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시엔 진출이 남다른 의미가 있는 이유는 모든 참가교가 ‘치열한 지역 예선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일본에 있는 고교야구부 숫자만 4천 개를 훌쩍 넘지만, 고시엔에 초대받는 학교는 50여 개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 경쟁률로만 놓고 보아도 약 100:1에 해당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무대에 발을 들여 놓았던 ‘한국인 유학생’이 있었다. 2008년 당시, 무명이었던 이이즈카 고등학교를 고시엔에 진출시킨 김동민(23)이 그 주인공이다.
고시엔의 추억을 간직하고 '제2의 인생'을 사는 김동민의 야구 이야기
양정초 - 사직중 졸업 이후 부산고교로 진학한 김동민은 1학년을 마침과 동시에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야구를 보는 눈을 조금 더 키우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가 진학했던 학교는 전국무대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오히려 그가 입학하기 전까지 친선경기에서조차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동료도 대부분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야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분위기의 이이즈카 고교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김동민이라는 한국 소년에 의해서였다. 스스로 야간 훈련을 한 것이 시초였다. 당시 이이즈카 학원 야구부에서 야간 훈련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때였다. 그렇게 그가 먼저 운동을 시작하자, 나머지 동료도 하나 둘씩 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이즈카 학원 야구부에 ‘야간훈련’이 정례화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는 곧 결과로 나타났다. 메이토쿠 고교, 야나가와 고교 등 야구부가 있는 학교만 총 120여 개에 달하는 후쿠오카 지역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하며 고시엔에 진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만 0.485의 고감도 타격감을 자랑했던 그는 비록 팀이 본선 무대 1회전 탈락의 고배를 마셨어도 본인은 후쿠오카 경제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주전에 나서며, 3할 타율과 홈런을 동시에 기록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해에 신인상과 특별상을 받았다. 만루홈런 치고 나니까 특별상을 주더라(웃음). 그대로 갈 경우 전 일본 드래프트에서 지명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 생각했다." 김동민의 회상이다. 실제로 같은 학교를 나온 한국인 유학생 김무영(투수)은 소프트뱅크에 입단하며 김동민에게 기대감을 가지게 할 만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2학년 때 귀국을 선택했다. 타율도 꾸준히 3할을 유지하며 좋은 타격감을 자랑했지만, 그는 "군 문제 때문에 일본 드래프까지 2~4년 정도 걸릴 것이라 봤다. 하지만 그것도 지명됐을 때의 일이었다. 또한, 꾸준히 타격감은 유지하고 잇었지만, 대학 야구에서는 실력이 느는 데 한계가 있었다." 라며 귀국의 이유를 설명했다. 즉, 군 복무 해결 후 입단 테스트에 임한다면 프로에 입문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러기에는 김동민이 국내를 떠나 있던 시간이 너무 길었다.
"솔직히 입단 테스트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알려 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인맥도 부족했다. 그래서 군대에 입대하려고 준비했는데, 그 때 일본 독립구단 코리아 해치 입단 공고를 봤다. 입대를 1년 연기해야 할지, 아니면 그대로 군 입대를 해야 할 지 고민했는데, 결국 1년 더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김동민은 다시 야구에 대한 열정을 품에 안고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독립야구단은 그렇게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고양 원더스를 생각하면 안 된다. 말 그대로 '고교야구 수준'인데, 그러한 수준에서도 야구가 잘 안 되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딱 1년만 채운 채 바로 군 복무에 임했다. 선수 시절 내내 특별히 아픈 곳도 없었기에 현역 복무 판정을 받아 2년간 27사단 신병 교육대 조교로 군 복무를 했다." 그렇게 김동민은 2011년 11월을 기점으로 전역을 신고하며 다시 사회로 나왔다.
"전역 이후 조선소에서 일하기도 하고, 일용직 아르바이트에 임하기도 했다. 그렇게 일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지금의 직장을 구하게 됐고, 지금은 보통 일에 종사하면서 한 동안 야구를 잊고 살았다. 남들은 운동을 그만 두면 살이 찐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살이 빠졌다(웃음). 웨이트 트레이닝을 안 하다 보니, 근육이 몸에서 빠져서 그런 것 같다." 그렇게 '옛 고시엔의 영웅'은 야구에 대한 추억을 뒤로 한 채 지금은 보통 사회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김동민은 신고 선수 입단조차 하지 못한 대졸 선수들에게 조언을 잊지 않았다.
"사실 야구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나면, 직업 선택에 제한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인맥을 넓히려는 활동을 많이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결국 기회는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야구로 인하여 인생의 시작과 끝이 결정됐고, 그로 인해서 파생되는 것도 많았습니다. 보십시오. 저만 해도 이렇게 건강하게 일 잘 하고 살지 않습니까(웃음)."
비록 현역으로 야구선수 생활은 하지 않지만, 김동민은 생 야구 선수가 졸업한 이후 이렇게 '보통 일'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사실 이러한 사례가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가장 보편화된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아직 나이가 어린 만큼 본인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예전 '발 빠른 1번 타자 내야수'로 다시 운동을 준비할 수도 있는 일이다. 야구 유무를 떠나 사회로 나온 만큼, 앞으로 그의 인생에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한다.
[eugenephi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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