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23. 프로레슬링 역사를 쓴 박치기의 제왕 김일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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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9-20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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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레슬링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기 프로스포츠였다. 김일의 프로레슬링이 열리는 날은 거리가 텅 빌 정도였다. TV가 많지 않았던 시절, 사람들은 동네 부자집 마당에 앉아 브라운관을 통해 통쾌무비의 레슬링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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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부자 집은 꽤나 까다로운 편이었으나 그날만은 TV를 마루에 옮겨놓고 동네 사람들, 특히 꼬마들이 마음 놓고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경기가 시작되면 마당은 시끌벅적했다. 한편에선 “김일의 박치기가 최고다”, “아니다 장영철의 모두발차기가 최고”라면서 입씨름을 벌이기도 했다.

김일은 역도산의 3대 제자 중 한명이었다. 일본식 링네임 오오키 긴타로(大木 金太郞)로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에 버금가는 인물이었다. 김일은 호남 씨름판을 휩쓸던 장사였다. 1929년 3월 전남 고흥 거금도 생으로 역도산과 일본 프로레슬링에 흥미를 갖게 돼 27살이던 1956년 무작정 밀항, 일본으로 갔다.

시모노세키에서 단속경관에 걸려 수개월 여 보호소에서 갇혀 지내다 귀국하게 된 김일은 역도산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혼신의 노력 끝에 결국 역도산 휘하에서 프로레슬링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59년 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 데뷔했다.

김일은 역도산의 코치를 받고 자신만의 특기인 박치기를 연마했다.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으면 스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역도산의 지론이었다. 김일은 이 박치기를 주무기로 1963년 WWA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이후 1980년 은퇴할 때까지 스무 차례나 방어전을 치뤘다.

박치기는 김일을 스타로 키운 그만의 특기였다. 하지만 박치기의 데미지가 쌓여 훗날 건강을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김일은 스승 역도산의 갑잡스러운 죽음, 한일국교정상화, 조국에서의 프로레슬링 흥행 등 여러 가지 이유로 1965년 영구 귀국을 결심했다. 박정희대통령은 김일의 팬으로 김일레슬링이 열리는 날이면 육영수여사와 함께 장충체육관을 직접 찾았다.

1965년 8월초 김일이 주측이 된 대회가 열렸다. 구름관중이라고 할 정도로 장충체육관은 인산인해였다. 동네 부자집 앞마당에 설치된 흑백TV앞에도 동네 사람들이 다 몰렸다. ‘극동 헤비급 선수권 쟁탈전’이라는 명칭하에 벌어진 이 대회는 한국 프로레슬링협회와 일본 프로레슬링 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했다.

한국 대표는 김일을 비롯 장영철, 천규덕 등 10여명이었다. 일본에서는 역도산의 제자 4명등 에이스급이 출전했다. 8월7일 열린 준결승전은 모두 한일전이었다. 김일은 길촌(吉村)을 2대1로 눌렀으나 천규덕은 일본의 요시노 사도에게 패배하였다.

11일 열린 결승전에서 김일은 초반 약세를 보이는척 하다가 막판 박치기를 작렬시키며 일본 선수를 물리치고 제1회 극동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대회는 완전 성공이었다. TV는 물론 신문에서도 이 경기를 대서특필했다.

호랑이에 삿갓과 곰방대가 그려진 가운을 입고 링에 등장하는 ‘한국대표’ 김일은 35년간 한국민을 괴롭혔던 일본의 거구들을 일거에 제압, 삶에 시달렸던 국민들에게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일본선수의 반칙으로 이마를 다친 김일은 선혈이 낭자한 가운데서도 막판 몰아치기로 승리를 따내 국민들을 더욱 열광시켰다.

당시 김일의 프로레슬링은 기. 승. 전. 박치기였다. 초반 수세였다가 공세로 돌아 쉽게 이기는가 싶을 때 일본레슬러가 쇠붙이로 김일의 이마를 그어 피를 흘리게 한다. 피를 본 관중들이 “일본놈 죽여라”고 아우성을 치면 체육관은 완전히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만다.

이때 김일이 분노에 찬 박치기를 가하면 상대는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관중들은 일시에 환호성을 터뜨리며 해피 앤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김일의 프로레슬링은 한국 무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김일의 등장으로 주연에서 조연으로 밀려난 장영철의 국내파들은 이런 추세가 못마땅했다. 그리고 그것이 ‘레슬링은 쇼’라는 파문으로 이어졌다.

1965년 11월 27일 장충체육관.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 대회 마지막 날, 장영철과 일본의 오쿠마가 열전을 벌였다. 1승1패 속에 3번째 판, 장영철의 우세가 점쳐진 경기였으나 장은 의외로 고전하고 있었다.

그때 오쿠마가 일명 새우꺾기 기술을 완벽하게 걸었고 이를 걱정한 장영철의 제자들이 한꺼번에 링 안으로 뛰어들어 오쿠마를 밀어제쳤다. 경기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고 경기 역시 바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오쿠마의 고소로 장영철과 링 난입의 레슬러들이 폭행치상죄 혐의로 연행되었다.

다음날 아침 조간신문은 경찰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장영철의 진술을 바탕으로 ‘프로 레슬링은 쇼’라고 보도했고 국민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장영철은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말을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지만 오해할만한 진술을 했고 국민들은 점차 프로레슬링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김일은 그 후로도 한동안 인기를 이어갔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더 이상 ‘민족의 한과 아픔을 달래주던 민족스포츠’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서서히 무대 뒤편으로 사라져 갔다. ‘쇼 사건’이후 프로레슬링이 인기가 전 같지 않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박정희대통령이 붐업을 위해 김일의 이름을 딴 전용경기장 건립을 추진했다.


10월 유신으로 독재의 벽을 단단히 쌓은 박정희로선 정치 외적인 새로운 이벤트가 필요했다.

박정희는 체육관 건립을 위한 특별 하사금을 마련했고 여기에 김일이 자신의 돈을 합해 1975년 서울 중구 정동에 레슬링 전용경기장격의 김일체육관을 마련했다.

체육관 개관을 전후로 김일의 프로레슬링은 다시 흥행 길을 걸었다. 김일은 역도산 문하에 함께 있었던 일본의 프로레슬링 간판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를 잘 활용하여 자신의 국내 프로레슬링 흥행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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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3월 부산과 서울에서 벌어진 김일과 이노키의 대결은 다시 한번 전국을 들끓게 했다. 김일은 이노키의 프로레슬링 데뷔전을 돕기도 했는데 이노키는 당시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선수로 비교적 깨끗하고 다양한 기술의 레슬링을 하고 있었다.

이노키는 1년 후 유도 세계챔피언 출신 윌리엄 루스카와 이종격투기 대결을 펼쳐 완승을 거둔 후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와의 실전 경기를 벌여 세계적인 격투기 선수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알리와의 대결은 결과적으로 실패였다.

룰 미팅의 실패이기도 했지만 이노키는 시종 누워서 경기를 했고 알리는 서서 헛 주먹만 날렸다. 이때 다시 한번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짜고 하지 않으니까 그 모양이라고들 했다.

김일은 1980년 5월 제주대회를 열었다. 서울에선 인기가 이미 하락한 터여서 흥행이 어려워 지방 대회를 자주 열었다. 지방은 그래도 나은 편이었고 모처럼 제주에서 열리는 것이라 공설운동장에는 수만명이 몰렸다.

5.18로 신군부의 계엄령이 내려졌던 때여서 대회 진행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구름 관중이 몰리는 바람에 군에서도 막을 수 없었다. 대회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그것이 김일의 마지막 무대였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프로레슬링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군부는 김일의 돈까지 들어가 있는 김일체육관까지 마뜩치 않게 여겨 문화체육관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문화체육관은 이후 복싱을 비롯 실내경기장으로 많이 활용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 마당놀이터로 바뀌었고 2000년대 초에는 맘마미아 등 문화 공연터로 다시 한번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2008년쯤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김일은 2018년 대한체육회 선정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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