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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8)끝내 피하지 못한 조선체육회 해산(상)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협회의 우열 경쟁

2021-01-08 15:47

1925년 경성운동장 개장기념으로 열린 제1회 조선신궁대회 경기 대회 모습
1925년 경성운동장 개장기념으로 열린 제1회 조선신궁대회 경기 대회 모습
태생부터 다른 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협회의 우열경쟁
1920년 7월 13일 출범한 조선체육회와 이보다 1년 5개월 앞선 1919년 2월 18일 결성된 조선체육협회는 그 태생부터가 달랐다.

조선체육회가 신문물을 공부한 우리 젊은이들이 중심이 돼 ‘건민과 신민’이라는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창립되었다면 조선체육협회는 1911년 7월에 만든 일본체육협회를 모델로 조선에 사는 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경성정구회(1918년 결성)와 경성야구협회(1919년 1월 결성)를 통합해 만든 체육단체였다.

따라서 조선체육회와 조선체육협회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우열을 가릴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조선을 양분하고 있던 이들 두 단체들은 192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우열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체육협회가 주관한 경기는 조선신문사와 대판매일신문사에서 기증한 우승기를 다투는 전선정구대회와 전선야구대회 등이 있었다. 이런 대회들은 일제의 비호와 총독부의 후원을 받았다.


이러한 조선체육협회에 견주어 ‘무’에서 시작한 조선체육회는 아예 경쟁상대조차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 것이 사실이다.

제대로 된 사무실도 갖추지 못한 채 열악한 예산 속에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걸핏하면 일어나는 선수들끼리의 패싸움, 심판 판정 불복이 일어나면 일경들의 매서운 눈초리에 주눅이 들기가 일쑤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조선체육회는 독자적인 체제를 유지하며 조선체육협회와 대등한 경쟁을 이어 나갔다.

특히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처럼 우리 선수들은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하는 메이지신궁대회 및 각종 대회에 적극 참가해 '참여속의 극일'로 방향을 바꾸었다. 실제로 1925년 경성운동장(현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 개장되면서 조선체육협회가 창설한 조선신궁대회에 우리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일본 선수들과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체육회는 한편으로 각종 대회에서 일본을 이기기 위한 선수들의 질적 향상에 힘을 쏟으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체육회 내에 각종 종목을 담당하는 부서를 설치하며 하루가 다르게 행정체제를 잡아갔다.

조선체육회는 회장제로 시작해 1924년 위원장제를 채택했다가 1928년 다시 회장제로 환원해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고 개인과 단체를 모두 회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전국을 망라한 방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조선체육회의 산하단체는 아니지만 협조 조직체로는 조선야구심판협회(1923년), 조선정구협회(1925년), 조선농구협회(1925년 1년 뒤 해산), 조선씨름협회(1927년), 조선축구심판협회(1927년), 고려육상경기회(1928년), 조선농구협회(1931년), 조선농구심판협회(1931년), 조선수상경기회(1931년), 조선축구협회(1933년), 전조선아마추어권투연맹(1934년) 경성육상경기연맹(1934년) 등이 있었다.

조선체육회는 이와 같은 다양한 협조단체와 회원들의 확보로 각 종목들을 포용해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주최할 수 있었다. 조선체육회가 종합경기대회를 열면서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사고 예방이었고 페어플레이였다.

경기장에서의 사고는 총독부에게 어떤 꼬투리가 돼 불이익으로 돌아올지 몰랐다. 총독부 학무국에서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나는 경기종목에 대해서는 대회 자체를 몰수하겠다는 압박했다. 여기에 각종 대회에 조선인들이 몰리는 것도 마뜩찮아 했다. 체육을 통해 조선인들이 단합하는 모습을 보는 것 조차 일제는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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