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스포츠에서 ‘멀티 플레이어’는 좀처럼 듣기 어려웠던 단어였다. 아니, 오히려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어느 포지션에 두어도 ‘고만고만한 실력’을 선보이는 선수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수들 중 다수가 월드컵을 계기로 해외 진출에 성공한 바 있다. 박지성(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대표적인 예다. 이때를 기점으로 스포츠에서 ‘멀티 플레이어’는 ‘어떠한 포지션에 놓아도 제 몫을 잘하는 선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2015프로야구는 ‘불펜 투수 보직 파괴’의 시대
야구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야 전 포지션을 소화할 줄 아는 선수는 감독의 기용 방식에 따라 출장 기회를 자주 부여받을 수 있고, 외야 수비에 능한 선수들 중에서는 중견수, 좌익수, 우익수를 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1루 수비까지 무난하게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도 있다. 이러한 선수들이 많은 팀일수록 장타력이 있는 베테랑을 지명타자로 돌리는 등 꽤 안정적인 라인업을 운영할 수 있다. 투수 역시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제 몫을 다 하는 선수일수록 많은 경기에 출장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각 구단의 불펜 운영 방식을 살펴보면, ‘멀티 플레이어’라는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말 그대로 ‘불펜 투수 보직 파괴’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정통 마무리 투수의 실종’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시즌 개막에서부터 29일 현재까지 안정적인 마무리를 구축하고 있는 팀은 넥센과 SK, 그리고 KIA 정도다. 넥센에는 손승락이, SK는 윤길현, KIA에는 윤석민이 붙박이 마무리로 자리를 잡으며 팀을 이끌고 있다. 거꾸로 이야기하자면, 앞서 언급한 세 팀 외에 나머지 구단의 마무리 투수는 기대에 못 미치거나 각 팀 사령탑이 교체를 심각하게 고민할 법한 처지에 놓였다고 보면 된다.
마무리 투수에 대한 고민이 가장 큰 팀은 LG다. 이상훈 이후 최고의 좌완 마무리 투수로 여겨졌던 봉중근이 지속적인 부진에 빠졌기 때문이다. 이에 양상문 감독도 지난 NC전을 기점으로 이동현을 맨 마지막에 등판시키는 ‘플랜 B’를 가동하는 듯싶었다. 그리고 이러한 예측은 지난 28일 삼성전에서 마무리로 이동현이 등판하는 것으로 현실이 됐다. 그의 마무리 등판이 지속적으로 이어질지는 앞으로 더 두고 봐야겠지만, 적어도 봉중근으로 시즌을 끌고 가기에는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최근 경기에서 가장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했던 롯데는 ‘세이브 상황’ 자체가 많이 만들어지지 않아 마무리 투수에 대한 고민이 잠시 뒤로 미뤄졌을 뿐, 여전히 뒷문이 불안하다. 지난해 20세이브를 솎아냈던 김승회가 부진으로 엔트리에서 제외된 가운데, 김성배 역시 그다지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정재훈이라는 대안을 생각할 법하지만, 아직 구위가 올라오지 않아 퓨쳐스리그를 전전하고 있는 그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KT와 한화 역시 마무리 투수 변경으로 반전을 노렸거나 현재 성공적으로 안정적인 마운드를 운영하고 있는 케이스다. KT는 당초 김사율 카드를 마무리로 꺼내들 예정이었지만, 역시 부진으로 인하여 제 몫을 다 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장시환이 KT 마운드에서 가장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며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한화는 윤규진에서 권혁으로 마무리 투수를 바꾼 이후 승승장구중이다.
아직 마무리 투수 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스처를 보이고 있지 않지만, 삼성과 두산, NC 역시 ‘불펜 투수 보직 파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28일 LG와의 홈경기에서 블론세이브를 기록한 삼성의 임창용, 부상으로 마무리 투수 대열에서 이탈한 NC 김진성, 4월 1일 한화전 이후 단 한 번도 세이브를 기록하지 못했던 두산 윤명준이 그 주인공이다. 바람직한 모습이건 아니건 간에 이러한 ‘불펜 투수 보직 파괴’ 현상이 2015년 KBO 리그의 트렌드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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