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후반, 뉴욕 양키스의 ‘살인 타선(murderer's row)’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베이브 루스와 쌍포를 이루었던 ‘철마’ 루 게릭을 기억할 것이다. 실력과 인성을 두루 갖추며, 야구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그는 선수 말년에 ‘근 위축성 측색 경화증(일명 루 게릭 병)’이라는 불치병에 걸리며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했던 이였다. 하지만, 그는 고별 연설문에서 서두와 같이 ‘세계 최고의 행운아’라고 이야기하며 마지막까지 메이저리거다운 품위를 잃지 않았다. 이에 그는 전미 야구팬들이 뽑은 가장 위대한 야구선수 부문에서 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렇듯 메이저리그에서는 소속 구단 여부를 떠나 수년간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며 제 몫을 다 한 선수들에게 ‘마지막 가는 길’을 화려하게 수놓아 주었고, 팬들은 그러한 ‘영웅’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를 표했다. 올해를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양키스의 데릭 지터가 방문하는 구단마다 팬들이 기립박수를 아끼지 않는 장면은 국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박찬호 은퇴식, ‘레전드를 예우하는 문화 시발점’되어야
그런데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2014 올스타전에서 연출됐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박찬호였다. 1994년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동양인 최다승 기록(124승)을 보유하고 있는 그는 일본을 거쳐 연고지 한화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까지 제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던 ‘전국구 스타’였다. 비록 연고 구단 한화를 통한 은퇴식은 뒤로할 수밖에 없었지만, 선수단 내부에서 ‘올스타전 은퇴식’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그는 명예롭게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있었다. 사상 유래 없는 행사에 KBO도 잠시 난색을 표하는 듯싶었지만, 선수들과 팬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이번에는 ‘과감하게’ 올스타전 은퇴식이라는 전례를 만들었다.
사실 박찬호라면 소속 구단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에게 환영을 받아야 마땅한 인물이기도 했다. 한때 IMF 사태로 전 국민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메이저리그에서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며 승승장구했던 박찬호의 모습을 보고 힘을 낸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골프의 박세리와 더불어 미국 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본 두 이의 활약 덕분이었는지, 한반도에서는 사상 유래 없는 ‘금 모으기’ 운동까지 일어났고, 이를 바탕으로 ‘초고속으로 IMF를 졸업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당시를 경험했던 야구팬들은 이후 박찬호의 선전 유무와 관계없이 꾸준히 그의 모습을 응원하기도 했다.
물론 박찬호 본인은 이러한 평가에 손사래를 칠 수 있다. ‘그저 마운드에서 묵묵히 공을 던졌을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모습 자체에 국민들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을 가졌던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 구단이 한 자리에 모이는 올스타전에서 은퇴식을 시행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고도 합리적인 일이었다. 이제는 국내에서도 ‘레전드에 대한 예우’를 기존과 달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100여 년 전, 양키스의 루 게릭을 시작으로 최근의 데릭 지터까지 메이저리그에서는 ‘레전드에 대한 예우’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왔고, 국내 야구팬들은 그렇게 구단과 팬들이 만들어 가는 문화에 적지 않은 부러움을 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박찬호 은퇴식을 기점으로 ‘프로야구에 모범 되는 역할을 했던’ 노장들을 어떻게 예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알았을 것이라 본다. 이번 은퇴식을 기점으로 ‘조금 더 많이’, 이러한 문화가 형성되기를 기원해 본다.
<저작권자 © 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