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아스토리] ‘돌아 온 어린 왕자’ 김원형과 ‘떠나는 집사’ 박경완](https://cgeimage.commutil.kr/phpwas/restmb_allidxmake.php?pp=002&idx=3&simg=20201108062250073578f6b75216b21121740159.jpg&nmt=19)
1991년 전북을 대표하는 프로야구단 쌍방울 레이더스가 출범했다. 김원형과 박경완은 나란히 쌍방울에 입단했다. 전주 중앙초등학교에서 시작된 동무사이가 전주동중-전주고를 거쳐 프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나란히’는 아니었다. 박경완은 친구 김원형의 등에 업혀 입단했다. 김원형이 고려대학을 선택했다면 박경완에게 프로는 언감생심이었다. 김원형은 알고 있었다. 친구는 인디언의 말처럼 ‘나의 짐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임을.
쌍방울 창단 감독 김인식은 김원형을 보자마자 선발 감으로 점찍었다. 곱상하고 날씬한 열 여덟 고졸신인. 비주얼상 그다지 믿음직하지는 않았지만 공의 내용을 보고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키울만하다고 판단했다.
박경완은 안중에 없었다. 흘낏 본 것만으로도 아닌 걸 알았다. 그래도 구단은 박경완을 받았다. 김원형이 자신의 공을 받아줄 포수라고 우겨서였다. 말도 안 되지만 김원형을 잡자면 못할 것도 없었다.
신인 계약금을 주진 않았다. 연습생이었다. 커오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말고였다. 그러다 말겠거니 했다. 김원형도 프로 물을 조금 먹고 나면 달라질 것이고..
박경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친구는 특별대우고 자신은 연습생. 일찌감치 그만 두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없진 않았지만 그렇게 그만두기엔 너무 억울했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해온 야구인데.
김원형은 선발투수로 잘 나갔다. 팀이 워낙 약체여서 승수를 많이 쌓지는 못했다. 그러다 ‘획기적인 사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14일 해태 선동열에 1-0 완봉승을 거두었다.
공을 100여개씩 던지는 게 안쓰럽게 느껴지는 가녀린 미소년, ‘어린왕자’는 그렇게 유명해졌고 곧 전주의 희망이 되었다.
박경완은 여전히 2군이었다. 그래도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원형이 선발 등판할 때마다 박경완을 원하는 덕분에 시즌 말 10경기 정도 포수 석에 않을 수 있었다. 92년엔 조금 더 늘었고 93년까지 3년간 67경기에 출장했다.
훌륭한 밑천이었다. 경기에 나서면서 경험을 쌓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불철주야 훈련에 매달렸다. 글러브에서 공을 빨리 빼는 훈련을 하고 정확한 2루 송구를 위해 어깨를 담금질했다. 시간 날 때 마다 다른 팀 타자들의 타격 습관이나 약점 등을 파악했다.
박경완은 그렇게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기회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다. 엄청난 양의 훈련, 도통 늘 것 같지 않던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입단 4년째인 94년 102경기에 나섰고 96년에는 126 전 경기에 출장, 마스크를 썼다.
그 사이 김원형은 또 한 번 폭풍을 일으켰다. 3년 차였던 1993년 4월 30일 OB베어스(현 두산)전에서 노히트노런 경기를 했다. 20세 9개월 25일의 최연소 기록이었다.
박경완에겐 고비가 찾아왔다. 96년 6월 구단은 포수를 강화하기 위해 최해식을 내주고 백전노장인 해태 장채근을 데려왔다. 밀릴 수 밖에 없는 주전 싸움. 하지만 결과는 박경완의 승리였다. 장채근이 오히려 후보로 밀려났다.
박경완은 비로소 알을 깨고 완전히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훨훨 날았다.
프로야구 대표 포수 중 한명으로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했다. 이제 수준급 포수의 경지에 오른 박경완은 97년 9억원이라는 사상 최고액의 트레이드머니를 받고 현대로 넘어갔다.
짧은 이별의 시간은 박경완의 성공시대였다.
포수 실력을 인정받자 방망이도 달라졌다. 91년 첫 해 단 1개의 안타도 치지 못했고 초반 3년간 3개의 홈런이 고작이었으나 2000년 시즌 4연타석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국내 프로야구 19년간 처음이었다.
홈런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40홈런으로 이만수 이후 처음으로 포수 홈런왕과 시즌 MVP가 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한국시리즈 두 번째 우승까지 이끌었다.
2003년 FA자격의 박경완이 SK로 왔다. 김원형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쌍방울을 정리한 SK가 김원형을 안고 있었다. 다시 만난 두 친구. 박경완은 매일 경기에 나섰지만 김원형은 이제 전 같지 않았다.
그래도 꾸준했다. 10승을 작성하며 성실하게 마운드에 올랐다. 2008년에는 12승을 올렸다. 무리였을까. 2009년 겨울 왼쪽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2010년 8월에 다시 마운드에 섰지만 고작 3경기였다. 은퇴를 고려해야 할 시점이었으나 이를 악물고 2011년에 도전했다.
연봉 1억원. 전 해 2억5천만원에서 절반 이상 깎였다. 박경완은 2년간 총 14억의 연봉을 받기로 했다. 연봉보다는 마운드였지만 쓸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시즌을 끝낸 후 김원형은 21년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2년 후 박경완도 포수 마스크를 벗었다.
박경완과 김원형은 지도자로 또 한솥밥을 먹었다. 그러다 이번엔 김원형이 떠났다. 2017년 롯데코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4년, 김원형은 2019년 두산을 거쳐 2020년 11월 SK감독으로 돌아왔다. 18여년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그리고 감독대행으로 계속 SK를 지켰던 박경완은 짐을 쌌다.
이제 둘이 한 지붕 아래에서 살기는 쉽지 않을듯 하다. 그들이 앞으로 갈 곳엔 자리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번처럼 교대하며 인연을 쌓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 누구보다 SK를 잘 아는 박경완. 밖에서 한번쯤 SK를 다르게 보는 눈이 필요하다. 쉬면서 처음 감독이 된 친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수도 있을거고. 그러다 2년, 아니면 4년 그 후 박경완을 다시 볼 수 도 있을지도.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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