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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손자병법] 37. 박경완의 현두자고(縣頭刺股)

2020-08-25 07:18

-머리를 매달고 넓적다리를 찌른다. 한나라 손경은 졸음을 막기 위해 머리에 끈을 묶어 천장 대들보에 매달았고 전국시대 때 소진은 공부하다 졸리면 송곳으로 자신의 넓적다리를 찔렀다.

[프로야구 손자병법] 37. 박경완의 현두자고(縣頭刺股)


참담했다.

고교 시절 단짝은 특별대우를 받고 프로에 진출하는데 자신은 연습생이라니. 일찌감치 그만 두고 다른 길을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그만두기엔 너무 억울했다.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해온 야구인데.

1991년 프로야구 쌍방울.

전주고를 막 졸업한 배터리 김원형과 박경완이 나란히 입단했다. 함께 유니폼을 입었지만 두 신입의 입단 성격은 전혀 달랐다. 투수 김원형은 특별대우를 받았다. 구단은 대학에 가겠다는 그를 잡기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고 적지 않은 계약금을 제시했다.

그러나 고교 3년간 김원형의 공을 받았던 포수 박경완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딱히 갈 곳이 없었던 박경완은 계약금 없어도 괜찮다며 구단에 매달렸다. 다행히 친구 김원형이 쌍방울 입단을 결정한 덕분에 연습생으로나마 프로 물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입단 해봤자였다. 그가 설 자리는 없었다. 김원형이 선발투수로 잘 나가고 있을 때 그는 2군에서도 ‘물주전자 당번’이었다. 그래도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원형이 선발 등판할 때마다 박경완을 원하는 덕분에 시즌 말 10경기 정도 포수 석에 않을 수 있었다.

죽마고우 김원형이 있어 앉을 수 있었던 포수 석. 91년부터 93년까지 3년간 67경기 출장이 전부였지만 그게 훌륭한 밑천이었다. 빅경완은 경기에 나서면서 조금씩 경험을 쌓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불철주야 훈련에 매달렸다.

서부시절 카우보이들이 총 빨리 뽑기 연습하듯 글러브에서 공을 빨리 빼는 훈련을 별도로 했고 정확한 2루 송구를 위해 어깨를 담금질했다. 벤치에 앉아있을 때도 가만있지 않았다. 다른 팀 타자들의 타격 습관이나 약점 등을 파악, 주전 포수가 될 때를 대비했다.

박경완은 그렇게 언제 찾아올지도 모를 기회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다. 엄청난 양의 훈련, 도통 늘 것 같지 않던 실력이 몰라보게 늘었다. 입단 4년째인 94년, 102경기에 나섰고 96년에는 126 전 경기에 출장, 마스크를 썼다.

중간에 고비가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거뜬히 넘겼다. 96년 6월 구단은 포수를 강화하기 위해 최해식을 내주고 백전노장인 해태 장채근을 데려왔다. 밀릴 것이라고 여겼던 싸움. 하지만 결과는 박경완의 승리였다. 장채근이 오히려 후보로 밀려났다.

‘현두자고’ 끝에 대기만성한 박경완.

그는 그 해 프로야구 대표 포수 중 한명으로 한일 슈퍼게임에 출전했다. 일본에 가기 전 LG 김동수보다 나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었으나 큰 경기 경험이 없었던 탓인지 다소 주눅 든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 이미 박경완은 수준급 포수의 경지에 올라 있었고 그런 박경완을 현대는 98년 사상 최고액의 트레이드머니를 들여 포섭했다.

박경완의 성공시대. 포수 실력을 인정받자 방망이도 달라졌다. 91년 첫 해 단 1개의 안타도 치지 못했고 초반 3년간 3개의 홈런이 고작이었으나 2000년 시즌 연타석 홈런 신기록을 세웠다. 국내 프로야구 19년간 처음인 4연타석 홈런이었다.

홈런은 단발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의 힘 찬 방망이는 계속 홈런을 쏘아 올렸고 누구보다 먼저 시즌 20홈런 고지에 오르며 이만수 이후 처음으로 포수 홈런왕이 되었다. 시즌 최우수선수로 뽑힌 박경완은 그 해 현대의 한국시리즈 두 번째 우승까지 이끌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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