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러한 가운데, 아마야구 역시 프로야구 ‘형님’들과 마찬가지로 지난 3월 30일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고교야구는 ‘우수고교 초청대회’를 통하여 2015 시즌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 바 있으며, 대학야구 춘계리그는 지난 3월 30일자로 시작됐다. 말 그대로 ‘어디를 가건 야구를 볼 수 있는’ 시즌이 온 셈이다. 바로 그 현장에서 오랜만에 아마야구계로 돌아 온 한 인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해까지 한화 이글스에서 코칭 스태프로 몸을 담았던 이선희(60) 코치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대학야구 유망주 만들기’ 전도사로 변신한 이선희 코치 이야기
사실 ‘이선희’ 하면, 프로야구 올드 팬들에게 깊이 아로새겨있는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야구 원년이었던 1982년, 동대문 야구장(옛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개막전에서 삼성의 마지막 투수로 등판하여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 홈런을 맞았기 때문. 삼성으로서는 ‘가장 믿음직한 투수’를 내보냈으나, 이종도의 노림수에는 당할 도리가 없었던 셈이다. 그런데 반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해 OB 베어스와 치른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구원 등판한 이선희는 김유동에게 또 다시 만루 홈런을 맞으며 ‘비운의 스타’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이선희는 비운의 스타가 아니었다. 당시 삼성 마운드의 ‘대들보’ 였던 이선희는 2차전에서 선발로 등판하여 무실점 승리를 거둠으로써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한국시리즈 승리투수’로 기록되어 있다(주 : 1차전은 3-3 무승부로 종료). 그리고 6차전 패전에 앞서 5차전에서도 등판하며 역투를 펼친 바 있다. 특히, 프로 출범 이전이었던 1970년대 중, 후반에는 국가대표팀으로 다수 선발되면서 일찌감치 유명세를 탔는데, 유독 일본과의 대결에서 강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 킬러’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다. 즉, 이선희는 구대성, 봉중근, 김광현 등 유독 일본에 강했던 좌완 투수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프로야구 원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만루 홈런을 맞았으나, 그가 그 해 거둔 성적은 15승 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91에 이르렀다.
많은 투구로 인하여 서른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해야 했지만, 이후 삼성과 빙그레/한화에서 코치 생활을 하며 후학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특히, 2008년에는 스카우트 팀으로 적을 옮기면서 신인 발굴에 특별한 식견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교 후배이기도 한 김상수는 이선희 코치가 지금도 “고교 인재들 중 김상수만 한 내야수는 없다.”라며 자부심을 느끼고 스카우트한 선수이기도 하다. 김상수 외에도 정인욱, 심창민, 구자욱 등이 이선희 코치 재임 시절 삼성 유니폼을 입었던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현재 삼성의 주축 선수로 활약중이거나 그렇게 될 유망주로 성장하고 있다.
그랬던 이 코치는 삼성 스카우트직에서 물러난 이후 김응룡 감독의 부름을 받아 한화 코치로 자리를 옮긴 바 있다. 당시에도 이태양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등 나름대로 스카우트 시절에 보였던 육성 실력을 발휘했지만, 김성근 감독 부임과 함께 그도 퇴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잠시 이선희 코치에 대한 근황이 전달되지 않았으나, 지난 1월을 기점으로 ‘영남대학교 야구부’로 적을 옮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포스트 이성민(KT)’ 만들기의 일환으로 투수조를 지도해 달라는 박태호 감독의 부탁과 함께였다. 삼성 스카우트직에서 물러난 이후 3년 만에 다시 아마야구 현장으로 복귀한 셈이었다.
이선희 코치의 합류와 함께 영남대 투수들도 저마다 ‘제2의 이성민’을 노릴 수 있게 됐다. 다만, 영남대 차정환 타격코치는 “이선희 코치님이 정말 대단하신 분인데, 선수들이 그걸 잘 모른다. 존경심을 갖고 잘 배웠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기대감과 함께 안타까움을 전달하기도 했다.
프로에서의 삶을 잠시 뒤로 하고 대학야구 지도자로 새 출발을 하는 이선희 코치. ‘한일전의 사나이’라는 현역 시절에 걸맞는 활약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어떠한 ‘원석’을 다이아몬드로 바꿀 수 있을지 기대감을 가질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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