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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32. 프로복싱 첫 챔피언 김기수

2020-10-11 07:36

좋은 일은 함께 다닌다고 했던가. 장창선이 미국 토레도에서 세계 레슬링선수권대회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이 전해 진 5일 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우리나라 첫 프로복싱 챔피언이 탄생했다. 1966년 6월25일이었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32. 프로복싱 첫 챔피언 김기수


김기수는 복싱천재였다.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로 1958년 11월 제12회 전국선수권대회, 1959년 6월 제10회 전국학생선수권대회, 그 해 10월 제40회 전국체육대회, 11월에 제13회 전국선수권대회, 1960년 제17회 로마올림픽대회 파견 최종선발대회 우승까지 아마추어 7년 여간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

김기수의 아마추어 전 유일한 패배가 로마올림픽 2차전이었다. 그 1패(88전 87승1패)로 인해 김기수는 프로로 전향했지만 1패의 아픔을 안긴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 덕분에 대한민국 최초의 프로복싱 챔피언이 되었다.

김기수는 대한민국의 로마올림픽 메달 기대주였다. 금메달까지는 몰라도 최소 동메달은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 없게도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홈링의 벤베누티를 너무 일찍 마주쳤다. 열심히 싸웠지만 실력에 차이가 있었다.

벤베누티는 세계선수권자로 결승까지 거침없이 올랐고 결국 로마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올림픽을 마친 후 금메달 후광을 업고 프로에 데뷔, 무패전적을 이어가며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이 되었다.

김기수 역시 올림픽 후 프로에 뛰어들었다. 그는 기존의 프로 강자들을 차례로 꺽으며 세계정상을 향해 나아갔다. 그의 프로 제물이 된 선수는 이안사노, 강세철, 일본 와다나베 등으로 모두 한때 최강자로 군림했던 선수들. 하지만 그의 주먹 앞에선 7회를 넘기지 못했다.

타이틀전이 열린 장충체육관은 이 역사적인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관중들로 인산인해였다. 강자들을 KO로 넘기며 그곳까지 달려온 김기수에 대한 기대치도 매우 높았다. 귀빈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대한중석의 박태준사장이 앉아 있었다.

김기수는 대통령까지 보는 앞에서 이기기 위해 15회 마지막 순간까지 주먹에 힘을 가득 주었다. 밀고 밀리는 접전이었으나 김기수가 약간 우세했다.

김기수는 타이틀을 딴 이틀 뒤(6월 27일) 1시간 반 동안 코치, 매니저와 함께 오픈카를 타고 시가행진을 했다.

김기수는 네 차례 타이틀을 방어했다. 1966년 12월 헬링톤을 15회 판정으로 누르고 제1차 방어에 성공했으며 10월의 2차 방어전에서 미국의 프레드 리틀을 역시 15회 판정으로 꺽었다. 1968년 2월 알리파라에 12회 판정승, 4차 방어에 성공했으나 5월 이탈리아의 산드로 마징기에 패해 WBA주니어 미들급 타이틀을 내려놓았다.

세계 1등, 그것이 스포츠든 뭐든 당시로선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기수의 챔피언 등극은 보릿고개로 힘들어하던 이 땅의 수많은 서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 주었고 김기수의 뒤를 이으려는 사람들로 권투도장은 넘쳐나기 시작했다.

훗날 챔피언의 맥을 이은 유제두, 홍수환, 염동균, 김성준, 박찬희 등은 모두 김기수의 활약상을 보면서 복싱에 입문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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