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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100년](45)마라톤 이야기⑥김은배·권태하의 마라톤 계보 이은 남승룡과 손기정

2020-11-06 14:59

동갑내기이지만 학년이 빨라 1년 선배가 된 남승룡(오른쪽)과 손기정의 양정고보 시절. 어깨동무를 한 모습이 정다워 보인다.
동갑내기이지만 학년이 빨라 1년 선배가 된 남승룡(오른쪽)과 손기정의 양정고보 시절. 어깨동무를 한 모습이 정다워 보인다.
남승룡과 손기정의 등장

김은배와 권태하가 마라톤에서 선두주자가 활약하는 동안 중·장거리에서 또 다른 마라톤 유망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바로 남승룡, 손기정, 유장춘이었다.

남승룡은 1912년 전남 순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동갑내기인 손기정은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구멍가게를 하던 손인석 슬하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남승룡은 19살이던 1931년 협성실업에 다니다가 양정고보 1학년에 편입했고 손기정은 20살에 양정고보에 입학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남승룡이 양정고보 1년 선배다. 유장춘은 아쉽게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손기정이나 남승룡보다 다소 나이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기정은 사실 김은배, 권태하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출전할 기회가 있었다. 단 마라톤이 아닌 중·장거리였다.

손기정은 양정고보 1학년인 1932년 3월 21일 제2회 경영(경성~영등포)왕복마라톤대회에 참가해 2위에 입상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손기정이 서울무대에서 낸 첫 기록이었다. 그리고 이해 5월 8일 일본인 단체인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조선 제1차 예선대회가 열렸다.

10000m에서 김은배가 1위, 손기정이 2위였고 5000m에서는 손기정이 조선최고기록을 세우며 우승했다. 마라톤에서는 권태하가 뽑혔다. 권태하, 김은배, 손기정으로 이루어진 장거리 3인방은 조선 1인자 자격으로 이해 5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제2차 예선에 출전했다. 사실상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의 일본 대표를 뽑는 최종 예선전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서 낸 기록대로 뛰어만 준다면 세 명 모두 일본 선수들을 압승할 가능성이 높았다.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출전에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라톤에서는 권태하, 김은배가 나란히 1, 2위를 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됐으나 손기정은 5000m와 10000m에서 모두 입상에 실패했다.

문제없이 1위를 할 것이라는 자만심이 낳은 결과였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패로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고 말았다.

남승룡은 2학년이던 1932년 10월 22일 제8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조선체육회, 고려육상경기회 공동주최) 5000m에서 16분55초2, 10000m에서 34분45초로 각각 우승했다. 바로 이때가 김은배의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 6위 입상으로 조선에 마라톤 붐이 불었던 시기였다.

유장춘은 1934년 5월 마닐라에서 열린 제10회 극동경기대회 10000m에서 32분45초5로 우승한 기록이 있다. 당시 유장춘은 용산 철도국 소속이었다.

이처럼 조선육상이 중·장거리에서 걸출한 재목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김은배 권태하의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출전에 이은 입상이 도화선이 됐지만 1924년 조선체육회가 창설한 전조선육상경기대회가 큰 계기가 되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와 함께 극동대회나 올림픽에 출전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조선체육협회가 주최하는 대회를 통해서만 가능한 점을 고려해 조선체육회에서도 조선체육협회 주최 대회에 조선 선수들의 참가를 종용한 덕분이기도 했다. 일본인들과 맞붙은 경기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극일의 정신도 한몫을 했다.

이렇게 중장거리에서는 우리 선수가, 단거리에서는 일본이 우위를 보이는 양극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남승룡과 손기정의 등장은 어쩌면 시대적 산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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