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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특집]3. 손기정과 일장기 말소사건

2021-07-22 09:20

동아일보가 1936년 8월 25일 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말소하는 의거를 단행했다.
동아일보가 1936년 8월 25일 자 신문에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말소하는 의거를 단행했다.
올림픽에서 마라톤은 한일대결의 원조격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나라에 근대스포츠들이 도입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문호가 개방되고 이듬해인 1895년 고종이 교육조서를 반포해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축구, 야구, 농구 등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금씩 뿌리를 내렸다.

이런 가운데 육상은 1920년 일본인단체인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첫 대회가 열렸고 마라톤은 1927년 10월 17일 제3회 조선신궁대회에서 첫 선을 보였다. 당시 코스는 경서운동장을 출발해 청량리~망우동~동대문~의주로~용산역~을지로~왕십리를 거쳐 다시 경성운동장으로 돌아오는 26마일 4분의 1(42.195㎞)이었다. 여기에서 철도국 말단 직원인 마봉옥이 3시간29분37초로 우승해 한국 마라톤 첫 공인기록을 수립했다.

마봉옥은 이듬해인 1928년 5월 6일 경성에서 열린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 조선예선대회에서 3시간15분대로 우승해 자신의 기록을 15분 가까이 단축하는데 성공했으나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해 올림픽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마라톤은 실력으로 일본 선수들을 누를 수 있는 종목으로 각광을 받으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한 김은배(오른쪽)와 권태하(왼쪽), 가운데는 코치 겸 선수로 나선 쓰다.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참가한 김은배(오른쪽)와 권태하(왼쪽), 가운데는 코치 겸 선수로 나선 쓰다.
그 첫 주자는 김은배였다. 1929년 경신학교에서 양정고보 2학년으로 전학한 김은배는 1931년 10월 18일 제7회 조선신궁대회 마라톤에서 2시간26분12초라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우승해 '조선이 낳은 천재적 선수'라는 칭찬을 받았다. 이 기록은 우리나라가 첫 마라톤을 시작한 이래 5년만에 1시간 이상 단축을 한 것이고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핀란드의 한네스 콜레마이넨의 세계최고기록(2시간32분5초38)을 5분 이상 앞당긴 것이었다.

김은배와 함께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앞두고 혜성처럼 등장한 선수가 권태하였다. 당시 권태하는 휘문고보에서 리즈메이칸 중학으로 전학한 뒤 메이지대학에 재학하고 있었다.

권태하는 1932년 5월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조선 예선전을 앞두고 황금동 4거리(현 을지로 4거리)에서 훈련을 하던 중 일본인 순사로부터 정지신호를 무시했다며 구타를 당해 온몸에 피멍이 들고 다리 부상까지 당해 2주 진단을 받고도 출전해 2시간34분12초로 1위로 골인해 그 전해에 세운 세계최고기록(비공인)을 인정받아 예선전을 면제받은 김은배와 함께 일본 최종 예선전에 나갈 수 있었다.

이때 주목할 점은 5000m와 10000m에서 손기정(양정고보)의 등장이었다. 손기정은 5000m에서 16분03초2로 조선최고기록(16분05초)을 세웠고 10000m에서는 막바지까지 김은배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인 끝에 5m 차이로 아깝게 2위에 그쳤지만 일찌감치 장거리에서 큰 소질을 보인 것이다.

1932년 5월 25일 제19회 전일본육상경기선수권대회를 겸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파견을 위한 마라톤 최종 예선전은 말 그대로 조선과 일본의 격전장이었다. 조선에서는 김은배 권태하가 나섰고 이본에서는 세계기록을 세운 야나기(矢萩)를 비롯해 다카하시(高橋), 스즈끼(鈴木), 구스모토(楠本), 로스앤젤레스 마라톤 코스를 사전 답사한 츠다(津田) 등이 나섰다.

모두가 일방적인 일본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권태하가 2시간36분50초로 1위, 김은배가 2시간37분59초로 2위, 이귀하(전수대학)가 2시간39분49초로 5위에 올라 마라톤 왕국 조선의 위세를 과시하며 일본의 콧대를 완전히 눌러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날 마라톤에는 양정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에서 고학을 하던 남승룡도 참가해 김은배의 페이스를 뒷받침하며 역주했으나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대회가 끝난 뒤 일본육상경기연맹은 3위를 한 츠다(2시간38분4초)를 선수 겸 코치로 임명하고 권태하 김은배를 올림픽 대표로 선발했다.

이렇게 세계무대인 올림픽에 첫 발을 디딘 우리 마라톤은 코치 겸 선수인 쓰다가 "절대로 나를 앞서 달리지 마라"고 지독한 견제를 하면서 결국 김은배가 6위(2시간37분28초), 권태하가 9위였고 쓰다는 5위를 했다. 이유야 어찌됐던 올림픽 첫 마라톤에서는 일본에 패한 셈이었다.

김은배의 6위 입상을 계기로 조선에 마라톤 붐이 불었다. 이에 조선체육회도 1933년 5월 27일 제1회 전조선풀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 이즈음 손기정도 장거리에서 마라톤으로 종목을 바꾸고 마라톤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손기정이 첫 마라톤 도전은 1933년 10월 17일 제9회 조선신궁대회였다. 경성운동장을 반바퀴 돌고 동대문~종로~경수가도를 거쳐 안양을 왕복하는 코스였다. 손기정은 마치 중장거리 주자가 뛰는 것 처럼 처음부터 내달려 2시간29분34초로 1위, 남승룡이 2시간31부36초로 2위를 차지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손기정의 기록은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우승한 아르헨티나 자바라의 2시간31분36초를 뛰어 넘는 세계신기록이었다.

이때부터 손기정은 국내에서 마라톤에 관한 한 적수가 없었다. 특히 1935년에는 42.195㎞를 심지어 한달에 1~2번을 완주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과시했다. 1935년 3월 21일, 4월 3일, 5월28일, 5월 18일, 9월 29일 10월 20일, 10월 22일, 11월 3일 등 그야말로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때마다 손기정은 일본 선수들을 압도하거나 기록으로도 일본 선수들보다 월등했다.

이런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표에는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또 다른 조선 선수인 남승룡은 일제로서는 눈의 가시나 다름없었다. 일본최종예선전에서 남승룡이 1위, 손기정이 2위를 해 어쩔 수없이 대표로 선발을 해 놓고도 남승룡을 떨어뜨리기 위해 베를린 현지에서 최종 평가전을 갖는가 하면 코스 답사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신발조차 주지 않는 등 얄팍한 술수를 쓰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1936년 8월 9일 오후 3시 손기정은 남승룡과 또 다른 일본대표 시오아쿠와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나섰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모습, 우승자인 손기정(가운데)은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앞쪽은 남승룡, 뒤쪽은 2위인 영국의 하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모습, 우승자인 손기정(가운데)은 월계수로 일장기를 가리고 있다. 앞쪽은 남승룡, 뒤쪽은 2위인 영국의 하퍼.
27개국 56명이 메인스타디움 육상 100m 출발선에서 3열로 모인 가운데 출발 총성이 울렸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3번째 열에서 출발했다. 마라톤 행렬은 마라톤 탑 아래를 통과해 경기장 밖으로 나아가 스타디움 남쪽으로 빠졌다가 다시 마라톤 탑으로 해서 경기장에 들어서서 트랙을 300m를 달린 뒤 올림픽 종탑을 나서 스타디움 남쪽으로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 10만 명의 관중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함께 스타디움을 빠져 나갔다.

스타디움을 빠져나가자 자바라가 마치 단거리선수처럼 놀라운 스피드로 치고 나갔다. 그 뒤를 디아스(포르투갈), 브라운(미국), 하퍼가 뒤를 따랐다. 후미그룹에서 호흡을 조정하던 손기정은 5㎞ 지점을 벗어나면서 서서히 순위를 끌어 올리며 5번째로 나섰다.

10㎞ 지점을 지나면서 손기정은 우승후보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하퍼와 나란히 섰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하퍼는 성큼성큼 스피드도 좋았다. 손기정이 하퍼를 제치려고 하자 하퍼는 “슬로우, 슬로우”라고 말을 걸어왔다. 서로 경쟁을 하면서도 손기정의 오버페이스를 걱정한 진심어린 충고였다.

선두 자바라가 반환점을 돈 시간은 1시간11분29초. 반환점을 돌아 나오는 자발라의 얼굴은 오버페이스 기미가 보일 정도였고 눈은 초점이 흐려 있었다. 손기정과 하퍼는 선두 자발라와는 1분 차이로 나란히 반환점을 돌았다. 그리고 반환점을 돌아 조금 지나고 나니 반환점을 향해 오는 남승룡이 보였다. 후위 그룹에 속해 있던 남승룡은 어느새 앞서가던 경쟁자들을 하나씩 따라 잡아 8위로 올라섰다. 남승룡은 지친 것 같지 않았다. 워낙 막판 스퍼트가 좋아 앞서 가는 선수들을 제칠 능력이 충분한 남승룡이었다.

반환점을 지나 하퍼를 따돌리고 2위로 나선 손기정은 결승점을 12㎞ 앞둔 30㎞ 지점에서 드디어 자바라까지 따라 잡았다. 처음부터 선두에 나서며 내달리던 자바라가 오버페이스로 그대로 균형을 잃고 고꾸라지듯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예 의식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독주를 거듭한 손기정은 마라톤 승리자의 입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베를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유유히 나타났다. 이 순간 장내 아나운서가 ‘선두는 일본의 손기정’이라고 알렸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1위로 들어오는 있다. (왼쪽) 1위로 골인한 뒤 여유있는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인채 본부석 앞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에 1위로 들어오는 있다. (왼쪽) 1위로 골인한 뒤 여유있는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인채 본부석 앞을 지나가고 있는 모습
이 소리를 들으면서 손기정은 트랙 입구로 힘차게 뛰어 들었다. 열광하는 관중들의 기립박수와 함성이 스타디움을 뒤덮었다. 손기정은 마치 100m 단거리를 뛰는 스프린터처럼 결승점으로 뛰어 들었다. 2시간29분19초2, 1986년 근대올림픽이 부활된 이래 42.195㎞ 정규 마라톤 코스에서 아직 그 누구도 넘지 못한 2시간30분의 벽을 깬 세계최고기록이다.

손기정이 우승 테이프를 끊고도 2분이 지난 뒤 뒷덜미를 잡을 듯 따라붙는 2위 싸움이 더 볼만했다. 영국신사 하퍼가 2시간31분23초2로 2위로 골인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 넣으며 따라 붙은 남승룡은 단 19초 차이로 3위였다.

남승룡의 분투는 마라톤 전문가들과 보도진을 놀라 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남승룡은 후반의 스퍼트로 30㎞ 지점까지 무려 17명을 제쳤으며 35㎞ 지점에서는 7위였고 마지막에는 3위까지 올라섰으니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강인함과 막판의 놀라운 지구력은 가히 초인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었다.

손기정은 이때 결승선에 들어와서 오히려 여유롭게 두 다리를 자기 손으로 부비고 마찰을 한 후 남승룡을 맞으러 유유히 걸어서 트랙 귀빈석 앞을 지나갔다. 이때 장내 아나운서는 손기정의 이런 유유자적한 행동에 말문이 막힐 정도였으며 관중들도 그 여유있음에 감탄, 또 감탄해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우승후보라고 모두가 손꼽았던 자바라는 낙오자의 오명을 쓰고 말았고 손기정, 남승룡과 함께 출전한 시오아쿠도 등외로 밀렸다.

세계가 지켜 본 마라톤 레이스는 이렇게 막이 내렸다.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은 가슴에 한을 품고 혼을 불살라 이룬 숭고한 승리였다. 개인적으로는 생애 최고의 환희였고 오매불망 우승 소식을 기다리던 조선인들에게는 민족 최고의 영광이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우승, 남승룡 3위라는 쾌보를 전할 때 한반도의 사정은 그야말로 어려웠다. 바로 장맛비로 인한 홍수가 발생해 한강 뚝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대신 수문을 개방하는 바람에 마포가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았다. 이에 이재민이 속출하고 계속된 비로 사람들이 기진맥진해 있을 때였다. 여기에 장마 막바지에 불어 닥친 ‘이름 없는 태풍 3693호’는 1232명의 사망자(약 4000명 부상 혹은 실종)를 낸 우리나라 역대 최악의 태풍으로 남아 있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3위 남승룡의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호외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과 3위 남승룡의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호외
이렇게 모든 조선인들이 시름에 젖어 있을 때 손기정이 우승을 했다는 첫 소식이 전해지자 만세를 불렀고 5분도 못 돼 손기정이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하고 남승룡이 3위를 했다는 소식에 또다시 만세소리가 요동쳤다. 순식간에 한반도 전역을 감격과 환희에 들뜨고 희망을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이 끝나고 덴마크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유럽 순회에 나서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은밀한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손기정이 우승을 하고 난 나흘 뒤인 8월 13일 몽양 여운형이 사장을 맡고 있는 조선중앙일보에서 손기정과 남승룡의 시상식 사진을 실었다.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 붙어 있어야 할 일장기를 지운 사진이었다. 양정고보 출신으로 육상을 한 유해붕 기자의 한발 빠른 일장기 말소였다.

그뒤 동아일보는 12일이 지난 8월 25일 다시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하는 의거를 단행했다.

이 말소 의거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로 전날인 8월 24일 동아일보 사회부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는 일본 오사카에서 자택으로 온 소포를 받았다. 오사카 아사히신문사에서 격주로 발행하는 ‘아사히스포츠’였다. 이 잡지에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일본 선수 9명의 사진과 함께 8월 13일에 게재한 손기정과 남승룡의 시상식 사진이 선명하게 나와 있었다.

이 사진을 오려서 다음날 동아일보로 출근한 이길용 기자는 “조금 옅게 잘 보이지 않게 해서 손 선수의 가슴을 보도하겠다.”고 빙허 현진건 사회부장에게 보고한 뒤 청전 이상범 화백과 마주 앉았다.

이길용 기자가 “사진에서 붉은 동그라미 부분을 엷게 할 수 있겠나”고 묻자 청전은 “엷게 잘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편이 간단하다”고 말했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없었다.

이길용 기자와 이상범 화백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붉은 동그라미를 지워 버리고 났을 때의 여파를 결코 몰랐을 리가 없다. 서슬 시퍼런 일제의 감시 하에서 일장기를 지운다는 것은 바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8월 25일 동아일보 석간 3면에는 ‘영예의 우리 손군’이란 제목으로 사진 2장이 실렸다. 위에는 머리엔 월계관 두 손엔 감람수(橄欖樹)의 화분! 마라손 우승자 “우리 용사 손기정군”이란 설명을 붙였고 아래에는 마라손 정문을 나서 용약출발(勇躍出發)하는 손 선수(지난 9일 세계 제패한 그날)라고 설명을 달았다. 바로 위의 이 사진에서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를 지워 버린 것이다.

이 사진이 보도되자 일제는 곧바로 동아일보를 압수수색하고 이길용 기자를 비롯해 관련자들을 연행했다. 일제로서는 ‘일장기 말소’를 동아일보 사장인 고하 송진우와 사주인 인촌 김성수까지 연루시키기 위해 이길용 기자를 압박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러나 이길용 기자는 “히노라무(일장기)를 아주 지워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고 농도가 너무 짙기 때문에 조금 흐리게 하려고 한 것이 지나쳐 그렇게 되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당시 동아일보 자매지인 신가정에서는 일장기가 있는 손기정의 사진 대신 손기정의 발 부분을 게재하고 나서 “이것이 베를린 마라톤 우승자, 위대한 우리들의 아들 손기정 선수의 발…”이라고 해 일제의 조사를 받았다. 이때 담당 기자였던 수주 변영로는 “그야 마라톤에선 다리와 발이 제일이니까요…”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여튼 이길용 기자와 이상범 화백이 주도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 의거로 동아일보는 8월 26일 경성에 부임한 조선총독부 미나미 총독에게서 8월 29일부터 무기한 정간처분을 내렸다. 동아일보 4번째 정간이었다. 뒤이어 신동아 9월호 역시 일장기가 말소된 사진을 게재해 신가정과 함께 9월호를 마지막으로 강제 폐간되고 말았다.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당시 동아일보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는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당시 동아일보 체육주임 이길용 기자
일장기 말소 의거의 직접 책임자로 지목된 이길용 기자는 다시는 기자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시말서를 쓰고 40일 만에 풀려났다. 이 동안 가족에게만 단 한차례 면회가 허용되었을 뿐이고 수시로 옷 차입만 가능했는데 얼마나 모진 고문을 받았는지 나오는 옷을 걸레나 다름없었고 피에 젖어 있었다.

이 의거로 동아일보에서는 송진우 사장과 장덕수 부사장, 김준연 주필, 설의식 편집국장, 양원모 영업국장, 현진건 사회부장, 이여성 조사부장, 박찬희 지방부장, 최승만 잡지부장, 신낙균 사진과장, 이길용 체육주임, 이상범 화백 등 무려 14명이 신문사를 떠나야 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가 큰 문제가 되자 조선중앙일보도 덩달아 정간을 당했다. 일제는 조선중앙일보에 여운형 사장의 해임을 요구했고 운영난까지 겹친 조선중앙일보는 나중에 정간이 풀렸으나 제때 복간을 하지 못해 결국 폐간의 운명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한 지 279일이 지난 1937년 6월 2일에 정간이 풀려 6월 3일 석간부터 다시 신문을 발행했다.

유럽을 순회하고 손기정과 남승룡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뒤 꼭 두 달째가 되는 10월 8일이었다.

동아일보가 손기정의 가슴에 붙어 있던 일장기를 말소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귀국길에 상하이에 들렀을 때 교통대학 교수로 있는 신기준을 만났을 때였다. 신기준은 1928년 연희전문학교 체육주임과 조선체육회 이사를 지냈고 1929년 봉천동북대학 체육교수, 1931년 교통대학 교수를 하면서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 중국대표단 부단장으로 참가했으며 호를 국권(國權)이라 지을 정도로 누구보다 애국심이 뛰어난 체육인이었다.

일본과 조선에 가까워 지면서 손기정은 일제의 집요한 감시를 받았다. 10월 6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하자 일제는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귀국하는 도중에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로 조사를 받았고 나가사키에서 고베를 거쳐 도쿄로 가는 곳마다 올림픽 개선 환영행사가 이어졌지만 일제의 감시 눈초리에 신변의 위험까지 느낄 정도였다.

일본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급하게 달려온 담임선생 황욱과 함께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을 때 비행장에는 삼엄한 감시 속에 양정고보 안종원 교장, 서봉훈 교감, 조선일보의 고봉오 기자, 그리고 그의 형 손기만이 마중 나왔다. 일제는 손기정의 환영행사를 일체 금했다. 손기정 환영회가 한민족의 민족 감정에 불을 붙여 반일시위나 독립운동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고도 환영인파없이 여의도에 내린 손기정 선수는 안종원 양정고보 교장(왼쪽)과 형 손기만씨의 영접을 받았다.[손기정기념재단 제공]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고도 환영인파없이 여의도에 내린 손기정 선수는 안종원 양정고보 교장(왼쪽)과 형 손기만씨의 영접을 받았다.[손기정기념재단 제공]
말 그대로 초라한 개선이었다. 베를린 하늘에 일장기를 펄럭이게 한 금메달리스트, 그것도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개선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귀국길의 선상에서부터 일본에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신변보호라는 허울로 감시를 당했고 막상 고국에 도착해서도 그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하자 일제는 손기정을 데리고 가장 먼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 들러 승전 보고를 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일본 순사 두 명이 손기정의 팔짱을 끼고 가는 사진이 나와 한때 일본 순사들에 의해 손기정이 밧줄에 묶여 연행되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의 귀국 행사는 2개월 뒤인 11월에야 조선일보 주최로 양정고보 관계자들이 중심이 돼 조촐하게 베풀어졌다. 조선체육회 윤치호 회장은 손기정의 우승을 기려 기념체육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거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손기정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끊이지 않았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보성전문에 입학한 뒤 계속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2학기에 정상희와 권태하의 보증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했다. 메이지대학 입학 조건은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 “조선학생들과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올림픽 특집] 한일스포츠, 라이벌 대결과 克日

1. 한일스포츠의 탄생, 애국과 문명화

2. 일본에 질 수 없다...역대 올림픽서 나타난 반일 감정

3. 손기정과 일장기 말소사건

4. 남녀배구 한일전

5. 마라톤 한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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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야구 한일전

8. 유도 한일전

9. 한·일스포츠 속의 양국 지도자

10. 진정한 극일, 승패보단 스포츠 정신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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