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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박사 기자의 스포츠용어 산책 457] ‘동양의 마녀(魔女)'와 한국여자배구

2021-08-06 06:46

지난 달 31일 일본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한국과 일본의 경기. 한국 김연경(10)이 일본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한 뒤 환호하고 있다.[도쿄=연합뉴스]
지난 달 31일 일본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한국과 일본의 경기. 한국 김연경(10)이 일본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한 뒤 환호하고 있다.[도쿄=연합뉴스]
일부 일본 언론에선 지난 달 31일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예선 한·일전에서 한국이 풀세트 접전 끝에 극적인 승리를 거두었을 때 ‘동양의 마녀(魔女)’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은 원래 일본여자대표팀을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남녀배구가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일본 여자배구가 우승을 차지했을 때 생긴 말이었다. 이 말은 서양인들에 비해 월등히 작은 체구의 일본 여자배구 선수들이 전광석화 같은 빠른 시간차 공격과 기계같은 조직력을 앞세워 마치 마술을 부리는 마녀와 같은 모습으로 당대 최강의 소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을 때 붙여졌다. 이때부터 1970년대까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상위권을 유지했던 일본여자배구에게는 늘상 이 말이 따라 다녔다.

하지만 이번 도쿄올림픽에서 한국보다 한 수위라고 자부했던 일본여자배구가 허망하게 패배를 하면서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일본 언론들은 자성론을 불어넣기 위해 썼던 것으로 보인다. ‘동양의 마녀’라는 말은 처음 일본 언론에서 등장할 때 썩 좋은 이미지를 주지는 않았다고 한다. 마녀라고 하면 동화에서 나오는 ‘나쁜 할머니’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었다. 20대의 젊은 여자배구 선수들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본여자대표 선수들과 일본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이 말이 널리 퍼졌다.

‘동양의 마녀’라는 말은 일본여자배구의 전설적인 명장 다이마쓰 히로부미(大松博文·1921~1978) 전 일본여자대표팀 감독과도 인연이 깊다. 그가 1964년 도쿄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의 대표팀 감독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이마쓰 감독은 ‘근성(根性)과 스타르타식’으로 선수들을 호되게 훈련시킨 지도자로 유명했다. 태평양 전쟁 북인도 임팔 전투(1944년 3~7월)에서 일본군 5만명이 굻어 죽은 가운데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선수들에게 ‘악마(惡魔)’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켰다. 죽음 힘을 다해 훈련해야 한다는 신조를 가진 그는 ‘나를 따르라’, ‘하면 된다’며 선수들을 닦달시켜 세계 최강의 팀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당시 일본여자대표팀은 그가 감독으로 있던 대일본방적(日紡·니치보) 실업배구팀 멤버로 구성돼 있었다. 선수들은 대부분 낮에 공장 일을 한 뒤 오후에 집결해 다이마쓰의 맹훈련을 소화해야 했다. 이런 훈련으로 무장한 일본여자대표팀은 1961년부터 유럽 원정 22연승을 달리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마침내 금메달을 차지했다. 당시 도쿄올림픽 TV 시청률은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은 66.8%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보였다.

1972년 뮌헨올림픽 3·4위전에서 북한에 3-0으로 완패한 한국여자배구는 대표팀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이마쓰 감독을 특별 초청, 대표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그는 일본여자팀을 지도할 때와 같이 한국여자대표팀을 혹독하게 몰아붙여 당시 유망한 공격수였던 박인실이 태릉선수촌에서 이에 반발, 퇴촌하는 일도 생겼다. 이런 훈련 덕분인지 한국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뤘다.

한동안 다이마쓰 감독의 스파르타 훈련방식은 한국 배구는 물론 한국 스포츠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맹훈련으로 메달을 따야한다는 메달지상주의와 승리지상주의의 문화를 만연시켰다. 이런 훈련 환경으로 한국이 세계스포츠 강국으로 올라섰지만 심석희, 고 최숙현 사태가 터졌으며 배구에서 이재영-다영 쌍둥이 학교폭력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번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한·일전에서 ‘동양의 마녀’라는 말을 접하면서 한국여자배구가 그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시대가 많이 달라진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이제는 한국 선수 가운데 김연경은 ‘동양의 마녀’를 넘어서 ‘세계에서 10억명 중의 하나’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인 슈퍼스타로 자리를 잡았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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