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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⓵ 스포츠 인연

2020-11-09 05:29

1982년 어느 봄날, 최혁수 레슬링협회 이사는 장창선을 급히 찾았다.

“지금 빨리 삼성그룹 비서실에 들어가 노석호과장을 만나라. 이건희를 우리 협회 회장으로 모시자. 전경환, 노태우등과도 대충 이야기는 끝냈다. 삼성도 원하는 것이니 약속만 받으면 된다.”

장창선은 바로 삼성으로 향했다. 전화를 받을 때 같이 있던 김익종과 함께였다.

“레슬링협회를 맡게 되면 우리가 정말 잘 하겠습니다. 사대부고 시절 레슬링을 했던 인연도 있고...”

이건희회장 왼쪽이 한명우, 오른쪽 김영남이고 오른쪽 끝이 김정상부회장.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장창선협회전무
이건희회장 왼쪽이 한명우, 오른쪽 김영남이고 오른쪽 끝이 김정상부회장.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장창선협회전무


대한민국 최초의 세계선수권자인 장창선의 말에 노석호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렇게 해보자고 했다.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간 터였다. 그도 이건희가 고등학생때 레슬링을 했다는 사실을 여기저기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건희는 일본 초등학교 시절부터 역도산 등의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많았다.

삼성도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정부는 재벌들에게 무조건 경기단체를 맡기기로 했다. 어렵게 유치한 올림픽에서 성적이 나쁘면 그 역시 좋을 게 없다는 판단이었고 경기력을 향상시키자면 넉넉하게 투자할 수 있는 재벌들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동아건설의 최원석회장은 탁구, 한국화약의 김승연회장은 복싱을 맡은 뒤였다.

정권실세인 노태우는 재벌과 아마추어 경기단체 짝짓기 책임자쯤 되었다. 현대는 정주영회장이 올림픽 유치에 앞장서고 대한체육회를 맡고 있어서 예외였지만 20대 대기업은 어떤 종목이든지 하나는 맡아야 하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경기단체를 책임져야 한다면 레슬링이 가장 적격이었다.

레슬링협회장 건은 이건희도 파악하고 있었다. 전경환, 노태우가 직,간접적으로 언질을 준 상태였다. 이건희의 대한레슬링협회장 모시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이건희는 1982년 3월 대한레슬링협회장에 취임했다.

ᷰ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이건희회장은 부회장에 김정상 신라호텔 부사장을 앉히고 삼성 출신의 유능한 인사를 협회 재무이사로 파견했다

. 그리고 협회를 이끌어 나갈 전무이사에 직접 장창선을 임명했다.

신임 이건희회장은 장창선 전무를 익히 알고 있었다. 후일 이회장은 장창선전무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선수출신답게 거짓말 하지 않고 아부하지 않는 점을 특히 좋아했다.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몇 명 되지 않는 사람중의 한명이었다.

ᷰ사대부고 레슬링부

이건희는 서울사대부고 시절 레슬링부에 들었다. 처음 그의 부모는 아들의 레슬링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격한 운동을 통해 몸도 단련하고 운동을 통해 정정당당한 스포츠맨십을 익힐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건희는 레슬링에 열심이었다. 거친 매트에 얼굴을 갈아가면서도 기량을 갈고 딲았다. 도시락 2개를 싸들고 수업 후엔 바로 레슬링장으로 향했다. 같이 스파링 하던 친구가 경기가 나가는 날에는 세컨을 보기도 했다.

신인선수권대회에 정식으로 출전, 실력을 검증받은 이건희는 1961년 서울에서 열린 제42회 전국체전에 서울대표로 출전했다. 자유형 페더급이었다. 입상은 하지 못했다. 삼성그룹에서 3위까지 한 것 같다고 했지만 그런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희는 계속 레슬링을 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밥상머리에서 아버지 이병철회장으로부터 혼이 난 후 그만두었다. 레슬링을 권장했던 아버지였지만 피멍이 든 얼굴의 아들을 본 후 더 이상 못하게 했다. 앞으로 큰 비즈니스를 할 텐데 그 얼굴로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까지 레슬링매트는 거친 천으로 만들어 몇 번 얼굴을 문지르면 금방 피멍이 들었다. 귀는 부어서 터지고 얼굴은 늘 핏줄이 터져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원하니 도시락을 두 개씩 싸주고 훈련장에 간식을 마련해주기도 했지만 상처를 안고사는 아들이 늘 안쓰러웠고 아버지는 뒷날을 걱정했다.

이건희의 레슬링은 1년여. 길지 않았지만 재벌가의 아들치고는 짧지도 않았다. 학창시절의 흥겨운 추억, 훗날 그 추억은 IOC위원으로까지 이어진다.

ᷰ무한투자

이건희회장은 레슬링의 올림픽 메달을 위해 거침없이 투자했다. 말이 된다싶으면 돈을 들이밀었다. 돈 씀씀이가 너무 커서 레슬링인들이 걱정할 정도였다. 1982년 첫 해 예산이 10억원이었다. 국가예산이 따로 있는 위에 10억여원. 레슬링인들은 그동안 돈 없어서 못한 일들을 하나하나 추진했다.

이회장은 또 선수연금을 두 배로 올렸다. 체육회는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경기력향상연금을 지급했다. 금메달 100만원, 은메달 50만원, 동메달 30만원 등이었다. 이회장은 똑같은 금액을 레슬링선수들에게 주었다.

이회장의 첫 목표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을 꺾는 일이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우리 선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게 일본 선수였다. 일본 선수들에게 배우다보니 막연한 두려움 증 같은 게 있었고 실제로 일본선수와 싸우면 80%이상 패했다.

일본보다 한수 위인 동구권으로 전지훈련을 갔고 동구권 지도자를 태릉선수촌으로 불러 우리선수들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구권과의 국교가 없었으나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헝가리 등은 대한민국 레슬링과 TV를 잘 만드는 삼성전자를 흔쾌히 불러들였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이건희의 레슬링 시험무대였다. 1984년 LA올림픽이 레슬링협회장으로서의 첫 나들이였고 유인탁과 삼성 소속의 김원기가 금메달을 목에 걸어 투자 효과를 봤지만 처음부터 철저하게 기획한 건 서울대회였다.

탈일본 4년의 결과물이 나왔다. 대성공이었다. 선수들은 더 이상 일본 선수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겼다. 금메달 9개, 은메달 2개, 동메달 5개 등 출전선수 20명중 16명이 메달을 목에 걸고 간단히 일본을 뛰어 넘었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백미였다. 김영남이 그레코로만형 레슬링으로 서울올림픽 첫 금메달을 획득했고 한명우가 머리 부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형 금메달을 따냈다. 그리고 김성문 등이 은메달 2개, 김상규 등이 동메달 5개를 목에 걸었다. 올림픽 메달 9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건희회장은 회장 임기동안 레슬링에 3백여억을 투입했다.

ᷰ IOC위원

레슬링은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도 계속 금메달을 이어 나갔다. 박장순, 안한봉, 심권호가 금맥을 캤다. 1982년부터 1997년까지 그의 회장 재직시절 획득한 금메달이 올림픽 7개, 아시안게임 29개, 세계선수권 4개 등 40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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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링강국 대한민국의 레슬링협회장 이건희는 어느새 국제 레슬링계 거물이 되어 있었다. 그가 대회장에 나타나면 심판들이 한국선수들의 성적을 다시 쳐다 볼 정도였다. 엘세강 국제레슬링연맹회장도 이건희회장에 대해선 각별했다.

레슬링을 뛰어넘어 국제스포츠계도 이건희를 주목했다. 올림픽 등 국제대회 메인 스폰서로서의 삼성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마란치 IOC위원장도 이건희회장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올림픽을 유치한 나라는 IOC위원을 두 명까지 보유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미 2명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치른 대한민국이기에 김운용 외에 또 한명의 IOC위원을 탄생시켜야 했다. 1순위 후보가 이건희회장이었고 이건희회장도 마음 깊이 두고 있었다.

김운용위원이 이건희 IOC위원 만들기에 앞장섰다. 그러나 도통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이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4년 후 애틀랜타올림픽도 마음 놓을 수 없었다. 김운용위원은 과연 또 한명의 대한민국 IOC위원 탄생을 좋아할까?

얼핏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희회장의 경우 IOC위원이 되어도 김위원의 영역을 침범할리 없었다. 그래도 영향력이 분산될 것이고 그래서 김운용으로선 썩 반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건희회장측은 더 이상 김운용에게 매달리지 않았다. 스스로 영향력을 키우며 조금씩 조금씩 IOC위원에 다가갔다. 그럴 능력도 충분했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총회, 이건희회장은 북한의 장웅과 함께 IOC위원에 뽑혔다.

ᷰ 평창동계올림픽

이건희는 IOC위원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김운용위원이 워낙 열심이어서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도 조용히 뒷길에서 IOC위원과의 교제를 넓혀 나갔다. IOC위원은 비즈니스에도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이건희IOC위원이 전면에 나선 건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전이었다. 이명박대통령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이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실패하는 등 이미 한차례 고배를 든 터여서 확실한 대책이 필요했다.

IOC 위원의 표심을 잡는 일. IOC위원 이건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회장은 2008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으로 재판 중이라 자격이 정지된 상태였다. 라이벌 도시인 뮌헨은 토마스 바흐 수석 부위원장(현 IOC 위원장)을 전면에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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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나라를 이길 수 있는 선택은 이건희 밖에 없었다. 동계올림픽 유치위가 이회장 사면 여론을 조성하고 나섰다. 이것저것을 고려한 언론도 동조했다. 2009년 12월, 대통령은 이건희 한 사람만 특별 사면복권 했다.

다시 힘을 찾은 이건희IOC위원은 평창의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온 힘을 다 쏟았다. 어차피해야 할 인데 특별사면까지 받은 터여서 더욱 열심이었다. 세계를 돌며 IOC위원을 한명 한명 만났다.

전 세계 곳곳에 나가있는 삼성맨들도 올림픽 유치에 뛰어 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재하는 나라의 IOC위원 동향을 살폈고 이건희회장이 찾아 올 경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을 따로 짰다. 삼성은 이들의 노력을 인사에 반영했다.

2003년 7월 2일 체코 프라하, 2007년 7월 5일 과테말라 IOC 총회에 이은 세 번째 도전. 첫판에 과반을 확보해야 두 번의 실패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었다. 2011년 7월 6일 남아공 더반, 1차 투표에서 평창의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를 결정지었다.

삼성과 삼성회장 이건희 그리고 이건희IOC위원이 나서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유치전이었다. 이건희는 그 순간 눈시울을 붉혔다. 특별사면까지 받으면서 유치에 성공한 올림픽. 복잡한 내면이 그렇게 눈물로 흘러내렸다.

이건희IOC위원은 평창유치의 ‘수훈갑’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95표중 65표를 얻은 1차 성공은 거의 힘들었을 것이다. 국제스포츠계 실력자로 후일 IOC위원장이 된 바흐의 뮌헨은 25표였다.

ᷰ프로야구 삼성과 기타

프로야구는 썩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 역시 전두환 군사정권의 거부할 수 없는 권유가 있었다. 그래도 이회장은 구단주로서 열심히 했고 그 어떤 구단주보다 야구에 대해 넓게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만해도 확실하게 1등주의자였던 이건희 구단주는 프로야구도 1등을 지향했다. 2군 육성을 통해 안정적으로 우승할 수 있는 명문구단을 계획했고 실력있는 유명 선수들을 스카웃, 늘 우승을 지향했다.

그러나 ‘야구, 마음대로 안 되듯’ 삼성은 그가 구단주로 실질적인 활동을 하고 있을 때엔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이회장은 그밖에도 삼성을 통해 스포츠에 투자했다.

1년에 1000억여원을 넣었다. 레슬링단과 프로 4종목은 당연한 것이었고 테니스, 탁구, 승마, 럭비 등 한창 때는 거의 모든 종목을 섭렵했다.

테니스는 국내대회보다 세계순위권 진입이 목표였다. 주원홍감독이 일선에서 이형택, 박성희를 지도했다. 삼성 테니스팀의 1호 격인 박성희가 세계 57위에 올랐고 이형택은 36위까지 진입했다. 삼성증권테니스팀은 세계랭킹 100위, 50위권내 진입에 파격적인 포상금을 걸었다.

1978년 일찌감치 탁구단을 창단했고 럭비와 승마에 대한 애착으로 팀을 만들었다. 세계화 가능성이 높은 박세리를 콕 찝어 발탁, ‘편안하게 운동만 할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US오픈 우승 등을 만들어 냈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40. 이건희의 추억] ⓵스포츠 인연 ⓶ 스포츠 비화 ⓷ 스포츠 비화 ⓸ 스포츠 말말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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