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22(토)

야구

[응답하라 1990]40홈런 시대를 연 주인공, 장종훈의 추억

현역 시절 통산 340홈런 기록하며 3차례 홈런왕 타이틀 획득

2014-02-25 00:11

▲선수들을지도하는한화장종훈코치.사진│한화이글스
▲선수들을지도하는한화장종훈코치.사진│한화이글스
[마니아리포트 김현희 기자]홈런은 점수를 확실하게 뽑을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홈런을 기록하기란 상당히 어렵지만, 리드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오는 역전 홈런은 팀 분위기를 뒤집음과 동시에 경기 주도권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또한 홈런 개수에 따라서 프로야구의 흥행 여부가 판가름나기도 한다. 한때 ‘선수노조 파업’등으로 침체기를 겪었던 메이저리그가 다시 흥행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맥과이어와 소사의 홈런 잔치가 있었다. 물론 이는 ‘약물 파동’과 맞물려 또 다른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둘의 홈런 경쟁은 ‘스테로이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선수들의 분발을 촉구하기도 했다.

국내 프로야구는 메이저리그와 사뭇 다르다. 장타력보다는 희생을 강조하는 팀 플레이가 우선시되고, 홈런보다는 기동력에 의지한 야구를 많이 한다. 이렇듯 ‘스피드 야구’, ‘팀플레이를 강조하는 야구’는 분명 한국 프로야구의 성격을 대변할 수 있다. 따라서 굳이 메이저리그와 직접 비교를 할 필요가 없는 셈이다. 하지만, 호쾌한 장타를 그리워하는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국야구위원회를 필두로 각 구단은 외국인 타자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외국인 타자의 등장이 반드시 장타의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는 국내 선수들의 노력이 수반될 것이라는 기대는 해 봄직하다.

‘40홈런 시대의 원조 홈런왕’ 장종훈의 추억

그러나 사실 국내에서 ‘홈런에 대한 강렬한 추억’을 먼저 알려 준 이는 외국인 거포가 아니었다. 간혹 우즈나 호세처럼 30홈런에 100타점을 가볍게 기록해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국내 프로야구에서 40홈런 시대를 연 이는 전혀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입단 초기부터 주목을 받았던 것도 아니었다. 연습생(현재의 신고선수) 신분으로 어렵게 프로에 입단하여 오직 자신의 힘으로만 1군 무대에 진입했던 이였다. 장종훈(46) 코치의 연습생 신화는 그렇게 탄생했다.

세광고 졸업 이후 1986년에 연봉 300만 원이는 헐값에 프로 입단을 선택했던 그는 천상 야구인이었다. 말 그대로 1군 무대에 진입할 때까지 연습을 반복했다. 반복된 연습은 곧바로 1987 시즌 94경기 출장으로 이어졌다. 그 해에 8홈런을 기록하며 방망이 예열을 마친 그는 이듬해부터 꾸준히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유격수로는 다소 만족스러울 만한 수비 실력을 보여 주지 못했지만, 1990 시즌 당시 28홈런으로 첫 홈런왕에 등극하는 것으로 이를 갈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1 시즌에는 생애 첫 30홈런을 돌파함과 동시에 2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고, 그 다음 해에도 41홈런을 기록하며 ‘한국프로야구 40홈런 시대’를 열기도 했다. 3년 연속 홈런왕에 오른 그는 1991년 열린 한일 슈퍼게임 5차전에서 일본 나가라가와 구장 개장 이래 첫 장외 홈런(비거리 160m)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잠시 주춤했지만, 그는 1988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5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했다. 2005 시즌에는 개인 통산 340번째 홈런을 쏘아 올리며 화려하게 현역 시절을 마감했다. 그리고 이는 양준혁에 의해 깨어질 때까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다 홈런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의 기록이 더욱 대단한 것은 오직 한 팀에서만 현역 생활을 유지하면서 꾸준함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인지명 회의를 거치지 않고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하여 ‘신고선수 신화’를 썼다는 점도 가볍게 볼 수 없다. 그 출발은 미약했으나, 끝은 장대했던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야구만 잘 하는 선수’도 아니었다. 일례로 1999년, 쌍방울전에서 투수 김원형을 상대한 장종훈은 2구째를 정확히 받아쳤다. 완벽한 안타성 타구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타구가 김원형의 얼굴을 강타한 것이다. 규칙상 그대로 ‘인 플레이’가 인정되어 장종훈은 1루에서 세이프 판정을 받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주저 없이 마운드로 향했다. 김원형의 부상 여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아웃을 당했고, 이 아웃 카운트로 인하여 타율 1위를 놓칠 수밖에 없었다. 장종훈의 인간적인 면모를 볼 수 잇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에 김원형은 이후 장종훈이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항상 모자를 벗어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그는 1986년 입단 이후 단 한 번도 빙그레-한화 유니폼을 벗지 않은 진정한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은퇴 이후에는 해외 연수로 자리를 비웠던 2012년을 제외하면 줄곧 한화 이글스의 타격 코치로 활약했고, 지금도 김응룡 감독을 도와 한화 유니폼을 입고 있다. 현역 시절 통산 성적은 6,292타수 1,771안타(타율 0.281), 340홈런, 1,145타점에 이르렀다.

[eugenephil@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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