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한국인 선수들을 위한 특별 행사를 연다는 것은 다저스 특유의 ‘다국적 문화’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이미 다저스는 브루클린 시절부터 타 구단이 시도하지 않은 여러 가지 모험을 시작하여 성공에 이른 바 있었다. 라디오 방송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흑인 선수들을 메이저리그에 데뷔시킨 것도 다름 아닌 다저스였다. 또한, 동양인 선수들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박찬호를 비롯한 히데오 노모를 데뷔시키면서 성적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도 했다. 두 이의 활약은 곧 동양에 대한 메이저리그 전 구단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동/서부를 넘나 든 박찬호, 만약에 ‘다저스맨’으로 남았다면?
박찬호의 다저스타디움 등장이 반가운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데뷔 시기와 최악으로 빠졌던 국내 경기 시기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내 경기 사정은 IMF로부터 금융 구제를 받을 만큼 최악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 등을 통하여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했고, ‘없는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정/재계가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박찬호는 1998시즌, 풀타임 데뷔 3년 만에 15승에 성공하며 ‘에이스로서의 위상’을 다지기 시작했다. 해외에서 맹활약하는 그의 소식에 국민들은 힘을 내기 시작했고, 이는 한국이 초고속으로 IMF 시대를 졸업하는 바탕이 되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활약은 그가 다시 태극 마크를 달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한양대 시절, 태극 마크를 달았던 이후 다시 대표팀으로 뽑힌 그는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조국에 금메달을 안기는 데 공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를 바탕으로 1999시즌을 맞이했던 그는 다소 부침을 겪기는 했지만, 3년 연속 10승을 거두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개인 최다인 18승을 거두며 한때 ‘사이영상 후보’에 까지 올랐고, FA를 앞둔 2001년에는 허리 부상으로 잠시 주춤했지만, 15승을 거두면서 개인 통산 80승 기록했다. 이 당시 제프 쇼와 함께 올스타전에 출전했던 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박찬호가 계속 다저스에 남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었다. 풀타임 7년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는 것, 로스앤젤레스에 교민들이 많아 ‘내 집’과 같은 익숙함이 있다는 사실은 그의 FA 계약을 망설이게 하는 요소가 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당시 가장 많은 금액을 제시했던 텍사스였다. 5년간 6,500만 달러 보장, 옵션 달성시 최대 7,100만 달러까지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은 당시 얼어붙었던 FA 시장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다저스 역시 박찬호를 잡기 위해 텍사스가 제시했던 규모와 비슷한 수준의 계약을 추진한 바 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에 박찬호가 계약 규모가 아닌, ‘야구를 잘 할 수 있는 환경’까지 감안했다면 ‘한국인의 메이저리그 도전 사(史)’는 달리 쓰일 수 있었다.
텍사스를 시작으로 샌디에이고와 뉴욕 메츠를 거쳐 2008시즌에야 다시 고향팀 다저스로 돌아온 박찬호는 다시 힘을 냈다. 그 해에 선발과 중간 계투를 넘나들며 4승 4패, 평균자책점 3.40을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다저스에 있었을 때였던 셈이었다. 이후 다시 필라델피아-뉴욕 양키스-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전전했던 박찬호는 일본 프로야구 진출 전까지 다저스에 있었을 때만큼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는 1994년 데뷔 이후 무려 9년간 다저스 유니폼을 입었는데, 그 시즌 동안 84승 58패, 평균자책점 3.77을 기록했다.
물론 박찬호가 다저스에 계속 남았다 해도 지금과 같은 성적을 올렸을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124번째 승리를 기록한 순간이 메이저리그에서의 은퇴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동양인 최다승’으로 남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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