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아 스토리] ⓶그 해 6월의 그 뜨거웠던 붉은 함성과 평화

이신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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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0-07-18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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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광장문화에 서툰 편이다. 역사적으로 그럴만한 기회가 없었던 터에 박정희, 전두환 등으로 이어진 30여년 독재정권이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극력 막았기 때문이었다.

관 주도하에 동원된 행사가 아니면 대부분 정부가 무력으로라도 막고 보는 반정부 집회나 독재반대 시위였기에 평화적인 광장문화는 생길 틈이 없었다.

하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은 굉장히 평화적이고 깨끗한 자발적인 길거리 응원으로 다분히 폐쇄적이었던 우리 문화를 개방적인 광장에 내놓음로써 새로운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보다 훨씬 크고 대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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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과 패가 병가지상사이듯 축구경기에서 한 두번 이기고 지는 것은 늘상 있는 것으로 매우 한시적이다. 그러나 한 번 시작된 광장문화는 긴 생명력을 지니고 사회의 틀을 바꾸는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 잡기 때문에 보다 중요하고 영향력이 강하다.

거리응원의 토대는 축구응원동호회 모임인 ‘붉은 악마’였다. 붉은 악마는 19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붉은 유니폼을 입은 대한민국의 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비며 끈질긴 플레이로 ‘깜짝 4강’에 오르자 유럽 등 외국언론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외신들은 우리 축구팀을 ‘붉은 악령(Red Furies)’ 또는 ‘붉은 악마(Red Devils)’라고 썼다. 벨기에가 원조지만 멕시코 대회 후 코리아 축구팀의 별칭으로 굳어졌다.

붉은 악마가 펼친 최초의 거리응원은 굳이 따지자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한일전이었다. 이들 붉은 악마는 배달국의 14대 왕으로 전쟁의 신이자 승리의 상징이었던 치우천황을 내세워 위협적이고 조직적인 응원을 펼쳤다.

이들은 국가대표 유니폼과 같은 붉은 색 상의를 걸쳤는데 거리응원에 나선 모든 사람들은 모두 비공식적으로 공식적(?)인 응원유니폼이 되어버린 붉은 색 상의를 입고 나타났다. 그래서 대한민국 팀의 경기가 있는 날에는 온 나라가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레드(공산당)콤플렉스’가 심한 나라임을 감안하면 획기적인 것이었다. 붉은 악마가 내놓은 ‘BE THE REDS'도 마찬가지. 물론 서포터스인 붉은 악마가 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빨갱이‘가 되자고 해도 그만이었으니 전혀 의도하지 않았지만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나라 전체가 레드 콤플렉스에 벗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경기장에서 불기 시작한 붉은 악마의 잔잔했던 응원 바람은 우리 땅에서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에서 일시에 폭발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엄청난 붉은 물결이었다.

폴란드와의 1차전 거리 응원의 주 무대는 서울 대학로였다. 경기 4시간 전부터 모여 들기 시작한 응원인파는 경기가 끝날 때 쯤엔 10만여명을 헤아렸다. 10만여명이 일시에 질러대는 ‘대~한민국 짜자작 짝짝’은 지구상의 그 어떤 천재적 연출자도 이룰 수 없는 걸작이었다.

미국과의 2차전 거리응원은 서울시청 광장이 주 무대였다. 처음 거리응원에 난색을 표했던 서울시는 대학로 거리응원이 깔끔하게 끝나자 비로소 시청광장에서의 응원을 적극 장려했다. 그리고 원조격인 대학로를 비롯 전국적으로 퍼졌다.

시청광장의 인파는 3차전 즈음에는 광화문, 세종로로 확산되는 등 서울에만 6~7곳에서 열렸다. 부산을 비롯한 지방 대도시에서도 붉은 물결이 퍼져나갔다.

시작할 때 50여만 명이던 길거리의 붉은 물결은 70만 명, 400만 명으로 늘어나더니 700만 명에 이르렀다. 터키와의 3,4위전까지 총 7경기를 하는 동안의 붉은 물결은 연인원 2400만명에 이르렀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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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장관은 뒤에 있었다.

10만여명이 적어도 6시간 이상 머물러 있었음에도 아주 작은 다툼조차 없었다. 취객들의 이상한 행동 역시 없었으며 서울시가 우려했던 시위같은 것도 일체 없었다. 매우 흥겨운 분위기속에서 그저 신명나게 놀다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날 때 쓰레기를 말끔히 치워 어지럽지도 않았다.

평화속의 응원축제였다. 세계 각국의 언론들은 대한민국의 이런 응원모습을 대서특필했다. 어떻게 10만여명이 모였는데 싸움같은 것이 없을 수 있느냐는 것이 그들의 첫 번째 의문이었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머문 자리를 그토록 깨끗하게 해 놓을 수 있는냐는 것이 두 번째 의문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대한민국 축구팀의 월드컵 첫 승보다 자발적인 붉은 물결이 더 대단하게 보였고 쓰레기가 남지 않은 현장이 더 훌륭하게 보였다. 대한민국의 문화수준은 월드컵 4강보다 훨씬 윗길이었다.

월드컵을 현장에서 취재한 3천여 명의 외국 기자들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본사에 타전하면서 사상자가 전무하다싶이 한 이 현상을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축구팀이 졌을 때는 아마 다를 것이고 행패를 부리는 집단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예단했지만 진 경기에서도 거리의 붉은 물결은 여전히 성숙한 모습을 보였다. 놀랍도록 평화롭고 깨끗하게 진행된 이 광장문화는 훗날 광화문 촛불집회로 이어져 우리의 시위문화를 바꾸는 한 계기가 되었다.

[숨겨진 이야기]

거리응원은 동시다발적으로 생겼다. 모두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 조금이나마 일찍 불을 지핀 것은 경향신문과 SK그룹 그리고 한 기획사였다.

경향신문 월드컵취재단은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을 확산시키자는 결론을 내리고 첫 거리응원을 폴란드전에 맞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하기로 하고 장소 사용을 위해 서울시와 협의했다.

그러나 우려했던대로 서울시는 난색을 표했다. 응원군중이 경기 후 데모대로 바뀔 수 있고 대규모 인파가 몰려 들 경우 교통이 마비된다는 것이 반대 이유였다. 시청 앞이라 교통은 신경 쓰이는 문제지만 데모운운은 어불성설이었다. 스포츠 응원군들의 특성, 월드컵 응원의 축제성 등 상황을 누누이 설명했지만 서울시는 시청은 아무래도 곤란하다고 했다.

결국 시청광장을 포기하고 장소를 대학로로 돌렸다. 3만여명이 몰려드는 경우를 대비, 대학로 중간쯤에 대형 화면을 설치고 자동차길을 왕복 2차선 정도 허용하면 그럭저럭 할 수 있었다. 장소확정을 위해 종로경찰서, 동대문경찰서 그리고 대학로의 상인들과 접촉했다.

처음 난색이었으나 월드컵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자는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경찰관들은 모든 힘을 모아 교통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로 했고 상인들은 혹시 손해를 보더라도 감수하겠다며 나섰다.

다행히 폴란드전 시작 시간은 퇴근시간을 어느 정도 피한 저녁 8시 30분이었다. 그래도 길이 막히면 짜증내는 운전자들을 배려, 경기 1시간 전에 길을 막고 경기가 끝나면 바로 푸는 등 통제시간을 최소화 하기로 했다. 대학로의 상인들은 인파가 지나치게 많이 몰리면 영업은 영업대로 되지 않고 끝난 후 주변이 온통 쓰레기장이 된다고 했다.

2002년 6월 4일 저녁 8시 30분 대한민국과 폴란드의 조별리그 1차전.

경향신문은 사고를 통해 대학로의 거리응원을 홍보했다. 5천여장의 붉은 악마 티셔츠를 현장에서 무료로 나누어 준다고도 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실력있는 윤도현 밴드, 백제예술대학 학생들을 비롯 많은 밴드가 기다리는 시간의 무료함을 달래 줄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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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티셔츠는 현장에서 나눠 줄 필요가 없었다. 직접 신문사로 찾아와 가져가는 바람에 현장용으로 더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마침내 D데이 오후 4시, 이미 대학로는 붉은 물결이었다. 젊든 나이가 좀 들었든 많은 여성들이 얼굴에 태극문양을 그려 넣었고 모두들 어디서 구했는지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전까지 축구 경기를 응원하는 곳에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운집한 것도 보기 드문 일이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당초 비워두기로 했던 왕복2차선에도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경찰관들은 상황을 예측한 듯 일찌감치 아예 자동차들의 진입을 막아버렸다. 2차선을 비워두는 것이 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한 번 뒤엉키면 풀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8시쯤 되자 인파는 혜화동 로터리까지 가득 이어졌다. 도로는 완전히 통제되었고 인도에도 인파로 미어졌다. 아무리 많아도 3~4만명일 것라고 내다봤지만 경기도 하기 전에 인파는 이미 10만을 헤아릴 정도였다.

지나가던 자동차 운전자들도 손을 흔들며 응원인파를 응원했다. 담당 경찰관은 길이 막힌다고 항의하는 운전자가 없었다고 했다.

붉은 물결, 박자를 맞춘 다섯 번의 박수소리와 함께 터지는 대~한민국이라는 함성, 황선홍과 유상철의 골이 터졌을 때 10만이 동시에 쏟아낸 고함소리.

장관이었다. 감동이었다. 그 장면을 연출한 그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이신재 마니아리포트 기자/news@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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