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13)조선체육회 창립에 이르기까지(중)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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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4-07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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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7월 28일 경성중 운동장에서 배재학당과 경기를 벌인 도쿄유학생 야구단이 공격을 펼치고 있다.
조선체육회 출범의 산파역 …도쿄유학생 모국방문 경기
1909년 7월 21일 도쿄유학생 야구단이 처음으로 모국을 방문했다. 대한흥학회 운동부 소속인 이들 도쿄유학생 야구단은 훈련원에서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첫 경기를 가져 19-9로 승리한 뒤 7월 24일부터 한성을 출발해 개성, 평양, 선천, 안악, 철산 등 서북지방을 순회하며 시범경기를 가졌다.

이들 도쿄유학생들은 야구단이 1909년~1937년까지 10차례, 축구단이 1920년~1941년까지 12차례, 정구단이 1912년~1941년까지 10차례, 권투 5차례, 럭비와 육상이 각 2차례 이외에도 농구 레슬링 빙상 자전거 무도단 등이 각각 한 차례씩 모국을 방문했다. 여름방학을 활용해 모국을 찾은 이들은 운동용구, 규칙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고 경기 기술과 새로운 운동경기 도입의 첨병 역할을 함으로써 아직 걸음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나라 체육에 큰 족적을 남겼다.

도쿄유학생들이 무엇보다 큰 관심을 가졌던 것은 올림픽이라는 새로운 문화에 대한 동경이었다. 그들은 올림픽 무대야말로 세계인의 이목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민족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가장 크고 매력 있는 장소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무엇보다 이때 올림픽에는 인종이나 종교의 차별이 없이 능력만 있으면 국가가 아닌 지역이나 도시대표로도 참가가 가능하게 되어 있어 우리 민족 문제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유학생 사회의 인식은 자연히 국내 민족 지도자들에게 파급되었지만 곧 절벽에 부딪쳤다. 바로 체육의 통일된 지휘체계가 없다는 점 때문이었다.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체육의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깊이 싹이 터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렇게 조선체육회 창설 필요성이 체육인들 사이에 대두하기 시작했다.

도쿄유학생들의 모국 방문 멤버 가운데 안재홍, 김연수, 김도연, 신홍우, 전의용, 유억겸, 윤치영, 정문기, 서민호, 서상국 등 뒷날 정·재계·학계에서 이름을 떨친 쟁쟁한 인물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 대한흥학회 운동부장으로 제1회 모국방문 야구단 단장인 윤기현을 비롯해 이중국, 변봉현은 뒤에 조선체육회의 산파역이 됐고 유억겸은 제8대(1927년 7월 18일~1928년 8월 17일)와 제10대(1937년 7월 3일~1938년 7월 3일) 조선체육회 회장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야구인 중심의 조선체육인 결속
3·1 운동으로 큰 충격을 받은 일제가 한일병합 이후 일관되게 추진하던 무단정치를 버리고 소위 문화정치로 전환한 것은 우리 민족을 순화시키고 회유하려는 의도가 깊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일제가 통치 변화를 꾀한 참 의도가 무엇이든지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 체육계는 플러스 요인이 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1920년을 전후에 서울(경성)에는 체육인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 있었다. 그 한곳이 구리개(지금의 을지로 3가)와 광화문 네거리에 있는 광신양화점이었다. 야트막한 언덕이 진흙으로 되어 매우 짙은 누런색을 띄어 구리개라 부른 이곳에는 보성고보-메이지대학에서 수학하다 귀국한 유문상이 선친이 남긴 경성직물회사를 인수해서 경영하고 있었다. 여기에 도쿄 성학원 신학교 출신인 이동식, 메이지대학 법과 출신으로 열렬한 야구팬인 이상기가 직원으로 근무해 자연히 도쿄 유학생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들 도쿄유학생 가운데는 와세다 출신으로 대한흥학회 운동부장으로 제1회 도쿄유학생 야구단장인 윤기현, 도쿄 중앙대의 김병태와 축구선수인 원달호, 고베 고상을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다니고 있는 임긍순, 와세다 영문과 출신 변봉현이 주로 찾아왔다.

또 다른 곳인 광신양화점은 야구인 이원용이 운영했다. 이원용은 보성고보 1학년 때 오성학교로 옮겨 야구를 시작했는데 중앙기독교청년회 영어반을 거쳐 오성구락부, 중앙기청에서 야구 선수로 활약했고 1917년에는 고려야구구락부를 창설한 주역으로 초창기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이 덕분에 광신양화점에는 보성고보 출신 야구인들인 홍한수, 중앙기청 출신 현홍운, 홍한수, 홍준기, 방한룡 등이 출입했다.


도쿄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2·8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이중국이 서울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즈음인 1919년 4월이었다. 이중국은 보성고보 1학년 때 일본으로 가 성학원중학을 거쳐 도쿄제대를 졸업했는데 도쿄제대 경제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7년 7월 제4차 도쿄유학생 모국방문경기 때 매니저로 참가했었다. 그는 스스로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육상과 야구에 매료되어 행정과 운동 지도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중국과 이원용은 보성고보 동문이었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가 도쿄유학생 모국방문 경기 때 처음 만나 의기가 투합했다. 특히 이중국의 집이 종로 1가에 있어 같은 광화문에 있는 이원용과는 자주 만날 수 있어 가슴 속 깊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은 이원용과 이중국이 이렇게 자주 만나는 동안 “일본인들의 조선체육협회와는 별도로 우리도 체육운동을 총괄할 수 있는 지도기관을 만들어야 한다”는데 자연스럽게 의견을 함께했다.

더 나아가 그 지도기관의 이름을 ‘조선체육회’라고 부르자고 의견일치도 보았다. 유문상의 경성직물회사, 그리고 이원용의 광신양화점에 드나들던 두 그룹의 야구인들이 이원용과 이중국의 뜻에 찬동해 조선체육회 창립 운동에 힘을 모은 것은 시대적 소명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편집인/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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