

380년 전 패배한 '남한산성'에 삶의 길을 묻다
배우 김윤석과 이병헌을 비롯해 박해일, 박희순, 고수 등이 펼치는 섬세하면서도 선굵은 연기가 남한산성이라는 제한된 공간 안에서 최대한의 시너지를 발휘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든다. 특히 김윤석과 이병헌, 두 사람이 벌이는 조정에서의 논쟁 장면은 '말로 벌이는 액션'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다.

차갑고 혹독한 겨울의 색채를 덧입은 영화는 자극적인 색채와 질감을 대비시켜 성 안의 절박한 상황을 드러낸다. 하얗게 눈으로 뒤덮인 성 안에서 이동수단이 아닌 식량이 된 동사한 말들의 뜨거운 피와 내장, 검붉은 속살이 그러하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이야기처럼 영화는 죽은 말들이 고기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남한산성'의 척박한 상황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엄밀히 말하면 '남한산성'은 완전한 패배도, 그렇다고 통쾌한 승리도 아니다. 명목상으로는 최전방에서 버티다 무릎 꿇은 '굴욕적' 화친이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결과가 아닌 그러한 선택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여정에 의미를 둔다. 유쾌하거나 따뜻한 추석 영화는 아닐지라도 한번쯤 삶을 향해 정직한 물음을 던져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오는 10월 3일 개봉.CBS노컷뉴스 유원정 기자 ywj2014@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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