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18. 태권도, 세계로 날다 - 9월 4일 태권도의 날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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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9-0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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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은 태권도의 날이다. 1994년 9월4일 IOC가 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것을 기념하기위해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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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 넘어 산이었던 올림픽

1986년 9월20일 수원 성균관대 체육관에서 아시안게임 사상 처음 태권도대회가 열렸다. 아시안게임 정식 종목이 됨으로써 아시아 각국이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 세계화의 초석이 다져졌다. 17개국에서 선수 84명, 임원 40명이 참가했다.

김운용 WTF총재는 1986년 10월 17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IOC위원으로 선임되었다. IOC위원이 된 김운용은 태권도의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1993년 5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프로그램 위원회는 태권도를 집행위원회 안건에서 빼버렸다. 새로운 종목이 올림픽 정식경기로 열리기 위해선 IOC총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그전에 IOC 프로그램위원회를 거쳐 집행위원회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프로그램위원회가 반대 11표, 찬성 9표로 부결, 1994년 9월 파리 IOC 총회를 바라볼 수도 없도록 만들었다. 올림픽 규정에 따르면 정식 종목은 올림픽 개최 6년 전에 결정해야 한다. 1996년은 이미 물 건너갔고 2000년 올림픽이라도 잡으려면 1994년 총회에서 반드시 승부를 내야 하는데 시작조차 못하게 되었으니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또 다른 난관은 일본, 중국 그리고 ITF였다. 일본은 가라테가 태권도보다 전통있는 무예임을 들어 태권도가 먼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가라테는 프랑스 등 유럽에서 상당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IOC를 상대로 소송을 걸겠다며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우슈의 세계화를 노리고 있던 중국도 막강한 영향력을 앞세워 방해공작을 했다. 그들은 IOC가 작은 올림픽을 지향하고 있는 터에 만약 태권도가 앞서서 올림픽 정식 종목이 먼저 되면 우슈 차례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이들보다 더 한 난적은 ITF였다. 평상시에도 집요하게 방해를 놓았던 ITF는 파리 총회에서 WTF의 태권도가 올림픽 정식종목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별도의 공작원까지 급파했다. 그리곤 ITF의 대표성을 내세우며 ‘최소한 두 단체가 통합되기 전에는 태권도를 올림픽에 넣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태권도의 올림픽화에 대한 예상들도 오락가락했다. 언론이나 관계자들도 하루는 태권도가 된다고 했다가 하루는 안 된다고 했고 어떤 언론은 유력하다고 전했고 또 다른 언론은 비관적이라고 보도했다.

IOC위원들 사이에서도 프로세서상 이번엔 불가능한 것으로 점치는 이가 있었지만 절차가 뭐가 중요하냐며 올림픽 개최지인 시드니가 긍정적이므로 뚜껑을 열어봐야 한다고 했다.

사방에 적군이 깔려있는 상황이었지만 김운용은 내심 자신했다. 사마란치IOC위원장이 내밀한 전언이 있었고 아주 우호적인 여론조사 결과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마란치는 총회 1개월 여전 김운용에게 “태권도와 트라이애슬론이 메달 종목으로 추가 될 수 있다. 시드니올림픽조직위원회도 환영한다는 입장이다”고 말했다.

사마란치는 김운용과 개인적, 조직적인 친밀관계가 있었지만 1982년 김운용의 초청으로 국기원을 방문, 태권도의 다양성을 익히 알고 있는 태권도 우호인사였다.

태권도와 트라이애슬론은 독일의 스포츠 인테른지의 여론조사에서도 정식종목 후보 1,2위를 기록했다. 이 여론조사는 IOC위원과 NOC위원장 및 사무총장 등 세계 스포츠를 주도하는 인사 100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 조사에 따르면 1등 종목은 50표를 얻은 육상, 체조, 수영이엇고 농구, 조정, 사이클, 배구가 49표에서 46표로 그 다음을 이었다. 트라이애슬르론은 13표로 24위, 태권도는 9표로 25위였지만 양궁, 골프, 야구보다 우위에 있었다.

김운용과 사마란치는 기습작전을 펼치기로 뜻을 모았다.

집행위원회 마지막 순서에 끼어 넣고 바로 총회에 상정, 채택시키기로 했다. IOC 집행위원들을 상대로 이미 설득작업을 한 뒤였고 집행위원들은 어차피 총회 안건인데다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결정하면 굳이 반대를 하지 않는 편이라 나름 자신 있었다.

‘이 안건’은 별다른 저항 없이 집행위원회를 통과, 이제 총회만을 남겨 놓았다. 마지막이 중요하지만 총회가 집행위원회의 뜻을 꺾은 적이 거의 없으므로 큰 고비는 넘은 셈이었다.

1994년 9월5일(한국시간) 파리 라데팡스.

김운용을 비롯 이강평 KOC 명예총무, 박상하 KOC국제위원장, 장주호 KOC 부위원장, 윤강로 차장, 한양순 KOC 상임이사 등이 총 출동, 작전을 펼치며 현장을 지켰다. 총회가 시작되고 마침내 태권도와 트라이애슬론의 시드니 올림픽 정식종목 채택 안건이 의제에 올랐다.

예상대로 ITF와 통합문제 등이 거론되었지만 사마란치가 집행위원회 결과를 이미 확정안처럼 발표한 뒤여서 문제가 될 정도의 소란은 없었다. 사마란치가 반대의사를 묻고 기권의사를 물었지만 의사표시를 하는 IOC위원은 없었다. 85-0, 만장일치였다.

국기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세계인의 스포츠가 된 것이었다.

금메달은 남녀 각각 3개씩 6개로 제한했다. 전통적인 격투기인 복싱이나 레슬링에 비하면 적지만 첫 출발치고는 적은 편이 아니었다.

사마란치는 당초 끼어 넣기 작업을 시작할 때 남녀 한 체급씩 2개를 제안했다가 반대하자 4개까지 올렸다. 사마란치는 ‘강행’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1964년 유도가 4개로 시작한 점이나 트라이애슬론이 남녀 각 1개씩인 점을 감안했다.

김운용은 일단 사마란치의 의견을 접수했으나 총회에선 1개씩 더 올려 총 6개의 금메달 안을 상정했다. 그리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앞두고 에선 시드니올림픽은조직위원회와 협상하여 남녀 각 4개씩 8개의 금메달을 태권도에 걸었다.

사마란치는 또 반드시 태권도를 집어넣기 위해 집행위원회에는 태권도가 메달종목이 되는 것은 일단 시드니 한 번이라고 못 박았다. 차후의 올림픽에선 그때의 사정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며 재량권을 주었다.

조건부 채택이 아무래도 유리하고 처음 통과가 어렵지 그 다음은 그리 어렵지 않음을 염두에 둔 나름의 속셈이었다. 사마란치나 김운용의 전략대로 태권도는 일단 시드니에서 선을 보인 후 올림픽에서 한 차례도 빠지지 않았다.

몇 차례 고비가 있긴 했다.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끝나자 태권도를 빼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2012년 런던 올림픽 종목 퇴출 여부를 결정한 2005년 싱가포르 총회에서 태권도는 턱걸이로 겨우 살아남았다. 겨우 두 표차였다.

수차례의 지적에도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태권도계는 대대적인 손질에 나섰다. 경기장을 8mx8m로 좁혔다.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공간을 최소화, 맞드잡이를 벌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논란이 되었던 전자 채점 방식을 개선하면서 비디오 판독제를 도입했다. 큰 기술 구사의 이점과 역전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회전 공격에 추가점을 부여했다. 몸공격 회전계는 2점, 머리공격 회전계는 4점을 주기로 했다.

한방에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큰 기술이 생기면서 태권도 경기는 보다 다이나믹해졌다. 실제로 올림픽 경기에서 막판 대역전극이 펼쳐지기도 했다. 재미의 요소를 가미한 2012년 런던 올림픽 태권도 경기는 그래서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2013년 IOC 총회는 태권도를 핵심종목으로 채택했다. 그로인해 WT는 구상하고 있던 ‘단체전 추가, 체급 확대 전략’을 차근차근 구사 할 수 있게 되었다.

원래 WT가 실시해 온 체급은 남녀 각 8체급. 세계선수권대회도 이 규정에 따라 진행하며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역시 8개의 금메달을 걸었다. 올림픽은 후발종목의 메달 수를 가급적 적게 하기위해 체급을 통폐합하여 남녀 각 4체급으로 줄였으며 국가별 쿼터제를 실시하여 하나의 국가에선 4개 체급 중 최고 2개 체급에만 출전하도록 제한했다.

국가별 쿼터제는 지키더라도 체급은 늘려 보다 많은 국가가 올림픽 메달을 가져갈 수 있게 하자는 것으로 유도가 그 같은 경로를 밟았다. 현재 유도의 금메달은 남녀 각 7개로 14개이다. 그러나 1964년 처음 실시할 때는 남자 4체급이 전부였다.

⏨국기 태권도

태권도는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무예에 바탕을 둔 현대적 무도이며 스포츠이다. 태권이라는 명칭은 택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택견 역시 일제강점기 시련을 맞았다. 택견이 우리 고유의 민속경기이면서 민족적 스포츠로서 발전할 수 있음을 간파한 일제가 조선민족의 문화말살 정책을 펴면서 탄압했다.

택견을 가라테라고 하며 가라테의 형을 보급시키며 택견을 없애려고 했다. 택견은 지하로 숨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의 얼이 담긴 택견은 일제의 강압에도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그 명맥을 유지하며 광복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미 일본풍의 무술들이 자리를 잡아버렸고 가라테라는 이름 대신 당수도, 공수도, 권격도 등의 이름으로 일반에 퍼져나갔다. 당수도장, 공수도장, 합기도장은 1970년대까지도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술도장 간판이었다.

광복이 되었음에도 범람하는 일본식 무술. 우리의 무술이 필요했다. 최홍희와 남태희 그리고 많은 무도인들의 노력으로 태권도가 탄생했다.

택견에 기반을 두었고 공수도 등에서도 일부 차용했다고 보아야 하지만 맨몸 무술이 흔히 그러하기 때문에 태권도가 엄청난 창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공수도 등의 아류는 결코 아니다. 태권도에 들어있는 정신 철학이 다르고 구사하는 기술 역시 발전적이면서도 사뭇 다르다.

태권도는 많은 맨 몸 무술의 장점을 살린 새로운 무도로 스포츠로서의 태권도가 되고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되어 세계화 될 수 있었던 것은 변화의 바람을 슬기롭게 받아 들인 덕분이다.

⏍ 태권도는 하나.

세계태권도연맹(WT)과 국제태권도연맹(ITF)이 있지만 본류는 같고 둘 다 대한태권도협회가 출발점이다. 국제기구로서는 ITF가 먼저다. 최홍희가 중심이 된 단체로 그가 캐나다로 떠나면서 대한민국과 멀어졌고 북한과 손을 잡았다.

ITF는 1966년 3월 9개국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당시 정권실세였던 김종필이 명예총재, 창립자인 최홍희가 총재를 맡았다. ITF는 1968년 홍콩에서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열었고 1971년에는 최홍희가 대사로 있던 말레이시아에서 제2회 대회를 개최했다.

대한태권도협회(KTA)는 1968년 8월 28일 가맹단체인 ITF를 제명시켰다. 국제적 분란을 야기 시킨 책임을 물은 것이었다. 최홍희는 1971년 8월 일선에서 물러났고 ITF 본부는 1972년 최홍희와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WT의 전신인 WTF는 1973년 5월 28일 역시 서울에서 창설되었다. 예정된 수순으로 WTF는 창립 바로 전날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19개국 대표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세계태권도연맹 창립총회는 김운용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만장일치로 초대 총재로 추대했다.

김운용은 태권도와 천생배필이었다. 그도 태권도를 통해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태권도도 그를 통해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다. 청와대 경호실 출신의 김운용은 태권도계에 자숙 바람을 일으킨 지도관의 이종우, 청도관의 엄운규, 무덕관의 홍종수 관장 등에 의해 1971년 1월 29일 제 7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지금까지 살아 온 길과는 전혀 달랐지만 해외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조국의 태권도 사범들이 일본의 가라테와 힘들게 경쟁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태권도를 운명처럼 받아 들였다. 김운용은 결과적으로 ‘최홍희 그 후’를 겨냥한 카드였고 그것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김운용은 태권도의 국기화(國技化)와 세계화를 첫 번째 실천사항으로 잡고 협회장 취임후 얼마 지나지 않은 그 해 태권도 국기화에 성공했으며 역시 그 해 11월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 기공식을 가졌다. 그리고 1972년 12월 9일 준공된 중앙도장은 1973년 2월 6일 ‘국기원’이라는 정식 명칭을 가지게 된다.

그 사이 태권도인들은 품새를 새롭게 정리했다. 천지형, 단군형으로 시작되었던 창헌류를 나름 정리하고 각 관별로 조금씩 다른 것들을 통일하기 위해서였다.

각 관에서 대표들이 참가하여 품새 제정위원회를 구성했고 여기서 팔괘품새와 유단자품새 17개를 만들었다. 팔괘품새는 곧 태극품새로 모두 태극의 팔괘에 기초한 것이었다. 장의 구분은 난이도에 따라 1장부터 8장까지 결정되었다.

태극 품새는 ITF를 내치면서 새롭게 선보인 것으로 ITF 품새의 저작권이 대한민국에 있으므로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다. ITF 태권도의 단계별 틀의 이름은 모두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다. 틀의 이름을 지을 때부터 강조한 것으로 태권도 유단자가 되면 대한민국 역사에 정통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

원래 20개의 ‘형’이었으나 북한으로 가면서 ‘형’이 ‘틀’이 되었고 ‘주체’ 등은 이름 자체가 바뀌었다. 주체는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호인 ‘고당’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육군태권도 교본에는 없던 의암, 연개, 문무, 서산 등 4개의 틀이 추가되었다.

⏍유급자 틀

10급 사주 찌르기. 기마자세 후의 간단한 첫 동작.

9급 천지(天地)틀. 천지인의 삼라만상에서 사람을 뺐다.

8급 단군(檀君)틀. 기원전 2333년 이 땅을 연 단군조선의 그 단군성조이다.

7급 도산(島山)틀. 조선독립운동가이며 선구자인 도산 안창호의 호.

6급 원효(元曉)틀. 686년 신라에 불교를 전수한 원효대사를 뜻함.

5급 율곡(栗谷)틀. 조선의 학자인 이이 이율곡. 급이 올라갈수록 점점 동작이 많아지는데 율곡의 38개 동작의 38은 율곡 탄생지의 위도이다.

4급 중근(重根)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대한국인 안중근의사. 32개 동작으로 32는 안의사가 1910년 여순감옥에서 순국할 때의 나이.

3급 퇴계(退溪)틀. 조선시대의 대학자 이황의 호. 37개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2급 화랑(花郞)틀. 신라시대 무예를 통해 호연지기를 키웠던 화랑도를 뜻한다.

1급 충무(忠武)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호. 이 틀이 왼주먹공격으로 끝나는 이유는 마지막 전쟁터에서 전사한 장군의 못다한 나라 사랑의 정신을 나타내기 위한 것.

⏍ 유단자 틀

1단-1 광개(廣開)틀. 우리 민족의 역사상 가장 광대한 땅을 차지한 고구려 제 19대왕이 광개토대왕을 뜻함. 39개 동작으로 39는 왕위에 오른 391년의 처음 두 숫자.

1단-2 포은(圃隱)틀. 고려의 마지막 충신 포은 정몽주를 뜻함. 충절을 지키다가 개성 선죽교에서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이방언(태종)에게 살해당했다.

1단-3 계백(階伯)틀. 백제의 마지막 명장으로 죽음으로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한 계백장군을 기리는 틀.

2단-1 의암(義菴)틀. 기미년 3.1운동을 이끈 의암 손병희의 호. 45개 동작이다.

2단-2 충장(忠壯)틀. 익호장군으로 유명했던 김덕령장군의 호. 충무틀처럼 왼손 동작으로 끝나는데 이 역시 장군이 27세에 모략으로 옥중에서 처형당한 미완을 뜻함.

2단-3 주체(主體)틀. 북으로 가면서 바뀌었다. 원래 틀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친 고당 조만식 선생의 호를 딴 ‘고당’이었다.

3단-1 삼일(三一)틀. 1919년에 3.1 독립운동의 3월 1일을 의미한다. 33개 동작으로 이루어졌다. 33은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의 조선민족대표를 뜻한다.

3단-2 유신(庾信)틀. 신라의 통일을 이룬 김유신장군의 유신. 준비자세에서 주먹을 오른 손이 아닌 왼손으로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외세(당나라)를 끌어들여 결과적으로 동족 전쟁이 된 것을 가르치려는 뜻.

3단-3 최영(崔瑩)틀. 고려말 최고의 무신으로 나라에 대한 충절과 애국심이 드높았던 최영장군을 기린 틀.

4단-1 연개(淵蓋)틀.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을 뜻함. 49개 동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49는 안시성싸움에서 당태종의 30만 군사를 물리친 649년의 마지막 두 숫자이다.

4단-2 을지(乙支)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을지. 612년에 수 양제가 이끌고 온 수나라 100만 대군을 살수에 수장시킨 살수대첩의 승장.

4단-3 문무(文武)틀. 신라 제 13대 왕인 문무대왕의 문무. 61개 동작으로 61은 그가 왕위에 오른 661년의 마지막 두 숫자.

5단-1 서산(西山)틀. 임진왜란 때 제자 사명당과 함께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서산대사. 그의 나이 72세 때로 그래서 서산틀은 72개 동작이다.

5단-2 세종(世宗)틀. 세종대왕의 세종. 24개 동작이다. 그 24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한글의 24개 자음, 모음이다.

6단 통일(統一)틀. 무술적으론 마지막 단계.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 민족의 꿈. 모든 군이 태권도를 이 단계까지 연마해 강군을 만들로 이를 통해 통일에 앞장서자는 뜻이 담겨있다.

WT가 새로 마련한 품새는 태극 8장 등으로 이루어졌다. 태극8장은 유급자의 단계이고 이를 마치면 단을 딸 수 있다. 유단자의 품새에는 고려, 금강, 태백, 평원, 십진, 지태, 천권, 한수, 일여가 있다.

태극은 1장부터 8장까지 있다. 유단자의 처음인 고려품새는 선비정신으로 우리 민족의 정중동 정신을 닮고자 했다. 태극8장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금강품새는 금강산에서 따왔다. 품새선도 산(山)자를 따라 이루어진다. 금강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기본적인 뜻도 여기에 포함된다.

태백품새는 한민족의 얼과 전통을 담고 있다. 단군 조선이 개국한 아사달의 성산인 밝은 산을 뜻하는 것으로 바로 민족의 상징인 백두산이다.

평원품새는 말 그대로 사방으로 넓게 펼쳐진 땅을 의미한다. 땅은 모든 생명체의 모체로 삶의 근원이다.

십진품새는 장생불사의 십장생에서 비롯되었다. 십장생은 해, 산, 물, 돌, 소나무, 구름, 불로초, 거북, 학, 사슴으로 십진사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품새선 역시 十자다.

지태품새는 사람이 땅을 밟고 하늘을 향해 서있는 모양세. 사람이 삶의 터전인 땅 위에서 두 발로 차고 뛰는 동작을 표현했다.

천권품새는 만물의 근본이며 우주 그 자체인 하늘을 지향하고 있다. 창조와 변화와 완성을 담고 있다. 한민족은 원래 하늘에서 내린 사람과 하늘의 뜻에 의한 사람, 그리고 하늘로부터 힘을 받은 사람과 하늘을 숭상하는 하늘사람이었다.

한수품새의 한수는 생명을 키워주는 큰 물을 뜻하다. 한수에서 한은 하나, 크다, 가운데, 가득하다 등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은 한방울로는 약하지만 큰물을 이룰 때 그 힘이 무섭다.

일여품새는 아홉 번째 마지막 품새로 원효대사 사상의 정수. 몸과 마음이 하나로 같고 원리는 오직 하나뿐이라는 철학적, 불교적 철학을 바탕에 깔고 있다. 점이나 선이나 원이 하나가 된다는 뜻. 그래서 품새선도 불교의 만(卍)이다. 일여는 정신과 육체가 하나됨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것을 상징한다. 득도이며 완성으로 그래서 태권도 유단자의 단계를 아홉에서 끝냈다. 9는 동양에선 최고의 숫자이며 가장 높고 깊은 숫자이다.

⏍ 국기(國技), 세계로 날다

전 세계가 공유하게 된 태권도. 올림픽이 거듭될수록 태권도 강국이 속속 나타났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2016년 리우올림픽까지 5개 올림픽에서 47개국이 144개의 메달을 나누어 가졌다. 메달이 각 40개씩 120개가 아니라 24개가 더 많은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부터 패자부활전의 승자에게도 동메달을 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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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금메달 1개 이상을 딴 나라는 19개국이다. 종주국인 대한민국이 12개로 단연 1위이고 중국이 7개로 2위이며 미국, 멕시코, 중화타이베이, 영국, 이란 등 5개국이 2개로 3위를 다투었다.

스페인, 터키, 그리스, 쿠바, 이탈리아. 오스트레일리아, 세르비아, 아제르바이잔, 코트디부아르, 아르헨티나, 요르단 등도 태권도 금메달 국가. 금메달은 모두 1개이고 은, 동메달 획득에서 순위 차이가 났다.

이들 국가 중 세르비아 등 몇 나라는 태권도가 아니었으면 올림픽 금메달을 구경하지도 못할 뻔 했다. 세르비아의 밀리차 만디치는 2012년 런던올림픽 태권도 여자 67kg급 이상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세르비아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그녀는 일약 세르비아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대한민국 태권도 홍보맨이 되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아흐마드 아부가우시도 조국 요르단에 올림픽 첫 금을 안겼다. 그의 결승 상대는 대한민국의 이대훈. 그래서 그의 금메달은 더욱 각광을 받았고 요르단에 태권도 붐을 일으키는 단초가 되었다.

코트디부아르의 국민들은 2016년 리우올림픽을 결코 잊지 못한다. 이전까지 올림픽 메달이라곤 은메달 달랑 1개였는데 2개의 메달을 이 한 대회에서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경기 종료 1초전 대역전극을 펼치며 금메달을 따내는 등 태권도에서만 남녀 선수가 금 1개, 동 1개의 메달을 수확했다.

남자 80kg 결승에 나선 셰이크 살라 시세는 은메달에 그치는 듯 했다. 남은 시간은 1초인데 지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마지만 순간 그는 영국의 루탈로 무하마드의 머리를 가격, 역전승을 일구어냈고 그것이 코트디부아르의 올림픽 첫 금이었다. 여자 67kg급 뤼트 그바그비의 동메달도 코트디부아르의 여성 첫 올림픽메달이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선 아프가니스탄의 로훌라 닉파이가 조국에 올림픽 첫 동메달을 안겼고 2016년 리우올림픽에선 이란의 키미아 알리자데가 57kg급 동메달로 이란 역사상 첫 여성 메달을 만들었다. 도미니카와 니제르는 오직 태권도에서만 메달을 따봤다.

올림픽 메달을 모으면서 많은 국가들이 태권도를 주요 메달 종목으로 육성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대륙별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강국들로 북미의 미국과 멕시코,

유럽의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아프리카의 가봉, 중동의 터키, 이란동남아의 태국, 필리핀, 베트남, 남미의 브라질과 콜롬비아 등이다. 동북아시아는 태권도의 주류. 종주국인 대한민국은 당연하지만 중국, 대만, 일본 등 모두 태권도 강국이다.

⏍ 올림픽의 태권도 스타들

올림픽은 과연 달랐다. 종주국의 잇점을 양보하며 자리를 내주자 단숨에 열강의 무대가 되었다. 태권도가 처음 치러진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만 해도 이변은 없었다. 남자 8개체급에 8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7체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세계태권도연맹 가입국가 208개국, 전 세계 수학인구 5천여만명에 이르자 태권도는 더 이상 대한민국만의 태권도가 아니었다.

태권도의 올림픽 첫 무대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한민국은 남자 68kg에 신준식, 80kg 이상급에 김경훈, 여자 57kg급에 정재은, 67kg급에 이선희 등 4체급에 국가대표를 파견했다. 동급 최강의 멤버들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약세를 보인 남자 58kg급 등 4곳엔 쿼터제가 있어 포기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대표중의 대표였다. 예상되는 4개의 금메달. 하지만 한 개는 나가 떨어졌다. 남자 68kg급의 신준식이 결승에서 미국의 스티븐 로페스에게 패해 은메달에 머물렀다. 김경훈은 호주, 정재은은 베트남, 이선희는 노르웨이 선수를 꺾고 무난히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4년후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선 금메달 2개로 반타작했다. 멀지않은 곳에서 열린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선 출전 선수 4명이 모두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나 전관왕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2012년 런던올림픽과 2016년 리우올림픽에선 남자는 노골드의 수모를 당했다. 여자 선수들이 금맥을 유지한 덕분에 런던은 금메달 1개, 리우는 금메달 2개였다.

정재은은 갓 스물에 대한민국의 올림픽 태권도 첫 금메달리스트로 이름을 올렸다.

올림픽이 정식 종목으로 처음 치러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당시 한국체대 학생이었던 정재은은 결승서 베트남의 트란 휴 난을 받아차기와 몸통차기로 물리쳤다. 정재은에겐 사실 하미드 빅신과의 준결승전이 더 어려웠다. 하미드는 95년 세계선수권자로 테크닉이 뛰어났다. 정재은은 그를 3-2판정으로 눌렀다.

올림픽 태권도 남자 첫 금메달리스트인 김경훈은 올림픽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케이스. 하늘이 점지하지 않았다면 그의 올림픽 금은 언감생심이었다. 김경훈은 올림픽 해에 체급을 웰터급에서 헤비급으로 올렸다.

웰터급 성적은 1995년 아시아선수권대회, 1996년 월드컵 우승등으로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 체급을 올린 이유가 올림픽을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새로운 체급인 80㎏이상급에는 한국태권도의 간판스타이자 최고참인 김제경이 버티고 있었다.

김제경은 비록 시범종목이었지만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로 1993년, 1995년, 1997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석권한 세계선수권대회 3연패자였다. 김제경은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과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도 2개 대회 연속 금메달을 획득한 그랜드슬러머이기도 했다.

국내에서 국가대표가 쉽게 바뀌는 치열한 종목중의 대표급인 태권도에서 거의 10여년 태극마크를 달고 수십 여 차례 우승 기록을 세운 김제경이 마지막 무대로 선택한 것이 시드니올림픽이었고 이미 국가대표 자격을 획득했다.

하지만 김제경은 고질적인 허벅지 부상이 재발, 꿈에 그렸던 올림픽출전을 포기했다. 김제경은 “부상으로 완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올림픽에 나서는 것 보다는 후배들에게 금메달 기회를 주는 게 낫다”며 올림픽 출전권을 내놓았다.

김제경의 몸 상태와 의사를 살핀 협회는 결국 태릉선수촌에서 시드니올림픽 태권도 80㎏이상급 대표 재선발전을 열었고 4월의 최종선발전에서 2위를 했던 문대성과 3위를 했던 김경훈을 출전시켰다. 둘 간의 경기로 치룬 재선발전에서 김경훈은 문대성을 3-2 판정으로 제치고 태권도 첫 올림픽의 대한민국 대표 출전권을 따냈다.

참으로 흔치않은 경우였다. 1위 선수가 부상을 입은 것, 그 때문에 재선발전을 하게 된 것, 그리고 몇 개월만의 경기에서 앞서있던 선수를 따라 잡은 것, 체급 월반 불과 수개월만에 내부경쟁이 극심한 태권도에서 대표가 된 것 등이 모두 이례적이었다.

체급을 막 올린데다 80㎏이상급 국제무대 수상경력이 없는 김경훈. 그래서 협회 등 관계자들은 올림픽 출전 4체급 모두 우승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결국 협회의 우려대로 4체급은 모두 먹지 못했으나 우려했던 김경훈은 큰 어려움 없이 올림픽 태권도 대한민국 남자 첫 금메달리스트의 주인공이 되었다.

문대성은 시드니의 아쉬움을 아테네의 금메달로 말끔하게 씻었다. 문대성은 2000년대 이후의 태권도 선수 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선수이다.

우선은 아테네 올림픽에서 그의 뒤후려차기가 화려하게 터졌기 때문이었다. 첫 올림픽을 1점차로 아깝게 놓쳤지만 문대성은 김제경을 잇는 헤비급의 강자였다. 190cm의 큰 키로 고교시절부터 80kg 이상의 헤비급에서 뛰었다.

1994년 4월 88체육관에서 열린 용인대총장기 전국남.녀고교대회 통합헤비급에서 1위를 한 후 늘 헤비급 정상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2개월후의 제21회 한국중고연맹회장기대회에선 준우승했지만 1995년 제22회 전국대학개인대회에선 다시 우승했다.

1996년 한국대표선수최종선발대회 우승, 1996년 제4회 세계대학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 등 대학대회에선 단골우승자였지만 국가대표를 뽑는 최종선발전에선 김제경의 벽을 넘지 못했다. 그러다 1999년 캐나다 에드먼튼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처음 마지막 문턱을 넘으면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곤 2000년 홍콩 아시아선수권대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프랑스 파리 세계대회를 차례로 석권하면서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에 나섰다. 아테네 올림픽은 사실 거칠게 없었다. 국가대표 선발전부터 정상까지 적수가 없었다. 오히려 라이벌들이 그의 유명세에 기름칠을 해준 편이었다.

문대성은 재미없다는 태권도를 시원한 KO쇼로 마무리했다. 그리스의 202cm 거구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가 덤벼들자 일정 거리를 둔 후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턱에 제대로 맞은 니콜라이디스는 동공이 풀린 채 주저앉았고 경기는 그대로 끝났다.

통쾌한 금메달 이벤트로 아테네 최고의 스타였던 문대성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선수중에서 뽑는 IOC 위원에 뽑히고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등 화려한 행보를 보였으나 개인적인 문제가 겹쳐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유일의 태권도 금메달인 57kg급 장지원도 2000년 시드니 국가대표선발전에서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선발전에서 장지원은 시드니 금메달인 정재은과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경기를 펼쳤다.

하지만 국제대회 경험을 우선시 한 코칭스탭의 판단에 따라 정재은에게 태극마크를 내주고 말았다. 2000년의 한을 선수권대회 우승, 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닦은 장지원은 아테네에서 기어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장지원은 그렇게 올림픽을 마무리했지만 ‘태권여제’ 황경선은 그제사 올림픽을 시작했다. 황경선은 고교생 국가대표. 층층시하의 태권도를 감안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파란을 일으킨 황경선의 올림픽 첫 도전은 그러나 동메달로 끝났다.

훗날의 결과를 보면 아쉬울 게 없는 커다란 시작이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은 물론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금메달을 획득, 올림픽 2연패에 성공했다. 올림픽 2연패는 황경선이 처음이었다. 황은 세 번의 올림픽에서 금메달 2개, 동메달 1개를 따냈는데 아마도 그의 기록을 깨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황경선의 베이징 금메달은 부상의 어려움을 딛고 딴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컸다. 8강전 부상으로 황경선은 4강전부터 70%도 안되는 컨디션을 가지고 고통을 정신적으로 다스리는 ‘두뇌 태권도’로 금메달을 만들어냈다. 진통주사를 세 차례나 맞으면서 단 한번의 공격을 살려 4강 고비를 넘고 금 무대에 올랐다.

황경선은 첫 올림픽인 2004년부터 마지막 올림픽인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오직 67㎏급에서만 뛰었다. 체급종목에선 매우 힘든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 절로 몸이 달라지고 체중이 늘기 때문에 10년이면 보통 한 체급은 올리고 신장만 따라주면 많은 경우 2체급에서 3체급까지 올린다.

차동민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이 시작이었다. 베이징의 금메달을 시작으로 2012년 런던올림픽, 2016년 리우데자네이로올림픽까지 연이어 세차례 올림픽에 출전했다. 선수층이 두터운 남자 태권도에선 올림픽 3회 출전은 그가 유일무이하다.

차동민의 첫 금메달 제물은 문대성을 스타로 발돋음시킨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니콜라이디스였다. 두 번째 올림픽 결승에서 금메달을 노렸던 니콜라이디스는 차동민에게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차동민의 이 금메달은 대한민국 태권도의 올림픽 전관왕(4명 출전, 4명 우승)기록을 가능케 한 마지막 금메달이었다.

대진운이 따르지않았던 차동민은 2012 런던 올림픽에선 8강에서 무너졌고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선 부전승 후의 첫판에서 패했다. 하지만 리우에서는 패자부활전을 통해 회생한 후 동메달 결정전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드미트리 쇼킨을 연장접전 끝에 물리쳐 동메달을 획득했다.

베이징올림픽에선 남자 68kg의 손태진과 여자 57kg급의 임수정 역시 금메달을 따냈다. 손태진은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최연소선수로 결승에서 종료 2초전 득점으로 멕시코의 마르코페즈를 누르고 우승했다.

손태진은 올림픽 후 한동안 좋지 않았다. 2011년쯤 다시 기지개를 켰으나 대한민국이 남자 68kg급을 런던올림픽 출전체급으로 정하지 않아 더 이상 올림픽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임수정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때 이미 아시아 주니어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여자 51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이후 한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러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다시 일어서 5년여의 부진을 털어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여자 57kg급 금메달리스트인 임수정은 이듬 해 열린 2009년 코펜하겐 세계 선수권 대회 62kg급에서도 우승했다.

김소희(1994년생)의 리우올림픽 금메달은 쉬워 보이진 않았다. 2011년 경주 세계선수권대회, 2013년 푸에블라 세계선수권대회,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로 정상권 선수임엔 틀림없었지만 문제는 체급이었다.

그의 주 체급은 -46kg급이었다. 앞서의 금메달들도 모두 그 체급이었다. 하지만 올림픽은 체급조정으로 인해 -46kg급이 없었다. -49kg급이 가장 가까운 체급이었다. 그런 연유로 김소희의 올림픽 전 -49kg급 세계랭킹은 7위. 올림픽에 턱걸이로 출전한 실력이었다.

하지만 2015년 모스크바 월드 그랑프리 시리즈 -49kg급 우승으로 기량을 다듬은 김소희는 결승에서 세르비아의 티야나 보그다노비치를 7-6으로 꺾고 리우올림픽 태권도 첫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오혜리는 리우올림픽에서 비로소 활짝 피었다.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그의 나이는 28세 4개월. 올림픽 태권도 최고령 여자 금메달이며 대한민국 태권도 최고령 금메달이었다. 갓 스물을 넘기면서 시작된 오혜리의 올림픽 도전은 리우가 세 번째였다. 2008년 베이징은 2년 위인 황경선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고 2012년 런던은 부상으로 꿈을 접어야했다.

황경선이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세 번째 도전에서 겨우 리우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보통의 선수라면 은퇴를 고려하는 나이였지만 오혜리는 한이 깊어 그럴 수 없었다. 각오는 대단했지만 올림픽 금은 자신할 수 없었다.

그가 출전권을 잡은 -67kg급은 사실 그녀의 주무대가 아니었다. 그의 평소 무대는 -73kg급이었다. 2011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을 딸때도 -73kg급이었고 2015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때 역시 -73kg급이었다.

성인무대에 오른 거의 10여년간 오혜리는 올림픽을 제외한 모든 국제대회에서 -73kg급에서 뛰었다. 올림픽의 -67kg급은 그래서 지독한 감량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했던 것으로 서른 즈음의 여자선수에게 그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계랭킹 6위의 오혜리는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을 다 이겨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올림픽 결승무대에서 세계랭킹 1위인 프랑스의 하비 니아레를 13-12로 누르고 역전 금메달을 만들어 냈다.

⏍ 북한의 태권도 영웅들

북한은 1970년대 말 최홍희를 통해 태권도를 접하자마자 적극적으로 이를 수용했다. 국제조직인 ITF와 남쪽을 떠나 북쪽에 관심을 보이는 최홍희에게도 매우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며 그를 평양으로 초대했고 사후에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하며 특별 대접 했다.

최홍희는 그러나 태권도에 정치색이나 체제의 틀을 입히지는 않았다. 굳이 북한을 선택한 것은 그의 태권도를 세계화하는 데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북한에 사범을 보내던 1970년대 말은 남북이 그야말로 첨예하게 맞붙었던 시절이었다.

북한은 자신이 마지못해 떠난 후 새롭게 조직을 구성한 후 빠르게 세계무대를 장악해 들어가고 있던 남한 WTF엔 최상의 대항마였다.

금단의 땅 북한. 그런 북쪽에 자유롭게 왕래하는 최홍희라는 존재는 우리나라에선 다루어선 안 되는 금기어가 되었고 당연히 그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북에 넘어가지는 않았다. 함경북도 명천군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죽을 때 까지 북한 국적을 가지지 않고 망명국인 캐나다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은 그러므로 태권도 종주국이 아니다. 태권도 수입국인 셈 이다. 그러나 남에서 넘어왔지만 태권도를 가지고 온 사람이 남을 떠난 사람이기에 주저 없이 자기 소유화했고 결국 ITF를 장악, 지금에 이르렀다.

북한은 태권도를 ‘민족의 전통무도’로 대접하고 있다. 그리고 일찍부터 태권도의 생활화를 통해 태권도를 키워왔다. ITF가 주도하는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 2년에 한 번씩 개최되어 왔는데 종합우승은 늘 북한이 차지했다.

2011년 ITF는 평양에서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열었다. 80여개국에서 8백여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평양대회는 최홍희 사후 처음으로 19년 만에 개최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1992년 ITF주최 제8차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를 평양에서 열었다.

북한은 평양시 청춘거리 태권도 전당에서 열린 제 17차 태권도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19개, 은메달 3개, 동메달 3개로 역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북한이 20여차례의 ITF 세계대회에서 종합우승을 놓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위 러시아의 금메달은 5개에 불과했다.

대회 최우수선수상도 북한의 리명진과 리향이 받았다.

리명진과 리향은 2년 후 불가리아에 열린 2013년 제18차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민체육인인 리명진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표창장을 받았다. 평양시 태권도선수단 선수 리향은 카자흐스탄 아시아선수권대회 여자호신 및 개인맞서기 69㎏급 우승자인 신정화와 함께 인민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함경남도 태권도선수단 소속의 한일광은 김일성청년영예상을 받았고 림위석등 6명은 공훈체육인 칭호를 받았다. 북한은 이 대회에서도 종합우승했는데 우승컵이 4개였고 금메달이 21개나 되었다. 은메달(4개)과 동메달(3개)은 대접받기도 힘든 정도이다.

북한은 2015년 제19차 태권도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1위를 했다. 81개국 370여명의 선수가 출전했으나 북한은 품세, 대련, 호신경기등을 흽쓸며 16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았다. 2위인 우크라이나는 금메달 7개, 3위인 러시아는 금메달 3개였다. 대회 남녀 최우수선수에도 늘 그렇듯 최성일, 리은향 등 북한 선수들이 선정되었다.

북한은 2017년 대회도 종합우승하는 등 40여년 변함없이 위력을 떨치고 있다. 그것은 청소년대회나 아시아 선수권대회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태권도 청소년은 제7차 청소년 태권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 19개,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를 따냈는데 1차에서 6차까지의 성적이나 8차 이후 대회의 성적 역시 ‘국가별 종합1위 금메달 최다’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장웅이 주도한 ITF 주관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ITF 주관 카자흐스탄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엔 17개국, 4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했으나 북한은 금메달 24개, 은메달 2개, 동메달 6개로 대회를 휩쓸었다.

이 대회에서 2개 이상의 금메달을 획득한 리철옥과 신정화는 그해 말 북한의 조선태권도위원회가 뽑은 ‘올해의 태권도 최우수 선수’로 뽑혔다. 리철옥은 여자 개인틀과 맞서기 75㎏이상급 경기에서, 신정화는 여자 호신과 개인맞서기 69㎏급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북한의 태권도를 관리하고 있는 조선태권도위 원회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올해의 최우수 선수’를 선정, 발표한다.

2003년 10월 제주도에서 열린 민족통일평화체육문화축전에 로성희와 함께 방문한 부성민 역시 몇차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인물. 부성민은 2004년 호주 제14차 세계대회를 제패하면서 대회 3연패를 달성한 2천년 대 북한 태권도계의 간판으로 그해 인민체육인인 로성희, 장금숙과 공훈체육인 사옥진, 김금철 등과 함께 10대 최우수선수로 선정되었다.

북한 태권도가 이처럼 청소년대회, 아시아대회, 세계대회를 휩쓸다보니 그에따라 인민체육인 등 체육공훈자도 우후죽순격으로 늘고 있다. 종목별 인민체육인 숫자를 살펴보면 당연 최다로 세계대회 금메달보다 국가대표선발전이 오히려 더 치열할 정도이다.

일단 태권도 대표선수로 뽑히기만 하면 부와 명예가 따라붙는 인민체육인이 보장되므로 북한의 태권도선수는 모든 어린이들의 우상이다.

북한은 그래서 각 도에 태권도선수단을 두고 전문 선수를 키우는 한편 생활체육화도 기하고 있다. 북한의 한 언론은 “태권도를 장려해야 역사적으로 슬기와 용맹을 떨쳐온 조선민족의 억센 기상과 넋을 대를 이어 빛내어 나갈 수 있다. 학생들을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노동과 국방에 튼튼히 준비시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태권도 보급에 나섰다. 최홍희의 ITF가 북한에 들어선 직후부터 바로 시작한 셈이다. 북한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과정에 태권도를 넣었으며 각 도에 태권도 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북한은 또 태권도의 과학화를 위해 일찍부터 연구하기 시작했고 1996년 아예 별도의 독립기구인 태권도과학연구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태권도 동작을 집대성하는 한편 태권도를 일반태권도와 전문태권도로 이원화해 연구를 했다.

일반 부문은 누구나 손쉽게 익히고 건강을 살피는 태권도의 생활화가 목표이다. 연령별로 난이도와 동작을 구분하여 만든 소년태권도, 청년태권도, 노인태권도 등이 그것으로 북한은 ‘건강 태권도’라는 이름으로 이를 전국가적으로 보급하고 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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