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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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마라토너 손기정 이야기 ①

굴레를 딛고 달린 이름 없는 소년, 세계를 제패하다

2025-09-23 07:03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으로 들어오는 손기정
1927년, 평안북도 신의주의 한 소년이 운동장 주변을 달리기 시작했다. 나이 열다섯의 손기정이었다. 정규 코스 42.195km를 처음 완주한 한국인 기록이 막 세워진 해였다. 그때의 세계 최고 기록과 국내 기록은 1시간 가까이 차이가 났다. 올림픽은 너무 멀었고, 꿈은 아득했다. 그러나 이 소년은 포기하지 않았다.

손기정은 어른들 틈에 섞여 경기마다 뛰었고, 장거리 달리기에는 언제나 끝까지 남았다. 하지만 두 가지 고난이 그 앞을 막았다. 가난,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억압이었다. 운동에 전념하기는 커녕 학업조차 이어가기 어려웠고, 민족의 의지가 꺾이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의욕을 잃지 않는 일 자체가 더 큰 싸움이었다.

“달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기고 싶었다.”

손기정의 삶을 관통한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의지의 메세지. 그는 달려야만 암울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독한 질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10만 관중이 지켜보는 메인 스타디움에 동양인 선두 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결승선까지 남은 100미터, 마지막 전력 질주를 통해 2시간 29분 19초 2.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환호는 쏟아졌지만, 메달 시상대 위의 현실은 냉혹했다. 영예는 일본 국적 아래 기록되었고, 손기정은 국적 없는 승리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담담하게 남긴 말은 “나는 조선인이다”였다. 이 선언은, 메달보다 오래도록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한국 마라톤의 뿌리는 바로 이 순간에서 시작되었다. 패배 의식을 넘어 민족의 자존을 지켜낸 발걸음, 그것이 손기정이 남긴 기록의 의미이다.

러닝이 새로운 국민 스포츠로 자리 잡은 지금, 우리는 그의 정신을 다시 묻는다. 손기정의 질주는 단순한 경기 기록이 아니라,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억압 속에서도 자존을 지켜낸 상징이었다. 뛸 때마다 이어지는 숨결 속에는 그의 선언이 남아있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은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달리고 있다.

[특별 기고] 마라토너 손기정 이야기 ①


[김원식 마라톤 해설가·전남 장성중 교사]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기자 /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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