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대한민국 체육100년100인100장면] 60. 월드컵 도전사-멍든 가슴의 첫 출전

2021-02-22 08:59

대한민국의 월드컵 도전사는 파란만장했다. 1954년 ‘어쩌다 처녀 출전’했지만 그로부터 32년을 본선 무대 언저리에도 가지 못했다. 그러나 1986년 한 번 인연을 맺기 시작하자 어느 새 월드컵 본선 단골손님이 되었다.

1954년 월드컵 극동지역예선전 포스터. 3월7일 1차전에서 한국이 5-1로 승리, 사실상 본선진출을 확정했다.
1954년 월드컵 극동지역예선전 포스터. 3월7일 1차전에서 한국이 5-1로 승리, 사실상 본선진출을 확정했다.


대한민국 축구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본선 무대를 밟은 것은 모두 10차례. 두 번째무대까지의 세월이 길었지만 시동을 건 후에는 9번 연속 빠지지 않고 뛰어 나갔으며 홈에서 벌어진 2002년 월드컵에선 4강을 이뤄 강팀의 반열에 까지 올랐다.

자타가 인정하는 아시아 최강으로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은 유럽·아메리카를 제외한 여타지역의 국가중에선 최고의 성적이다.

◇ 멍든 가슴의 첫 출전

아직 월드컵이 정착되지 않았던 때. 아시아 지역에선 본선 참가 신청국이 많지 않았고 결국 우리와 일본이 극동지역 예선전을 치르게 되었다. FIFA의 규정에 따라 한국과 일본이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해야 했다.

하지만 아직도 일본 강점기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시절, 이승만대통령을 비롯 정치인들은 일본 선수들의 방한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들과 경기하는 것 조차 탐탁치않게 여겼다.

‘단지 축구일뿐’이라는 체육인들의 설명이 처음에 먹히지 않았다. 그러나 재일대한체육회와 재일사업가 정건영 그리고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축구인들의 각오 등이 합쳐 일본과의 월드컵 지역예선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다해도 일본팀이 한국땅을 밟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2경기 모두 일본에서 하라는 것이 정치권의 최종 결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1954년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은 1954년 3월 7일과 14일 일본 도쿄 메이진진구 경기장에서 열렸다.

지면 현해탄에 모두 빠지겠다는 각오의 대한민국 대표팀 선수는 대부분 군소속이었다. 민간소속은 GK 홍덕영을 비롯 이상의, 강창기(이상 조선방직) 정도였다. 후보 골키퍼인 함흥철과 우상권은 헌병사령부, 골게터인 최정민과 김지성 등 8명이 특무대였고 나머지도 병참단, 해군, 첩보대 소속이었다.

정신무장은 철저했다. 그리고 실력 역시 일본보다 한 수 위였다. 7일의 1차전에서 5골이나 넣으며 5-1로 승리했고 승부가 이미 기운 2차전에서도 일본의 악착같은 추격을 2-2로 마무리했다.

두차례의 경기에서 한국의 정남식이 3골, 최광석과 최정민이 각각 2골을 넣었다. 일본 선수들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것은 최정민이었다. 일본의 수비수 히라키는“ 최정민은 몸무게의 중심이 낮고 움직임이 날카로워 마치 어린이들 속에 어른이 한 사람 끼어 있는 듯 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일본 공격수 기무라는“ 최정민은 파워가 있었고 플레이가 끈질겼다. 지금의 선수들은 그런 면에서 부족하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그런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의 선수들이 본받아야 할 선수였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최정민은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대표적인 스트라이커로‘ 아시아의 다리’라고까지 불렸다.

신생 독립국 코리아의 이름으로 처음 참가하는 월드컵은 하지만 고난의 행진이었다. 서울에서 대회 개최지인 스위스 취리히까지 꼬박 8일이 걸렸다.

6월 9일 일단 서울역을 출발한 22명의 선수단은 기차로 부산까지 간후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에서 타고 갈 비행편을 찾지 못해 4일씩이나 묶여 있다가 재일체육회의 도움으로 6월 13일 겨우 하네다 공항을 출발했다.

필리핀, 베트남, 인도, 파키스탄, 시리아, 이탈리아를 빙빙 돌아 출발 64시간 만인 6월 16일 자정 무렵에야 겨우 취리히에 도착하는 길고 긴 여행이었지만 그나마도 11명은 프랑스 항공편이었고 다른 11명은 미공군기의 세를 졌다.

월드컵은 6월 16일 이미 개막했고 우리의 경기는 고작 15시간 후인 6월 17일 오후 3시였다. 첫 경기의 상대는 헝가리였는데 우리가 속한 2조는 헝가리와 서독, 터키가 몰려있는 최강팀의 조합이었다.

헝가리는 결승에서 서독에게 2-3으로 패해 준우승했지만 2조 조별리그에선 서독을 8-3으로 대파했다. 실력도 다른 본선 진출국에 비하면 떨어졌지만 우승, 준우승국과 같은 조가 되었으니 운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경기는커녕 서있기도 힘들 정도로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경기 개시 10분정도는 어떻게 버텼지만 그것이 한국 선수들의 한계였다. 골문은 적에 의해 완전히 열렸고 골키퍼 홍덕영은 가슴에 멍이 들 정도로 수없이 공을 끌어안아야 했다.

전반에 4골, 그리고 다리에 쥐가 난 선수가 속출한 후반에 5골. 0-9의 엄청난 참패였다. 아홉골 차의 영패는 두고두고 월드컵사에 남게 되었다. 두 번째 경기인 터키전에선 0-7로 졌다.

두 게임에서 16실점은 아직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최다골 차 패배이다. 서독과도 경기를 했다면 그보다 더했겠지만 이미 2패로 탈락이 확정되어 서독과는 싸울 기회도 없었다.

우물안 개구리임을 실감한 월드컵 처녀 출전의 아픔을 뒤로하고 선수단은 또 먼 길을 돌아 서울로 오며 다음을 다짐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정말 오랫동안 헛 다짐으로 남아 있었다. 월드컵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신재 마니아타임즈 기자/20manc@maniareport.com]
<저작권자 © 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쇼!이슈

마니아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