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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⓮ 2관왕 2연패 쇼트트랙 개척자 전이경

2020-08-24 07:07

전이경은 열두살 때 국가대표로 선발되었다. 그리고 열여섯에 올림픽에 나섰다. 첫 동계올림픽은 1992년 알베르빌 동계올림픽. 꿈이 컸으나 그냥 참가한 것으로 만족했다. 500m는 8강전에서 탈락했고 계주는 동료가 넘어지는 바람에 헛고생만 했다.

[대한민국체육 100년100인100장면] ⓮ 2관왕 2연패 쇼트트랙 개척자 전이경


올림픽이 2년 만에 열렸다. 하계올림픽과 개최 년도를 조절하기위한 IOC의 운영방침 때문이었다. 전이경에겐 행운이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대표로 나섰지만 몸이 좋지 않았다. 올림픽 한 달 전 쯤 다친 왼쪽 발목이 퉁퉁 부어 올랐다. 부츠를 신을 수 없을 정도였다. 출전을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되느라 중국 대표팀 의사가 침을 놔 주었고 덕분에 부기와 통증이 사라졌다.

전이경, 김소희, 원혜경, 김윤미. 쇼트트랙 스피드스케이팅 첫날 여자 3000m 계주에 나섰다. 결승선을 3바퀴 남기고 중국을 따돌렸다. 완승이었다. 대한민국 여자선수의 동계올림픽 첫 금메달이었다. 그리고 그건 전이경의 올림픽 첫 금메달이기도 했다.

전이경은 다시 1000m 스타트 라인에 섰다. 우승후보는 캐나다의 31살 백전노장 나탈리 램버트. 전이경은 우승 욕심을 누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은, 동 전략을 짰다. 마지막 한바퀴. 램버트의 뒤에 바싹 붙었다.

은메달을 노릴 게 아니었다. 힘이 남았다. 속도를 냈다. 램버트를 지나쳤다. 금메달이었다. 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000m 첫 챔피언 좌에 오르면서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첫 2관왕이 되었다.

정상의 전이경. 창업보다는 수성이 더 어려운 법이지만 전이경은 그 자리에서 좀체 내려오지 않았다. 1995년부터 세계 선수권 대회 3연속 종합 우승을 차지하며 1998년 나가노 올림픽에 다가갔다.

알베르빌이 불안의 올림픽이고 릴레함메르가 설레임의 올림픽이었다면 나가노는 확신의 올림픽이었다. 힘, 끈기, 경기력이 최고였다. 세 번째 올림픽임에도 나이는 고작 스물 둘.

4년 전 멤버에서 김소희가 빠지고 안상미가 들어와 3000m 계주팀을 완성했다. 경쟁은 여전했지만 금메달 획득에 걸림돌은 없었다.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다.

1000m는 한.중전이었다. 전이경, 원혜경과 양양A와 양양S였다. 중국의 양양A는 무시 못할 강적. 1000m 준준결승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준결승에선 전이경에 앞섰다.

결승경기, 2바퀴를 남겨 놓고 양양A가 치고 나갔고 전이경도 속도를 올렸다. 양양S를 앞질렀으나 양양A는 앞에 있었다. 체력에는 늘 자신 있는 전이경의 금빛 질주가 시작되었다. 마지막 코너에서 절묘하게 인코스로 파고든 후 ‘발 내밀기 신공’을 펼쳤다. 양양A의 방해로 균형을 잃고 얼음 위에 미끄러졌지만 이미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뒤였다. 양양A는 실격.

올림픽 2관왕 2연패. 전이경의 올림픽 대서사시였다. 전이경은 아직도 한창 때인 스물 세살의 1999년, 정상에서 쇼트트랙을 서둘러 접었다. 당연히 주위의 만류가 뒤따랐지만 하고 싶은 다른 일이 너무 많아 그대로 결심을 굳혔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20manc@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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