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지만 '삼미의 후예'들은 이후 프로야구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다. 당시 삼미의 원년 멤버로 활약했던 김무관(LG 2군 감독), 김호인(KBO 경기 감독관), 허운(KBO 심판위원), 양승관(NC 수석 코치), 금광옥(동산고 감독) 등은 현장에서 직/간접적으로 후배들을 양성하거나 관리/감독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으며, '스카우트'의 달인으로 불리며 신인왕을 무려 5명(박재홍, 김수경, 조용준, 이동학, 오재영) 배출한 김진철 전 LG 운영팀장 역시 그러했다. 팀은 약했지만, 그 안에서 배움을 얻은 이들은 현재 한국 프로야구의 소중한 자산들이기도 하다.
1990년대 도깨비 팀, 쌍방울 레이더스의 추억
어쨌든 삼미는 1980년대 최고의 '도깨비 팀'임에 틀림 없었다. 하지만 이후 프로야구에서 삼미와 같은 '1할 승률'팀은 나오지 않았다. 잠잠했던 야구판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했던 것은 1990년 3월에 빙그레 이글스에 이어 제8구단이 등장하면서 부터였다. '쌍방울 레이더스'가 그 주인공이었다.
1990년 창단 선언 이후 그 해에 바로 2군 리그에 참가했던 쌍방울은 이듬해부터 제8구단 자격으로 1군에 진입했다. 신생팀에게 주어진 '우수 신인선수 다수 지명' 역시 쌍방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1군 진입 첫 해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 126경기에서 52승을 거두며 4할 승률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남은 것은 이들을 바탕으로 기존의 '7개 구단 형님'들을 압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부터 주춤거린 쌍방울은 좀처럼 기지개를 펴지 못했다. 1992 시즌을 시작으로 4년 연속 3할 승률에 그쳤기 때문.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려 네 명의 사령탑(김인식, 신용균, 한동화, 김우열)이 사임해야 했다. 그만큼 전북을 기점으로 했던 야구 저변은 상당히 취약했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복병 전주고 정도가 쌍방울에 힘을 보탤 수 있는 '팜(Farm)'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1996년부터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김 감독은 타 구단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베테랑 선수들을 영입하여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작전을 썼고, 이는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여기에 프랜차이즈 스타로 커줄 수 있는 김기태, 김원형, 조규제 등이 꾸준한 활약을 펼치면서 쌍방울은 1996년과 1997년, 2년 연속 가을무대에 초대받을 수 있었다. 1980년대 삼미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 시기에 등장한 쌍방울 역시 '도깨비 팀'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가 쌍방울의 운명이었다.
이후 쌍방울은 1997년 준 플레이오프를 끝으로 두 번 다시 가을잔치에 오르지 못했다. 특히, IMF 경제위기로 인하여 모기업 쌍방울이 야구단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 치명타였다. 이에 김성근 감독 스스로 자비를 들이는 일까지 발생했고, 이는 '선수 파격세일'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쌍방울은 1999년을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선수단이나 신인 지명권은 새로 탄생된 SK 와이번스가 그대로 인수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비록 팀은 사라졌지만, '쌍방울 세대'들 역시 삼미 원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각지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다. 김기태 2군 감독, 김원형 SK 코치, 조규제/최태원 LG 코치 등이 당시 쌍방울 멤버로서 어려웠을 때 팀을 이끈 이들이었으며, 현역 선수 가운데서는 LG 이진영이 신인시절 당시 쌍방울 유니폼을 입었던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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