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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⓶스포츠 비화

2020-11-10 06:10

이건희는 왜 레슬링을 했을까.

사대부고시절 레슬링부 입부를 원하는 신입생을 상대로 선배들이 면접을 했다. 그때 이건희가 분명하게 대답했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당시 일본에선 프로레슬링이 흥행했다. 일본 프로레슬링의 주역인 한국인 역도산을 보면서 막연하게나마 동경했다. 학교에 들어오니 레슬링부가 있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⓶스포츠 비화


이병철씨는 아들의 레슬링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아들이 강하게 크기를 원했다. 몸이 튼튼해야 정신도 강해진다는 생각이었다. 격한 운동임에도 아들이 원하고 있어 반겼던 편이었다. 하지만 나중엔 못하게 했다. 훈련으로 아들 얼굴이 상처로 뒤덮이자 후일의 비즈니스를 위해 말렸다.

당시 레슬링매트는 천막 천으로 만들어 매우 거칠었다. 그라운드 상태에서 스파링을 하다보면 얼굴을 꺼칠꺼칠한 천 매트에 비비지 않을 수 없었다. 얼굴은 당연히 긁힌 상처 투성이였다. 레슬링 선수들은 얼굴, 특히 귀를 보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금방 안다.

요즘은 치료를 하지만 그 옛날엔 부어서 터지고 터진 데가 또 터져 반쪽밖에 남지 않은 귀를 훈장으로 여겼다. 양정모, 장창선, 한명우, 박장순 등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의 귀는 한결같이 쪼그라 든 상태이다.

레슬링인들이 다른 종목에 비해 위계질서가 엄격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운동은 봐서 모르지만 레슬링은 한눈에 선수를 했는지 안했는지 안다. 이건희 회장은 오래 하지 않아 신체적으로 비정상인 부분은 없다.

어머니는 어땠을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왜 그렇게 험한 운동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들의 뜻을 존중해 열심히 뒷바라지 했다. 도시락 2개는 기본이었고 틈틈이 레슬링부에 간식을 제공했다. 훗날 이건희가 레슬링협회 회장이 되고 서울올림픽 등에서 선수들에게 메달을 걸어주자 어머니는 감회어린 얼굴로 말했다.

“레슬링 한다고 도시락 2개 싸 가지고 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회장이 되어 메달도 걸어주고...”

사대부고 훈련장의 바나나,

“아니, 어떻게 바나나가 다 있어.”

어느 날 인근 학교 레슬링반 학생이 스파링을 위해 사대부고 훈련장에 들렀다. 그들은 깜짝 놀라 물었다. 말로만 듣던 바나나를 직접 보곤 너무 이상해서.

1960년대 바나나는 귀하디 귀한 과일이었다. 아버지가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집안에서도 월급날 어쩌다 구경할 정도였다. 바나나 한 개의 값이 돼지고기 한근 값에 육박했다. 그런 바나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응, 우리 레슬링부에 이병철 아들이 있어.”

왜 장창선을 전무이사로 발탁했나.

장창선이 196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이건희회장은 20대 중반이었다. 알게 모르게 레슬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협회를 맡기 전부터 장창선을 알고 있었다. 1982년 협회장으로 취임할 때 2~3명의 후보가 있었으나 직접 장창선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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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회장으로 초빙하는 역할을 한데다 당시 장창선 어머니의 양은냄비 제조 사업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결정했다. 이회장은 장창선전무를 가까이에 둔 편이었다. 뭐든지 솔직하게 대답하고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풀었기 때문이다. 가끔 답답할 때는 일부러 장전무를 불러 긴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박성인은 어떻게 스포츠단 단장이 되었는가.

‘스포츠계의 신사’ 박성인은 꼼꼼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어느 날 삼성 임원 사이에 하나의 회람이 돌았다. 이회장이 참고하라며 직접 돌렸다. 그 회람은 박성인의 깨알 같은 메모였다. 탁구대 모서리를 미리미터로 나누어 공이 어디에 어떻게 맞았을 때 어떤 방향으로 튀고 그럴 경우 어떻게 대응하는가를 적은 것이었다.

디테일을 강조하는 이회장의 성격에 딱 맞는 메모장이었다. 이회장은 그를 스포츠단 전체 단장에 앉혔고 이내 부사장으로 발령냈다. 스포츠단 사장 직함은 그 어느 회사에서도 없던 시절이었다. 박성인 단장은 이후 박세리를 후원하는 일, 테니스 세계랭킹 진입 프로젝트, IOC위원 추진 등을 착실하고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동구권 전훈은 두 마리 토끼.

이회장이 레슬링협회장은 맡은 1982년엔 동구권과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레슬링은 소련을 비롯 동구권이 강했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자면 일본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레슬링기술을 전수받아야 했다.

이회장은 삼성전자 TV등의 수출길 모색과 레슬링 실력 향상을 위해 동구권 전지훈련을 감행했다. 스포츠여서 상대적으로 진출이 용이했다. 헝가리 등지에서 전훈을 하는 한편 이벤트성 대회를 열어 참가자에게 부상으로 삼성TV를 주었다. 삼성TV는 금방 인기품목이 되었고 VIP들도 탐내는 물건이 되었다.

삼성의 혜택을 본 헝가리 등은 우리 선수들을 열심히 가르쳤고 국제심판들도 차례차례 친한파가 되었다. 헝가리가 앞서서 88서울올림픽 참가를 시사한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다.

국제레슬링계 실력자가 된 비결.

레슬링은 텃세가 심하고 판정 시비가 많은 종목이다. 레슬링 변방이었던 한국이 중심으로 가자면 그 벽을 뚫어야 했다. 그래야 심판판정으로 인해 손해 보는 일이 없었다. 이회장은 일단 국제경기에 자주 나갔고 그곳에서 안면을 익힌 국제레슬링계 실력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세계레슬링연맹의 엘세간회장이 비교적 이른 시간에 이회장의 초청에 응했다. 이회장은 그를 비롯 초청인사들을 신라호텔 VIP로 환대하는 한편 반드시 한번은 한남동 집으로 초청, 친밀감을 표시했다.

돌아갈 땐 부인을 위한 한복을 특별히 제작하여 선물했다. 남편을 따라왔던 부인들은 거의 대부분 휘황찬란한 한복의 색깔과 아름다움에 반해 ‘원더풀’을 외쳤다. 서울올림픽이 열릴 때 쯤 서울을 다녀가지 않은 거물이나 심판이 거의 없었다.

이들은 이건희회장이 어쩌다 경기장에 나타나면 한국선수들의 경기에 귀찮을 정도로 신경을 썼다. ‘프레지던트가 왔으니 메달을 선물해야한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어느 순간 대한민국 레슬링은 심판 때문에 지는 일이 없어졌다. 오히려 이익을 보는 나라 쪽에 들었다.

김운용은 이건희의 IOC위원 피선에 많은 역할을 했을까

이건희 회장의 IOC위원 피선은 자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건희 회장이나 삼성측이 많은 신경을 썼고 김운용위원에게 일정 부분 도움을 요청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운용위원은 삼성측이 원하는 만큼 적극적이지 않았다.

한나라에 두 명의 IOC위원, 그것도 실력있는 재벌회장과의 동행이 썩 내키지 않았을 터. 내일이면 총회가 열리는 날. 김위원에게 물었다.

“이건희회장이 이번엔 IOC위원이 될까요.”

“아직 결정된 게 없어요. 쉽지 않을 듯 해요”

“삼성에선 되는 것으로 알고 있던데요. 우리가 보기에도 될 것 같던데.”

두어시간 후 전화가 왔다.

“내가 애를 많이 썼어요. 아마 될겁니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급히 알아본 흔적이 역력했다.

북한의 장웅IOC위원과는 사이가 어땠을까.

북한의 장웅위원은 이건희회장과 IOC위원 동기다. 애틀랜타올림픽 때 같이 됐다. 비교적 자주 만난 사이다. 장웅위원은 ‘이건희회장이 인재를 중요시한다는 말을 들었다’며 ‘꽤 괜찮은 사람같다’고 했다. 돈 자랑도 별로 하지 않고 말이라도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다고 전했다.

장웅위원은 동계올림픽 유치 더반 총회 때 대한민국 평창에 한 표를 던졌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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