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손자병법] 17 김태원과 상옥추제(上屋抽梯)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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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4-10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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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손자병법] 17 김태원과 상옥추제(上屋抽梯)

-지붕위에 올려 놓고 사다리를 치우다.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 놓이면 살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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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금이 저려왔다. 벌써 2점을 내줬는데 여전히 베이스마다 주자가 가득 차 있었다. 또 5회를 못넘기고 물러나야 하는가. 김태원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못 견딜 것 같은 이 상황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90년 4월 10일 잠실구장. LG선발 김태원은 태평양전 4회까지 2안타 무실점 호투를 했다. 하지만 5회 들어 갑자기 무너졌다. 선두타자를 내 보내더니 안타에 또 안타였다. 잘 들어가던 공도 거짓말처럼 갈팡질팡, 스트라이크 하나 제대로 잡지 못했다.

얼굴이 노랗게 변한 김태원은 연신 덕아웃을 쳐다봤다. 구원을 요청하는 애타는 몸짓이었다. 그러나 백인천 감독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경기가 넘어가고 있는데도 뭐가 즐거운지 코치들과 잡담만 나누고 있었다.

공 한번 던지고 덕아웃 한번 바라보길 수차례. 김태원은 그만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고 말았다. ‘감독이 저러는데 나 혼자 발 동동 구르면 뭐 하나.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백인천 감독은 그런 김태원을 바라보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못 본 척 했지만 김태원의 ‘5회 무섬증’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김태원, 그는 ‘스토브 리그 스타’였다. 1986년 프로에 뛰어든 그는 혼련 땐 무서운 공을 던졌다. 시속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 곧 큰 일을 저지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즌이 되면 그 빠른 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잘 던지다가도 주자만 나가면 엉망이 되었다.

5회를 못 넘기고 매번 주저앉는 김태원. 약 주고 병 주는 김태원 때문에 전임 김동엽 감독과 배성서 감독은 애간장을 태웠다. 김동엽 감독은 김태원을 늘 20승 투수라고 추켜 세웠으나 2승도 못했다.

백인천 감독도 부임하면서 김태원에게 홀딱 반했다. 그야말로 흙속의 진주인데 왜 그럴까. 그를 유심히 관찰한 백 감독은 그 이유가 공이 아니라 마음임을 간파했다. 주자만 나가면 새 가슴이 되고 승리 요건을 갖추는 5회가 오면 또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으로 공을 제대로 뿌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백 감독은 시련 앞에 그를 놓아두기로 했다. 김태원이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면 LG의 우승도 바라볼 수 없었다. 김태원을 투사로 만들기 위해 백 감독은 벌벌 떠는 그를 보면서도 못 본척 한 것이었다.

한 차례 거센 태풍을 온몸으로 맞은 김태원은 그날 이후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운드의 고통은 오롯이 자신이 다 이겨내야 할 과제임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빠른 공을 가지고서도 4년간 4승밖에 올리지 못했으나 전사로 다시 태어난 후 무려 18승을 올렸다. 그리고 김태원의 환골탈태 덕분에 페넌트레이스 1위를 한 LG는 여세를 몰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먹었다.

그날의 ‘피눈물 나는 마운드’가 애벌레로 야구 인생을 마감할 뻔했던 김태원을 멋진 성충으로 만든 것이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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