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스포츠 100년](54)마라톤이야기⑮"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겠다', 서약받고 일본에 강제 유학 떠난 손기정

정태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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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12-15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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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광경, 2위 영국의 하퍼가 고개를 들고 있는 데 견주어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가운데)과 남승룡(앞쪽)은 고개를 숙인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
유럽에서 순회친선 경기 뒤 귀국길 올라
세계가 지켜 본 세기의 레이스는 끝났다. 10만을 가득 채운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은 그야말로 환호 일색이다. 마라톤 제왕 손기정에게 보내는 갈채는 그치지 않았다.

시상대에 서서 일장기가 게양되고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동안 손기정과 남승룡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시상식이 끝난 뒤 로열박스로 가서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는 손기정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축하를 건넸다. 손기정은 히틀러와 만난 그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 마주한 히틀러는 위풍이 당당했다. 깊이 눌러 쓴 군모 아래로 번쩍이는 눈빛을 숨기고 있었다. 커다란 코와 좁게 깍은 콧수염이 그의 날카로움을 더해 주는 것 같았다. 덥썩 나의 손을 쥐고 흔들며 마라톤 우승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통역 다무라의 입을 빌어 독일 국민들이 성원해 줘서 이겼다고 대답했다. 그는 호탕에게 웃었다. 1m60㎝의 내 키에 비해 그의 체구는 크고 우람했다, 특히 손은 크고 거칠어 억세었으며 독일 이끌어 가는 독재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졌다”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인 바이런(1788년~1824년)의 말처럼 손기정은 하루아침에 영웅으로 특별 대접을 받았다. 가는 곳마다 화제의 초점이 됐고 많은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올림픽 육상에서 최고의 영웅으로 손꼽히는 파보 누르미(핀란드)와도 만났고 베를린올림픽의 또 하나의 영웅 조시 오웬스도 만났다. 누르미는 핀란드에서 거액의 상금을 받았으므로 프로선수라는 이유로 참가를 못했지만 손기정은 누르미가 롤모델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사탕수수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조시 오웬스는 ‘검은 탄환’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미국이 낳은 불멸의 육상 영웅이다.

이렇게 잠시 독일에 머문 뒤 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 선수단은 여러 패로 나누어 유럽일부 국가에서 친선초청경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손기정은 무리한 때문인지 발목에 이상이 생겨 제대로 뛸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참가해야 했다. 덴마크를 거쳐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도 들렀다.

이즈음 일본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미묘한데다 일본 교육당국이 학생선수들을 빨리 귀국시켜 달라는 요청에 따라 나폴리에서 일본 상선을 타고 귀국했다. 그런데 이 배가 기관 고장을 일으켜 인도 봄베이에서 일주일을 머물렀고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의거를 처음으로 알았다.

상하이에서 교통대학 교수로 있는 신국권(일명 신기준)을 만나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의거에 대해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신기준은 1928년 연희전문학교 체육주임과 조선체육회 이사를 지냈고 1929년 봉천동북대학 체육교수, 1931년 교통대학 교수를 하면서 19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때 중국대표단 부단장으로 참가했으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자는 의미로 이름을 국권으로 바꾼 체육인이었다.

그리고 손기정 등 일행을 실은 배는 10월 6일 일본 나가사키 항에 입항했다. 이곳에서 일본은 그 많은 일본 선수들은 제쳐두고 손기정과 남승룡에게 “귀국하는 도중에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며 조사를 했다.


나가사키에서 고베를 거쳐 도쿄로 가는 곳마다 올림픽 개선환영행사가 이어졌지만 손기정과 남승룡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일본에서 열린 모든 행사에서 손기정은 일본말로 인사를 하도록 강요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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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가 타고 여의도에 내린 프로펠러 경비행기
초라한 개선

손기정과 남승룡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한 뒤 꼭 한 달째가 되는 10월 8일이었다. 일본에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급하게 달려온 담임선생 황욱과 함께 프로펠러 경비행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내렸다. 비행장에는 삼엄한 감시 속에 양정고보 안종원 교장, 서봉훈 교감, 조선일보의 고봉오 기자, 그리고 그의 형 손기만이 마중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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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을 하고도 환영인파없이 여의도에 내린 손기정 선수는 안종원 양정고보 교장(왼쪽)과 형 손기만씨의 영접을 받았다.[손기정기념재단 제공]
일제는 손기정의 환영행사를 일체 금했다. 손기정 환영회가 한민족의 민족 감정에 불을 붙여 반일시위나 독립운동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탓이었다. 말 그대로 초라한 개선이었다.

베를린 하늘에 일장기를 펄럭이게 한 금메달리스트, 그것도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개선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귀국길의 선상에서부터 일본에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신변보호라는 허울로 감시를 당했고 막상 고국에 도착해서도 그 상태는 변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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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은 여의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일제 형사들에 이끌려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 가서 승전보고를 해야 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하자 일제는 손기정을 데리고 가장 먼저 남산에 있는 조선신궁에 들러 승전 보고를 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일본 순사 두 명이 손기정의 팔짱을 끼고 가는 사진이 나와 한때 일본 순사들에 의해 손기정이 밧줄에 묶여 연행되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그의 귀국 행사는 2개월 뒤인 11월에야 조선일보 주최로 양정고보 관계자들이 중심이 돼 조촐하게 베풀어졌다. 조선체육회 윤치호 회장은 손기정의 우승을 기려 기념체육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거국적인 모금운동을 전개했으나 조선총독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손기정에 대한 일제의 감시는 끊이지 않았다. 손기정은 1937년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보성전문에 입학한 뒤 계속되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2학기에 정상희와 권태하의 보증으로 일본 메이지대학에 입학했다.

메이지대학 입학 조건은 “다시는 육상을 하지 않는다.” “조선학생들과 집단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두 가지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정태화 마니아타임즈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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