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이가 있었다. 덕수고 사령탑, 정윤진 감독(42)이 그 주인공이다. 매년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야구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지켜내고 있고, 프로 선수들도 적지 않게 배출하지만 정 감독은 늘 ‘배고파 하는 사람’이다. 성적에 대한 욕심도 욕심이지만, 그보다는 선수들에게 ‘팀 워크’와 ‘프로다움’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큰 점수 차이로 이긴 경기’에서 선수들을 혼내기도 하고, 긴박한 상황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을 때 오히려 선수들을 칭찬할 때가 있다.
덕수의 강타자, 젊은 리더의 선두 주자, 감독 정윤진
이에 대해 정 감독은 “경기 결과보다 선수들의 경기 내용을 살펴봐야 한다.”라며, 눈앞에 보이는 숫자에 크게 개의치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사실 맞는 이야기다. 오히려 고교 시절부터 이러한 습관을 몸에 익혀 놓은 선수들이 프로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 감독은 큰 점수 차이로 이겼다고 해서 느슨하게 경기를 풀어가는 모습을 매우 싫어한다. 행여 그러한 기색을 보이는 이가 있으면, 제아무리 주전 선수라 해도 가차없이 교체한다. 그래야 ‘눈앞의 플레이 하나’가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덕수고-서울산업대-한양대학원을 졸업한 정 감독은 고교 시절부터 ‘촉망받는 내야수’중 하나였다. 당시 그와 같이 야구를 했던 김재걸(현 삼성 코치)은 그의 1년 후배이기도 하다. 졸업 이후 상무에도 합격하여 군 복무를 마칠 만큼 성실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하늘은 그에게 ‘야구에 대한 열정’은 부여해도 ‘천부적인 재능’까지 부여하지 않았다. 1992년 전역 이후 프로의 문을 두드렸지만, 젊은 정윤진을 불러주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방황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모교 덕수고에서 그를 지도자로 불렀기 때문이었다. 1994년, 당시 스물셋에 불과했던 정윤진은 그렇게 지도자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정 감독은 13년 동안 코치로 재직하면서 학교 측의 배려로 인근 한양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사와 석사 학위(교육학)를 받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학생야구 선수 출신이 학위를 획득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음에도 불구, 그는 끝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지난해 이정호가 학생야구 선수로는 드물게 서울대 진학의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 정 감독이 누구보다도 ‘공부하는 학생야구 선수 육성’이라는 대전제에 동의를 했기 때문이었다.
1994년 모교 코치를 시작으로 2007년 감독직에 오를 때까지 정 감독은 총 19년 동안 무려 11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이 중 다섯 번은 2007년 정 감독이 사령탑에 오른 이후 거둔 성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해에는 ‘절대적인 전력 우위’를 앞세워 전/후반기 왕중왕전을 모두 휩쓰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에 대한야구협회도 오는 30일부터 타이완에서 열리는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 대표팀 감독으로 정윤진 감독을 선임하며,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기도 했다.
정 감독의 국가대표팀 사령탑 경험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는 ‘대표팀 코치’로서 이미 여러 차례 태극마크를 달아 본 경험이 있는 이다.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열린 2008년 세계 청소년 대회 우승 당시에도 그렇고, 이듬해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 우승시에도 정 감독은 늘 ‘대표팀 코치’로서 선수들과 한솥밥을 먹었다. 이에 그는 2008년 세계 대회 우승 당시를 떠올리며, 유격수 자원을 셋이나 뽑으면서 수비 강화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 때문인지, 지난 25일 열린 LG 2군과의 연습 경기에서 대표팀 내야수들은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에러 없이’ 말끔하게 경기를 끝내는 모습을 보였다.
모교와 함께 반평생을 함께하며 ‘야구와 결혼했던’ 정윤진 감독. 그 열정을 이번 세계 청소년 대회에서 다시 보여줄 수 있을지 주목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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