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아 스토리]대한민국 체육100년 100인 100장면 ⓻정주영회장과 바덴바덴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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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8-0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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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벼락 '서울올림픽 민간유치위원장’

“뭘 맡으라는 겁니까?”

“아, 예. 서울올림픽 민간유치위원장직을 맡아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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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문교부 체육국장이 정주영회장을 찾아왔다. 그는 문교부장관이 대통령 결재까지 받았다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전경련회장인 정 회장을 비롯하여 김우중 대우그룹회장, 이건희 삼성그룹회장, 조중훈 대한항공회장, 최원석 동아건설 회장, 배종렬 한양 사장 등 민간 7인 위원회의 이름도 적혀 있었다.

“우리가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그게 좀... 꼭 유치하자는 게 아니라 정부의 체면만이라도 세워주면 좋겠다는 겁니다”

"그것 참, 하면 하는 거고 안하면 안하는 거지 체면은 또 뭔 말이야“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느닷없이 올림픽유치위원장이라니. 그렇다고 모르겠다고 할 순 없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기업운명이 왔다갔단 하던 시절이라 우선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사연도 많고 말도 많았던 올림픽 유치 계획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 반신반의했다. 그러나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확신에 찬 어조로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자 그렇다면 한번 해보자고 했다. 1979년 10월 8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정상천 서울시장, 김택수 IOC위원, 박충훈 무역협회장등이 참석,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 계획’을 발표했다.

찬성하는 이 없는 무모한 도전.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보름 여 후 10.26사건이 터지고 박대통령이 서거하자 당연히 없던 일이 되었다. 최규하 내각은 80년 1월 ‘올림픽 유치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다’며 전면 백지화했다. 일을 추진하던 박종규도 신군부에 의해 서리를 맞아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정부대책위원 전원이 유치 철회를 찬성했다.

없던 일이 되었던 이 계획은 그러나 전두환정권이 들어서면서 되살아났다. 전두환은 “전임 대통령이 추진하던 일을 왜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느냐”며 밀어 붙였다. 수많은 희생자를 밟고 억지 정권을 잡았기에 뭔가 국민의 관심사를 돌릴만한 획기적 이벤트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1980년 12월 새로운 군사정권에 의해 서울 올림픽 유치계획이 다시 발표되었고 서울시장, KOC가 연이어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IOC에 제출했다. 그리고 전두환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서울이 올림픽을 훌륭하게 치를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겠다는 서한을 사마란치 IOC위원장 앞으로 보냈다.

일사천리였다. 그렇지만 겉보기 내용만 그럴 뿐 속은 텅빈 강정이었다. 누구도 서울올림픽 유치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가능하리라고 보지도 않았다.

정부 경제관료들은 나라 재정상 힘들다고 했다. 대한민국의 현재 능력으로는 도저히 치를 수 없다는 분석이었다.

서울시도 아주 회의적이었다. 그 많은 시설을 언제 건설하며 무슨 돈으로 짓겠느냐며 고개를 저었다.

체육계는 찬반양론이 있었다. 내 나라에서 올림픽을 한다는 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상황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상호 대한체육회장은 ‘어쨌든 한 번 해보자’는 입장이었지만 앞장 서서 추진해야 할 김택수 IOC위원은 단칼에 잘랐다.

“유치전은 사실상 일본 나고야 쪽으로 끝났다. 서울 쪽에 표를 던질 사람은 나와 미국, 대만 등 기껏 3표뿐이다. 추진하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게 좋다”

야속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벌써 2년여 간 올림픽 유치 작업을 벌인 일본의 나고야를 이길 수 없었다.

체육계 일각에서 물러 날 명분 찾기용 협상론을 들고 나왔다. 일본의 올림픽을 밀어주고 우리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1986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자는 안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미 올림픽을 유치했다고 생각한 일본은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느냐. 한국측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그게 4월이었고 정주영 회장이 ‘서울올림픽 민간유치위원장’직을 제의 받기 바로 전이었다. 꽤심 하기 그지없는 상황이었다. 하자니 할 일이 없고 안하자니 대통령의 불호령이 무서웠던 고위공무원들이 낸 잔꾀였다. 그래서 유치를 못해도 창피당하지 않을 정도의 표만 얻으면 된다고 했던 것이었다.

-올림픽 유치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모두가 부정적이었지만 한 가지 고무적인 이론이 있었다. 노신영 외무장관 등의 견해였다. 유치할 할 수 있다거나 유치해야 한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번 기회가 지나가고 나면 대한민국에게 다시 돌아 올 올림픽 기회는 빨라야 40~50년 후가 된다는 것이었다.

“올림픽은 대륙별로 돌아가면서 개최된다. 5대륙이니까 한 대륙의 차례가 오려면 평균 20년이다. 아시아는 유럽이나 북남미 지역에 비해 기회가 적은 편이라서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

1964년 일본 도쿄가 올림픽을 개최한 후 24년 만에 아시아에 기회가 온 것인데 지금 놓치면 다음은 매우 불투명하다. 지금으로부터 20년 후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이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덤빌 것이다.

중국과의 싸움은 지금 나고야와의 싸움보다 훨씬 힘들 수 밖에 없다. 그동안 일본이 유치전을 펼친 덕분에 1988년 올림픽은 아시아에서 열리는 것으로 대부분 생각하고 있을 듯 하다. 우리의 힘은 떨어지지만 일본이 이미 올림픽을 치뤘다는 것을 강조하면 의외로 많은 지지표와 동정표를 얻을 수 있다.

일본에 대한 유럽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다. 일본이 너무 크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다. 그리고 개발도상국에서도 올림픽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우면 아프리카 등 못사는 나라들의 지원도 기대할 수 있다.

매우 불리한 게 사실이지만 시대적 상황 등을 감안 할 때 대한민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는 때는 1988년밖에 없을 지도 모른다. 지금 국가 재정이 올림픽 개최에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8년 후다. 우리의 성장속도로 봤을 때 그때는 올림픽을 할 수 있는 형편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로부터 20~30년이 흐른 지금 생각하면 정확하게 맞는 예측이었지만 당시는 모두 볼멘 소리 뿐이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해 보지

시간이 지날수록 말이 더 많아졌다. 첫 단추도 못 꿰고 있었다. 못 꿰는 것이 아니라 시간 낭비, 노력 낭비, 돈 낭비라며 안 꿰고 있었다.

명목상 유치 당사자인 서울시는 ‘왜, 우리가 총대를 매느냐’는 입장이었다. 되지도 않을 일에 괜히 나섰다가 돈 축내고 욕먹기 싫었다. 주무부서인 문교부 등도 다르지 않았다. 경제기획원 역시 예산문제로 난색을 표명했다.

전두환을 비롯한 군 출신 인사 몇 명만 우기고 있었다. 그들은 ‘해보지도 않고 왜 꽁무니부터 빼느냐’고 했지만 논리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그들도 반대 아니면 무관심인 여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올림픽유치만큼 훌륭한 탈정치 퍼포먼스는 없었기에 우기고 있었다.

모두가 싫어하는 일. 머리 좋은 관료들이 재계를 끌어들인 이유였다. 그들도 미안했던지 사석에선 ‘20표 정도만 얻으면...’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정주영 회장 등은 안 되는 일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 모두 맨주먹으로 재계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서있는 자리가 낭떠러지 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으므로 일단 시동을 걸었다.

안될 때 안 되더라도 해보긴 해봐야 하는 일 아닌가. 관계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해서 회의를 열기로 했다. 올림픽 유치 주체인 서울시장, 문교부장관, 대한체육회, KOC위원 등이 회의 소집대상이었다.

그러나 막상 회의 당일엔 서울시장도 오지 않고 문교부에서도 국장이 대신 참석했다. 그나마도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시설문제에서부터 당장 유치비용 등 돈 들어갈 일이 많은데 예산편성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물어보니 일은 지금 해야 하는데 돈은 내년에나 나온다고 했다.

그들을 믿지 않기로 했다. 의지가 있는 체육계 인사들로부터 정보를 들으며 기업별로 연관성을 따져가며 대륙별 IOC위원 국가들을 맡기로 했다. 접촉해야 할 IOC위원은 82명. 일본 쪽으로 많이 기울었다고 하나 되돌리면 그만이었다. 승리의 마지노선이 40여표임을 감안하면 못할 것도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각국에 나가있는 현대맨들에게 숙제를 내주었다. 그 나라 IOC위원들의 성향을 우선 파악하도록 했다. 맨투맨 전략이었다. 위원들을 한통에 잡아넣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명 한명 맞춤전략으로 공략하겠다는 것이었다. 안기부에서 파악했다는 내용을 전달받았지만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맡고 있던 ‘한영 경제협력위원장’ 직을 활용하여 영국 쪽 IOC위원과 접촉했다.

느닷없기는 조중훈, 김우중, 최원석회장 등도 마찬가지였다. 기업과 전혀 관계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을 해야 하니 난감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을 표는 3표’라는 말을 믿지는 않았다. 나라별로 사업파트너를 동원한다면 정부가 ‘망신당하지 않기 위해’ 원하는 20표는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각자가 영향력을 발휘하여 한표 한표 끌어 모으기로 했다.

대우의 주무대는 중동과 아프리카였다. 김우중회장은 중동보다는 아프리카쪽에 전념하기로 했다. 후진국인 이들은 심정적으로 일본보다 한국에 기울어 있었기에 두드려 볼만 했다. 아프리카는 한 나라의 IOC위원만 잘 움직여도 우군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김회장은 영빈관공사. 장학금 등으로 인연이 깊은 수단을 집중 공략하면서 아프리카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갔다.

최원석 동아그룹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쪽에 공을 들였다. 동아는 사우디의 대규모공사를 맡아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TEP공사는 모두가 탐을 냈던 공사였다. 하지만 규모 등이 워낙 커서 아무 기업이나 덤벼들 수 없었다.

특히 세계적으로 이름 난 미국기업이 눈독을 들이고 있어 수주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최회장은 왕실과의 접촉을 통해 결국 승자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올림픽유치에 필요한 원군을 확보했다.

최원석 회장은 1979년부터 1995년까지 16년간 대한탁구협회를 맡아 우리나라 탁구를 이끌었던 인물. 탁구협회장으로, 동아그룹 회장으로 쌓은 인맥 중 하나인 에릭슨과 칼그렌 IOC위원을 끌어들였다. 에릭슨 등은 유럽의 다른 위원들을 소개하며 서울지지 세력의 범위를 넓히는 역할까지 했다.

조중훈 대한항공회장은 한불 경제협력위원장이었다. 프랑스 쪽을 공략하면서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빈국을 파고 들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지역에 영향력을 지닌 나라로 프랑스가 아프리카를 움직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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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우호적 관계를 토대로 항공료 서비스까지 덧 붙였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몇몇 나라는 늘 올림픽 출전경비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경비중 절반이상이 왕복 비행기 값이었다. 조중훈 회장은 평화와 평등의 올림픽정신을 내세우며 이들 국가의 국가대표선수들과 임원들을 아주 싼값에 운송 할 것임을 약속했다.

그리고 서울의 상황을 보고 싶다는 위원들이 있으면 언제든지 초청하겠다고 했다. 초청일 경우 왕복 항공기료는 초청자의 부담임을 잊지 않고 상기시켰다.

개최지를 발표하는 총회 석상에서 리비아의 IOC위원이 말했다.

"개발도상국에 기회를 줘야 한다.“

그는 아프리카 IOC위원의 리더 중 한 명으로 그 위원 덕분에 아프리카 표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조중훈 회장이 미리 손을 써둔 결과였다.

정주영 회장은 민간추진위원이 아니더라도 각 나라와 경제협력 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는 전경련 회원사가 있으면 그들에게 그 나라 IOC위원을 만나도록 주선해 주거나 직접 설득해 주도록 부탁하기도 했다.

재계의 움직임을 보면서 정부측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해외공관을 통해 서울이 1988년 올림픽 유치전에 확실히 뛰어들었음을 홍보했다. 나고야가 1979년쯤 시작해서 조직적으로 유치활동을 벌인 것에 비해 서울은 1981년 5월쯤 겨우 뛰어들었기에 많은 나라들이 서울의 유치의사에 의심을 품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지지 세력을 많이 확보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부, 재계, 체육계가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에 대부분의 IOC위원들은 서울의 의사가 확고부동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승부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게 대체적의 의견이었다.

그 사이 IOC실사단은 서울을 들러본 후 서울이 올림픽을 치를만한 자원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다. 친한파로 알려진 사마란치 IOC위원장조차 서울의 열세를 지적할 정도였다.

당초 1988년 올림픽은 호주 시드니, 알제리아 알제, 그리스 아테네가 유치신청을 했다. 그러나 캐나다 몬트리올이 올림픽을 치룬 후 막대한 재정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한 걸 알기에 시드니, 아테네 등은 마음만 먹었을 뿐 나서지 않았다.

서울은 뒤늦게 뛰어든 셈인데 IOC 입장에서는 반가운 우군이었다. 서울마저 나가떨어지면 1988년 올림픽 유치전이 ‘나고야 단독유치에 나고야 자동결정’으로 끝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승부가 기울든 말든 단지 경쟁을 위해 IOC는 서울을 계속 부추겼다.

정신없이 3개월여가 훌쩍 지났다. 물밑 활동이 치열했지만 겉보기는 달라진 게 없었다. 1981년 8월 1일 문교부가 그동안의 활동성과를 중간 점검한 결과 ‘달랑 3표’는 확실하게 넘었다.


확실한 지지표는 5표였으나 지원을 표명한 위원이 16명이었고 친 서울이 16명이었다. 체면 살리기용 20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 섰다. ‘아전인수식 계산’이었으나 중립적인 위원 14~16명을 남은 50여일 동안 잘 설득하면 유치도 가능할 것 같았다.

이들을 대륙별로 분석하니 미주지역과 대양주는 서울 우세, 공산권과 유럽 일부는 나고야 우세, 아프리카와 남미는 중립이었다. 여전히 열세였지만 나고야에서 중립으로 돌아선 표들을 공략하면 승산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정주영 회장등은 다시 전략을 짰다. 아프리카, 남미는 지역특성상 한 묶음으로 처리하고 유럽은 각개 격파 하고 중동 쪽은 두 세 묶음으로 나누어 공략하되 가능성과 효율성이 큰 아프리카, 남미에 힘의 70% 이상을 쏟아 붇기로 했다. 그곳에선 몰표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81년 9월18일 저녁 프랑크푸르트 행 대한항공 1등석.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조중훈대한항공회장, 최원석 동아그룹회장, 유창순 무역협회장이 조상호KOC위원장, 이원경KOC상임고문, 이원홍KBS사장, 김택수IOC위원, 김운용세계태권도연맹총재, 전상진KOC부위원장, 최만립KOC명예총무 등과 함께 최후의 격전지를 향해 날아갔다.

남은 시간은 고작 10여일. 결과는 진인사대천명이고 남은 일은 전력투구뿐이었다.

-완승한 홍보관 싸움

정주영 회장은 영국, 벨기에, 룩셈부르크를 돌았다. 조중훈 회장은 프랑스를 재차 확인했다. 최원석 회장은 중동을 집중 마크했다.

그 사이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을 동원. 현지 홍보관을 만들었다. 예산이 없다고 해서 자신의 돈을 우선 썼다. 나중에 메워준다고 했으나 영상비 등에 들어간 2억여 원은 끝내 받지 못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마음만 먹으면 홍보영상비를 충분히 뺄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헛돈이라는 생각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다.

홍보관과 홍보 영상전은 완승이었다. 서울관을 찾은 IOC위원과 각국의 관계자들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에 능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5명과 미스코리아출신 가이드 3명이 친절하게 설명하는 서울과 서울의 경기장 시설들을 보며 기울던 마음을 확실하게 다졌다.

서울관의 코리아 홍보대사들은 한눈에 확 들어오는 한복차림으로 관계자들을 응대했다. 나고야관은 서울관에 한참 못미쳤다. 사진위주의 평면적인 전시인데다 일본항공 스튜어디스들이 근무복 차림으로 안내했다. 나고야는 홍보관과 함께 최종 프리젠테이션의 무성의로 다 된 밥에 콧물을 빠뜨렸다.

현대맨들은 유치전 막판에도 동원되었다. 바덴바덴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이 프랑크프루트였다. 프랑크푸르타지점의 전 직원과 가족들이 나서서 IOC위원들에게 돌릴 꽃을 만들었다. 채수삼 지점장은 멀리까지 나가 재료를 구해오며 매일같이 50여명분의 한국음식을 만들어 해 날랐다.

정회장이 두 번째로 한 일은 막대한 올림픽예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몬트리올의 적자올림픽 사례를 연구한 결과물이었다. 시설은 그의 또 다른 전공이어어서 가능했다. 숙소는 민간 시설들을 이용하고 모자라는 경기장은 새로 짓는 대신 대학이나 공공시설들을 올림픽 규격에 맞춰 수리해서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선수촌, 프레스센터, 기사숙박시설은 아파트를 지어 먼저 쓰게 한 후 올림픽 후 분양하자고 했다. 지금 보면 대단한 아이디어가 아니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것이었다.

바덴바덴 시내를 관통하는 강변을 그곳 사람들이 공원처럼 사용하는 것을 보고 한강 고수부지를 개발한 것 보다 더 참신한 생각이었다.

-화룡점정(畵龍點睛) 다슬러 아디다스회장

열심히 뛰어다닌 덕에 정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은 넘긴 것 같았다. 하지만 단지 체면을 유지하기위해 자신을 비롯해서 조중훈회장이 후진국 선수들에게 대한항공 티켓을 할인 공급하고 김우중회장, 최원석회장, 그리고 삼성물산 등이 이국땅에서 땀 흘린 것은 아니었다.

이제 사정권 안이라 어느 한쪽만 잘 건드리면 될 듯했다. 그때 정회장은 박종규회장을 통해 IOC위원 사이에 영향력이 큰 아디다스 다슬러를 알게 되었다. 정 회장은 사업가적인 기지를 발휘, 그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다.

확실한 카드, 다슬러회장을 잡기위해 정회장은 현대차 본사에 지령을 내렸다. 현대자동차가 스포츠카를 개발하려고 하는데 도움말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미팅을 주선하도록 했다. 다슬러회장도 흔쾌히 미팅을 받아들였다. 세계 스포츠계를 좌지우지하는 큰손, 그 역시 정회장의 속셈을 모를리 없었다.

“스포츠카 시장에 뛰어들고 싶은데 어떨까요”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앞으로 수요가 점점 늘어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 현대가 개발 중입니다. 다만 아직 설계도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완성 되는대로 다시 만나 상의를 드리고 싶습니다.”

“아, 언제든지 좋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서울의 올림픽유치에 대해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가 유치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시죠”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한국을 밀어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하게 된다면 아디다스에게 TV 방영권 및 사업권을 줄 수 있습니까?”

“당연하죠.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IOC가 TV방영권과 기타 사업권을 모두 가지려고 하던 때여서 한국으로선 마찬가지였다. 다슬러 회장은 일본이 올림픽을 유치하면 아식스 등 일본 스포츠 브랜드들이 앞장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디다스의 입지도 좁아지므로 한국과 손잡는 게 여러 가지로 유리했다. 다슬러 회장은 이후 서울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표를 끌어들였다.

“IOC위원 쫒아 다니고 점심 사주고 저녁 사고. 정부에선 1전도 안주고. 어쨋든 모든 것을 동원해서 열흘 동안. 참 내 생애에 그렇게 계획적으로, 그리고 열심히 뛰어 다녀보긴 처음이었습니다. 내가 전경련 회장을 안 했으면 끌고 갈 힘이 없었고 생각도 해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경련 재임 중에 전경련 바깥 일이긴 하나 국가를 위해서 한 덩어리가 되어서 그렇게 일해 본 것이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보람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회장자리를 떠나면서 밝힌 후일담이었다.

- 52-27 세울, 코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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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의 시간이 왔다. 승부는 여전히 나고야 우세였다. 결정 하루 전 독일의 한 신문은 나고야의 완승을 확신했다. 경향신문은 이에 반해 서울의 우세를 점쳤다. 그게 하루 전 오전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오후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이상야릇해졌고 해가 지자 ‘서울 우세론’이 조심스럽게 퍼지기 시작했다. 정주영회장은 어느 취재기자와의 내기에서 서울에다 자신있게 20달러를 걸었다. 그 기자는 나고야에 걸었다.

1981년 9월 30일 서독 바덴바덴.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투표결과를 발표했다.

세울52, 나고야 27.

1988년 10월, 서울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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벅찬 개막의 그 현장에 그들 기업가들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고두고 ‘바덴 바덴의 전투’를 명예스럽게 가슴속에 담아 두었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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