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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72)런던올림픽, 험난한 여정③20일만에 도착한 런던

2021-05-07 09:45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가한 하계올림픽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선수촌 입촌식을 거행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최초로 참가한 하계올림픽인 1948년 런던올림픽에서 선수촌 입촌식을 거행하고 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참가를 위해 장도에 오른 우리 선수단의 일정은 험난하기 그지 없었다.

서울역에서 환송을 받고 부산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떠난 우리 선수단은 배편을 기다리며 요코하마에서 지낸 이틀 동안 선수단은 열차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시내 운동장을 찾아 컨디션을 조절했다.

배를 타고 상하이를 거쳐 홍콩으로 가는 길은 엿새가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배 멀미를 하는 선수들이 속출했다. 나름대로 배 한켠에서 훈련을 했으나 제대로 된 훈련이나 컨디션 조절이 제대로 될 리 만무였다.

홍콩에서 비로소 비행기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하지만 비행기 탑승 정원이 40명이어서 선수단이 한꺼번에 타지도 못하고 1, 2진으로 나누어야 했다.

홍콩을 출발한 비행기는 방콕 캘커타 봄베이 카이로 로마를 거쳐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요즘은 전용기 편으로 반나절이면 갈 거리지만 방콕과 봄베이 로마에서 하룻밤씩을 묵어야 했으니 선수단 모두 지칠 대로 지쳐있는 상태였다.

서울을 떠난 것이 6월 21일이고 암스테르담에서 직항 편으로 런던에 도착한 것이 7월 11일이니 런던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와 배, 비행기를 갈아타며 무려 20일 동안 강행군을 했던 것이다.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단이 입촌식장으로 가고 있는 모습
런던올림픽에 참가한 우리 선수단이 입촌식장으로 가고 있는 모습
선수단은 런던 교외의 선수촌에 짐을 풀었다. 런던올림픽 개막일까지는 보름 이상 남아 긴 여행으로 지친 몸을 추스르기에 충분했다. 우리 선수단의 입촌은 런던올림픽 참가국 가운데 가장 빨랐다. 선수촌은 영국 공군이 쓰던 병사 숙소였는데 시설도 괜찮았고 다행히 운동기구도 잘 갖춰져 있었다.

개회식이 열린 7월 29일 주경기장인 엠파이어 스타디움에는 10만을 헤아리는 관중이 스탠드를 가득 메웠다. 우리 선수단 기수는 손기정이었다. 손기정은 출국 직전 부산에서 맹장염에 걸리는 바람에 다시 서울에 와서 수술을 받고 뒤늦게 선수단에 합류했다.

미군정은 처음으로 태극기와 함께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단을 격려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처음으로 조선 국민은 자신의 국기 아래에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이다. 미국 조선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조선군정장관 딘 소장을 포함한 미군 당국은 조선 올림픽 팀을 굳게 지지하고 있으며 이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마라손 선수 서윤복은 우승할 것이다. 종전(終戰) 불과 3년 후에, 그리고 독립국가로서 발족하는 때에 있어 이 나라는 보다 더 의지가 약한 민족이라면 주저했을 사업을 완수하였다. 조선인은 과거 올림픽 경기에서 광채를 발휘하였으나 그들은 타국을 대표하였던 것이다. 손기정 군은 1936년 일본 팀에 참가하여 마라손 신기록을 세웠다. 그는 현재 조선 선수단 수석감독이다. 조선 민족은 1년 이상이나 조선의 올림픽 참가를 실현하려고 투쟁하였으며 문자 그대로 수만의 조선인이 시간과 금전 노력을 공헌하였다. 이는 진실로 국민적 거사였다.

런던올림픽에는 서울중앙방송이 유일하게 중계팀을 파견했다. 영국의 BBC방송과 제휴해 매일 15분씩 라디오로 올림픽 소식을 전해왔다.

1948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광경
1948년 런던올림픽 개막식 광경
원로 체육기자 출신인 김광희 전 동아일보 이사는 자신의 저서 ‘여명’에서 런던올림픽 개회식장의 광경을 김정호 아나운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전해왔다고 싣고 있다.

“런던 하늘에 태극기, 선수들 앞에도 태극기, 이 넓은 스타디움엔 10만이 넘는 사람들이 가득하건만 저 태극기를 눈물을 머금고 바라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태극기도 입이 있어 말을 한다면 우쭐거리고 춤을 추면서 파란 많은 지난날을 눈물로 독백하리라…”

런던올림픽에서 가장 기대했던 종목은 마라톤이었다.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한 서윤복,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 서윤복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최윤칠이 버티고 있었으니 베를린대회에 이어 올림픽 마라톤 2연패를 호언할 만도 했다.

마라톤 경기는 8월 7일 섭씨 38도의 무더위 속에 치러졌다. 최윤칠은 초반부터 선두그룹에 끼어 역주했다. 20km를 지나면서 더욱 속도를 내 다른 선수들을 추월하던 최윤칠은 선두로 달리던 40km 지점에서 갑자기 멈춰서고 말았다. 다리에 쥐가 난 것이었다. 최윤칠은 들것에 실려 병원으로 옮겨졌고 손기정에 이은 올림픽 마라톤 2연패의 꿈도 날아가 버렸다. 서윤복도 다리 통증으로 악전고투 끝에 겨우 레이스를 완주했다.

드러내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은근히 금메달을 기대했던 마라톤의 참패는 충격적이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손기정은 귀국 후 마라톤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태극기를 달고 나간 첫 올림픽에서 그런 치욕적인 참패를 당하리라고는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기대했던 마라톤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종목은 말할 것도 없었다. 하기야 선수 52명 가운데 30살 이상의 선수가 31명이나 됐으니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는 애당초 무리였다. 축구가 스웨덴에게 12-0의 치욕스런 대패를 당한 것도 런던올림픽에서였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선수인 육상 창던지기의 박봉식 선수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선수인 육상 창던지기의 박봉식 선수
이화여중에 재학 중인 박봉식은 선수단 가운데 유일한 여자선수였다. 원반던지기에 출전한 박봉식의 기록은 자신의 최고기록을 훨씬 뛰어넘는 33m80이었지만 런던대회 우승기록 41m92에는 한참 못 미쳤다. 그만큼 세계 수준에 까마득하게 뒤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런던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게 한 선수가 있었다. 김성집과 한수안이 그들이다. 역도선수로는 전성기를 훨씬 지난 나이인 29세에 올림픽에 출전한 김성집은 미들급에서, 복싱에 출전한 한수안은 플라이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메달 한 개 없어 애를 태우던 대회 막판에 나온 소중한 동메달이었다.

런던올림픽 역도에서 동메달을 딴 김성집 선수(오른쪽)
런던올림픽 역도에서 동메달을 딴 김성집 선수(오른쪽)
런던올림픽은 점수제를 채택해 국가별 순위를 매겼다. 종합 1위는 645.5점을 딴 미국이 차지했고 347점의 스웨덴, 224점의 프랑스가 뒤를 이었다. 우리 선수단은 137.5점으로 59개 참가국 가운데 24위에 올랐는데 이는 아시아권에서는 인도에 이어 2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하계올림픽에 첫 출전한 선수단은 동메달 2개를 앞세우고 귀국했다. 식민 지배를 갓 벗어난 극도의 혼란 속에 주먹구구식으로 선수를 뽑아 제대로 훈련조차 하지 못한 채 참가한 올림픽에서 건진 동메달 두 개의 가치는 차고도 넘쳤다. 비록 기대했던 마라톤에서 고배를 마시기는 했지만 선수단을 맞이하는 국민들의 시선은 따뜻했다. 독립된 국가로 태극기를 달고 세계무대에서 당당히 겨룰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런던올림픽 출전은 국민 모두에게 충분히 감격스러운 일이었던 것이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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