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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의 사람 人] “농구 가족으로서 그동안 받은 은혜를 갚아야 한다”... KBL 패밀리 임정명 회장

2023-03-13 04:32

농구 스타플레이어 출신 임정명 KBL 패밀리 회장은 "신입 회원 늘리기, 기금 조성하기, 모임 활성화 등 3개 방안 실행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농구 스타플레이어 출신 임정명 KBL 패밀리 회장은 "신입 회원 늘리기, 기금 조성하기, 모임 활성화 등 3개 방안 실행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인생 후반부. 다시 농구 앞에 섰다. 선수도 코치도 아니다. 그렇다고 감독도 아니다. 회장이라는 직책으로 다시 농구팬들 앞에 나타났다. 프로농구 전·현 관계자들의 모임인 KBL 패밀리 회장이라는 타이틀로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현역 시절처럼 공식 무대가 있는 것이 아니다. 농구 뒷면에서 그동안 농구를 통해 받았던 은혜를 갚기 위해 물심 양면으로 뛰어야 한다.

지난 해 10월, KBL 패밀리는 정기총회에서 임기만료된 강호석 회장에 이어 임정명 신임 회장을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오랫동안 야인 생활을 했던 그를 비록 프로농구인 친선모임의 대표로 불러들였던 것이다.

국내 최고 센터로 활약하던 삼성전자 시절의 임정명.
국내 최고 센터로 활약하던 삼성전자 시절의 임정명.


그는 1970-80년대 최전성기를 보낸 남자농구 최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었다. 신일고, 고려대를 거쳐 삼성전자 농구팀에서 센터로 활약했던 그는 국가대표 시절 이충희와 함께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 화려한 명성을 날렸다. 지도자로서는 고려대 감독을 2번 역임했으며 프로농구에선 2000년대 전반 삼성 썬더스 수석코치로 활동했다.

만 65세라는 나이에 그는 머나먼 뒤안 길을 돌아 다시 농구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2009년 고려대 감독을 뒤로 농구계를 떠나 농구 선수출신 아내 백은희씨와 함께 강남 서초동에서 서동한우(구 춘하추동) 고깃집을 함께 하며 개인 사업도 해왔다. KBL 패밀리 회장은 애초 생각지도 않았다. 오래 전 은사였던 전 삼성 단장 이인표 전 KBL 패밀리 회장과 박한 전 고려대 감독 등이 위기에 빠진 프로농구에 다시 일으키기 위해 KBL 패밀리 역할이 중요하다며 그를 추천했던 것이다.

그는 “나보다 더 좋은 분들이 많아 처음에는 고사했다. 하지만 주위 여러분들이 자꾸 회장을 맡아 보라며 설득해 고민 끝에 어렵게 회장에 출마하겠다고 결심했다”며 “한국농구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만큼 현재 힘든 상황에 놓인 프로농구 육성에 작은 힘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임정명 KBL 패밀리 회장을 지난 10일 '서동한우'에서 만났다. 마침 그의 아내 씨와 여자농구 전 국가대표 전미애씨 등이 모임을 갖고 있었다. 임 회장 부부의 딸인 농구 선수 출신 임현지씨가 모교인 숙명여고 농구팀 코치를 맡았다고 소개했다. 배구 명 사령탑 신치용 감독의 부인인 전미애씨도 숙명여고 출신이다. “농구 가족이 다시 농구를 이어 나가게 돼 참 잘된 일”이라며 임 회장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넘쳐 났다.

2008년 벤치에서 고려대를 이끌던 임정명 감독.
2008년 벤치에서 고려대를 이끌던 임정명 감독.


다시 농구로 뛰어든 KBL 패밀리 회장

그는 KBL 회장을 맡으면서 회원들에게 3가지 공약을 내놨다. 신입 회원 늘리기, 기금 조성하기, 모임 활성화 등이다. 지난 2000년대 후반 프로농구 인기를 등에 업고 프로농구 관계자들의 친목 모임으로 출범한 KBL 패밀리는 그동안 이인표, 조승연 회장 등이 맡아 조직력을 다져왔다. 하지만 회원 수가 수년 째 정체돼 있다. KBL로부터의 지원으로 운영됐지만 지원금이 줄어들면서 예산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코로나 확산으로 지난 3년간 모임을 갖기가 쉽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회장을 맡았는데.

“농구를 위해 마지막으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농구에서 많은 혜택을 받은만큼 이제는 후배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해 도와야 한다고 본다. 패밀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각오이다.”

-집행부에 젊은 후배들을 많이 영입했다고 하는데.

“ 고려대 후배인 현주엽이 홍보이사를 맡아 새 회원들 영입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서장훈도 방송일로 바쁘지만 시간을 내 일을 돕겠다고 했다. 강동희도 회원으로 들어와 활동해줄 것을 권유하고 있다. 강동희는 수년 전 도박 문제로 처벌을 받고 자숙한 뒤 최근 농구교실 운영비 횡령문제로 물의를 빚었지만 실제로는 피해자였다고 들었다. 후배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돕고 싶다.”

-1990년대 후반 프로농구가 출범할 때 큰 인기를 끌다가 지난 수년간 현저하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데.

“안타깝다. 올해부터 아시아 쿼터로 필리핀 가드들이 KBL에서 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러다가 한국농구가 무너지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살림꾼 역할을 하는 가드를 필리핀 선수들이 맡다보면 한국농구의 국제경쟁력이 그만큼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아시안게임이나 아시아 선수권대회 등에서 라이벌인 필리핀에게 우리 전력이 다 드러날 수 있다. 외국인 선수들에게 센터를 전담케 한 데 이어 가드까지 필리핀 선수들에게 내주면 한국 농구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

KBL은 지난 2020년부터 아시아 쿼터 제도를 시행했다. 첫 2년간은 시범적으로 일본 선수들에게만 문호를 개방했다. 하지만 정작 아시아 쿼터로 한국무대를 밟은 선수는 원주 DB에서 활약했던 나카무라 타이치 한 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지난 해부터 KBL은 아시아 쿼터를 일본에 이어 필리핀까지 확대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 시즌에만 무려 6명의 필리핀 가드들이 한국 무대에 대거 입성했다.

-한국 농구를 다시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농구 저변부터 넓혀야 하는게 급선무이다. 초중고팀들 숫자가 너무 적고, 선수수도 많이 부족하다. 지방 농구를 활성화시켜 농구 뿌리를 튼튼히 해야한다. KBL과 대한농구협회 등과 손잡고 지방 자치도시들이 농구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러 방안 등을 논의해 나갈 생각이다.”

농구와 의리로 뭉친 사나이

현역 시절 그의 별명은 '불새' 혹은 '악바리'였다. 1m88로 센터 치고는 큰 키는 아니지만 몸싸움에 능하고, 승부욕이 강해서 붙여졌다. 신일고 시절 발군의 활약을 펼쳐 1977년 전체랭킹 1위로 고려대에 진학한 뒤, 박한 감독의 지도하에 동기 이충희 등과 함께 뛰며 49연승을 올렸다. 대학졸업 후 삼성전자에 입단하여 후배인 김현준, 김진과 함께 1984-85 및 1987-88 농구대잔치에서 각각 두 번 트로피를 들었다. 특히 고려대 77학번 동기였던 현대전자 이충희와 라이벌 관계였다. 현역 시절 포스트의 핵으로서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일어서는 악바리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는 1977년부터 1987년까지 10년간 국가대표팀 부동의 센터로 활약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박수교, 신동찬, 신선우, 이충희 등과 함께 준결승에서 226㎝의 장신 오카야마 야스다카가 버틴 일본을 91-90으로 제압한 데 이어 결승서 당시 아시아 최강 중국을 85-84로 누르고 우승, 70년 방콕대회에 이은 아시안게임 2번째 금메달을 차지했다.

1988년 선수 은퇴 후 박한 감독의 부름을 받아 고려대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 삼성전자 코치로 잠깐 몸담았다가 이듬해 고려대로 돌아왔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의 주역이었던 이민형과 전희철, 현주엽, 김병철, 양희승, 신기성,박재헌, 주희정 등이 다 그의 손을 거쳐갔다. 1994 대학농구 우승멤버 중 현주엽은 임정명 스타일에 가장 맞았다고 한다. 1997년 박한 감독이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하자 감독직을 물려받았다. 2000년에 모교 선배인 정광석 전 현대전자 감독에게 감독직을 승계하고 몇달 후 미국으로 농구연수를 떠났다. 한국 농구 지도자로서 미국 대학농구와 프로농구 연수를 체계적으로 받은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떠날 당시의 신문 기사 보도. [임정명 소장 사진]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떠날 당시의 신문 기사 보도. [임정명 소장 사진]


-미국으로 농구 유학을 어떻게 가게됐나.

“1960년 로마올림픽 미국 대표팀 감독이었던 피트 뉴엘의 초청을 받아 코치 수업을 2년여동안 받았다. UCLA, 듀크,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팀 디비전 1그룹에 속한 명문팀에서 연수를 받으며 미국 농구의 진면목을 배울 수 있었다. 뉴엘 감독이 LA 레이커스와 휴스턴 로키츠 감독도 지내 NBA도 경험할 수 있었다. 디펜스, 리바운드, 몸싸움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제도로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큰 공부를 했다고 생각했다. ”

-한국으로 돌아와 감독 생활을 하면서 어떤 도움이 됐나.

“2002년 미국 연수를 마치고 얼마 있다가 삼성 코치로 임명된 뒤 실전에 어느 정도 활용할 기회를 가졌는데 1년도 안돼 코치에서 물러났다. 2008년 고려대 감독을 다시 맡아 한번 미국 농구를 접목하려다가 농구팀 운영을 놓고 학교측과 마찰이 생겨 잘 되지 않았다. ”

-한국농구와 미국농구를 비교한다면.

“미국은 농구 본토답게 기본기와 실전능력이 완벽히 구비된 나라이다. 신장과 힘이 좋고, 철저하게 기본기를 강조한다. 우리나라는 주로 체력을 위주로 슛팅과 돌파력을 강조한다. 미국이나 유럽, 중남미 국가들과 경쟁하기 위해선 신장과 파워가 좋은 선수들을 발굴하고 기본기를 철저히 연마하는 농구를 해야 한다. ”

고려대 감독으로 재임시 선수들이 우승 헹가래를 치는 모습. [연합뉴스 제공]
고려대 감독으로 재임시 선수들이 우승 헹가래를 치는 모습. [연합뉴스 제공]


농구 가족, 공부하는 운동선수

그의 SNS 개인 사진에는 고려대 농구선수들과 함께 단체 식사를 하는 모습이 올라있다. 선수들을 얼마나 좋아하고, 농구를 사랑하는 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농구를 통해 만난 아내를 만났고, 딸도 농구를 하도록 했다. 그의 딸은 숙명여고를 거쳐 여자프로농구팀에서 활약했다가 프로팀 트레이너를 거쳐 최근 모교인 숙명여고 코치를 맡았다.

그는 대학 입학 때 체육교육학과를 선택한 동료들과는 달리 경영학과를 지원했다. 폭 넓게 공부하고 친구를 사귀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에서 선수생활을 이어 가며 서독 광부 출신으로 독일에서 의사학위를 받은 고려대 김성수 교수의 지도를 받아 대학원에서 체육 생리학을 전공했다. 2004년 체육교육학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고 고려대에서 겸임교수를 맡기도 했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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