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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배명의 에이스, 4번 타자, 그리고 김동주 ①

투-타 팔방 미인 김동주, 거포로 거듭나기까지

2015-02-03 02:22

▲지난1월31일,선수은퇴를선언한김동주.사진│두산베어스
▲지난1월31일,선수은퇴를선언한김동주.사진│두산베어스
[마니아리포트 김현희 기자]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 각 업계의 트렌드는 ‘복고’로 요약할 수 있다. ‘나도 한때 잘 나갈 때가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며, 옛 추억을 떠올리는 이들이 꽤 많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다. 현재 시각으로 보면, 다소 ‘촌스럽다.’라고 느낄 수 있을 옛 추억이 이제는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영화나 소품으로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영화 ‘써니’를 시작으로 최근 1천만 누적 관객 숫자를 돌파한 ‘국제 시장’, 그리고 곧 개봉 예정인 ‘쎄씨봉’ 등은 ‘베이비 붐 세대’와 당시 부모였던 이들의 향수를 자극할 만한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스포츠 분야에도 적용된다. 특히, ‘한때 잘 나갔던 선수’들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으로 그라운드만 한 공간도 없다. 감독/코치들 중에서도 현역 시절 ‘잘 나갔던’ 스타 플레이어들이 있었고, 베테랑 선수들 중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풀타임을 소화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이들이 ‘프로야구의 미래’들과 한데 뒤섞여 그라운드에서 1류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얼마 전 은퇴를 선언했던 김동주(39)도 그러한 선수 중 하나였다.

프로 입문 전부터 매스 미디어에 등장할 만큼 비범함을 자랑했고, 대학 진학과 프로 입문 이후에도 야구 내/외적으로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었던 그는 이번 시즌에도 화재의 중심에 섰던 이였다. 이를 지켜본 여론의 목소리가 엇갈린다는 사실을 뒤로하더라도 적어도 한국 프로야구에서 ‘김동주’라는 인물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은퇴 소식이 전달된 지 며칠이 지난 현 시점에서 그의 발자취를 뒤돌아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배명의 에이스, 4번 타자, 그리고 김동주

지난 1992년, 제22회 봉황대기 전국 고교야구대회가 열린 동대문 야구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특히, 결승전에 오른 배명고등학교는 봉황대기 2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후 정확히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또 다시 우승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학교보다 우승에 목이 말라 있던 상태였다. 이에 전교생들도 동대문 야구장 외야석에 자리를 잡으며 열심히 모교를 응원했다. 이러한 응원에 힘을 얻은 탓일까. 배명고는 장단 20안타를 퍼부은 끝에 손인호가 버티고 있는 경남고에 14-2로 대승하며 봉황대기 패권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펼친 3학년 노상진(전 한화)은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며, 자신의 진가를 드러내 보인 바 있다. 노상진 외에도 투-타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 준 이경필(전 두산), 역시 강타자로 이름이 났던 조현(전 포스틸-LG)도 당시 배명고 3학년 멤버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당시 봉황대기의 주역은 3학년이 아니었다. 故 정귀창 감독의 가장 큰 ‘믿는 구석’은 2학년 김동주였다. 김동주는 그 해 봉황대기에서 투수로 나서며 발군의 실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타자로서도 맹타를 퍼부으며, 최우수 투수상과 타점상, 타격상을 싹쓸이했다. 특히, 공중파 TV로 고교야구를 중계했던 당시에 마운드에 올라 힘차게 공을 던진 이후 잠시 내야수로 자리를 이동하다가 위기 상황에서 다시 마운드에 오른 김동주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또한, 홈런과 안타, 2루타를 차례로 기록한 이후 마지막 타석에서 3루타를 기록하면 ‘사이클링’이 완성될 수 있었을 때, 김동주는 과감하게 초구를 노려 깨끗한 좌전 안타를 기록한 바 있다. 대기록은 놓쳤지만, 4타수 4안타를 기록하며 혼자 ‘북치고 장구 쳤던’ 그는 1990년대 최고의 고교 스타였다.

타격 능력도 빼어났지만, 투수로서도 꽤 좋은 성적을 선보였던 그는 향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에이스로도 거듭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교 시절 김동주는 투수로서 가장 이상적인 체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꽤 빠른 145km의 볼을 던질 줄 알았던 유망주였다. 물론 그의 미래는 ‘투수’와는 거리가 먼 ‘거포형 타자’였다. 고려대 진학과 함께 체격과 함께 파워가 한꺼번에 늘어난 결과이기도 했다. ‘날렵했던 미소년’은 그렇게 거포가 되어 졸업과 함께 프로에 모습을 드러냈다.

신인들이 프로 1군 무대에서 풀타임을 보내기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김동주는 1998년 데뷔와 함께 곧바로 라인업에 포진됐다. 그리고 그 해에 방콕 아시안게임에 참가함과 동시에 정규 시즌에서도 24홈런, 89타점을 기록하며 ‘역시 김동주’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그는 국제 대회가 열릴 때마다 늘 태극 마크를 달 수 있는 후보로 이름을 올리곤 했었다. 실제로 그는 프로 데뷔 이후 은퇴 직전까지 두 차례의 아시안게임(2006년 도하, 2014년 인천)과 두 차례 WBC(2009년, 2013년)에서만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 그 외의 국제 대회에서는 거의 빠짐없이 최종 엔트리에 포함됐던 이였다.

- 2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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