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그는 임펙트 있는 시즌을 보낸 시기가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꾸준함'으로 승부를 펼치며 화려한 '누적 스탯'을 거둔 이로 유명했다. 1953년 데뷔 이후 그가 두 자릿수 홈런 기록을 놓쳤던 시기는 데뷔 연도와 은퇴 년도(1953, 1971년) 뿐이었으며, 서른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 그는 이미 509홈런과 2,567안타를 기록했던 레전드가 되어 있었다. 그의 화려한 누적 스탯에 비해 MVP 수상은 두 차례로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올스타에는 무려 11번이나 선정되면서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선수'로 먼저 인정받기도 했다.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더욱 빛났던 '노장의 미소'
이처럼 뱅크스가 선수로서 팬들에게 먼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좋은 선수'이기에 앞서 '훌륭한 시민'이었기에 가능했다. 일례로 그는 1953년 데뷔 전, 국가의 부름을 받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1년간 낯선 이국땅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현장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을 응원해 준 팬들에 대한 사랑을 그라운드에서의 맹활약으로 보답하기도 했다. 이후 뱅크스와 한국의 인연은 거기에서 끝이 나는 듯싶었다.
그러나 뱅크스의 한국행은 국내 프로야구의 출범과 함께 '꽤 극적으로' 성사됐다. 1982년을 기점으로 한국 프로야구가 출범하자 그는 행크 아론과 함께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더블 A’팀을 대동하고 국내를 찾은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선수로서 은퇴한 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발 라인업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국내 야구팬들에게 적지 않은 볼거리를 제공했다. 잠실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경기를 비롯하여 삼성과도 경기를 치렀던 애틀랜타 초청팀은 아직 ‘프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국내 선수들과 팬들에게 잠깐이나마 ‘미국 야구의 맛’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타계 소식은 그와 직접 맞대결을 펼쳤던 이들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할 법하다. 특히, 박영진 현 상원고 감독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더블 A팀이 삼성과 경기를 펼쳤던 그 순간을 잘 기억하고 있다. 당시 삼성의 선발로 나섰던 이가 바로 박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대구상고-성균관대를 거쳐 ‘부동의 에이스’ 역할을 했던 그에게 중임을 맡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프로 입단 이후 어깨 부상 후유증이 남았던 박영진은 당시 3연속 볼넷을 내어 주고 1회를 채우지 못한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다.
당시를 떠올린 박영진 감독은 “그 일(3연속 볼넷 허용) 때문에 요미우리로 연수를 가게 되었던 계획이 없던 일로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김재하 당시 과장(전임 삼성 단장)께서 매우 안타까워하신 일이 있었다.”라며 지나간 추억에 너털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후 4번 타자로 등장한 이가 바로 어니 뱅크스였다. 뱅크스는 50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루 홈런을 쏘아 올리며, 야구 팬들은 물론 선수들까지 ‘깜짝’ 놀라게 한 바 있다.
선수로서는 큰 족적을 남겼지만, 정작 소속팀인 시카고 컵스는 포스트시즌과 전혀 인연이 없었다.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들 중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와 가장 인연이 없는 몇 안 되는 스타 플레이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명예의 전당 입회뿐만이 아니라, 1999년에는 전 세계 팬 투표를 통해 선정한 20세기 올스타팀 멤버로 뽑히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뛰어난 유머 감각을 발휘하면서 야구 외적으로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이중 하나였다. 그런 그의 타계 소식은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이 담긴 국내 올드 팬들과 일부 노장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올 듯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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