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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38)경평축구이야기③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창단

2020-07-07 14:50

1934년 4월 춘계대회로 열린 경평축구 첫날 경기 모습
1934년 4월 춘계대회로 열린 경평축구 첫날 경기 모습
경성의 조선축구단과 평양의 무오축구단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단은 조선축구단과 무오축구단이었다.

조선축구단은 1917년에 창단한 불교청년회 축구단을 모태로 하고 있다. 휘문의숙(현 휘문고등학교) 출신들을 주축으로 창단한 불교청년회는 전조선축구대회에서 2차례 우승과 3차례 준우승을 차지한 강호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중반에 들면서 재정난을 겪게 되자 이에 불교청년회 회원 이건표가 호남의 대부호인 백명곤의 후원을 받아 불교청년회 선수들을 그대로 유지한 조선축구단을 창단하게 된 것이다.

평양을 연고로 무오년인 1918년에 창단한 무오단은 주로 평양에 소재한 대성학교, 숭실중학, 숭실전문 출신들이 많았지만 타 지역의 우수선수들까지 영입해 조선 최강의 팀이었다. 무오단은 조선체육회가 주최하는 전조선축구대회에 1회부터 11회까지 출전해 2회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등 경성을 대표하는 불교청년회와 조선축구단과 서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하지만 조선축구단과 무오축구단은 1930년대 초반에 접어들면서 똑같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새롭게 탈바꿈한다.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출범
1933년 신년 벽두부터 축구는 변화의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조선축구단과 무오단이 똑같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팀 해체가 불가피해 졌다. 먼저 관서지방 대부호인 유정필이 구단주겸 선수로 스폰서를 했던 무오단은 1932년부터 재정난에 시달렸고 이에 재일본조선유학생 축구단 감독을 지낸 최용순이 1월 28일 한때 전국을 호령한 무오단 선수들을 중심으로 평양축구단을 창설했다. 무오단 선수뿐만이 아니었다. 평양에 본적을 두고 전문학교나 직장, 또는 상업에 종사하면서 축구를 한 사람들을 모두 한데 모았다. 말 그대로 순수한 평양 사람들로 구성된 축구단을 만든 것이다.

이런 평양과 마찬가지로 조선축구단도 백명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재정난에 빠졌다. 이에 이영민 등이 중심이 되어 3월 28일 경성축구단 창단에 뜻을 모았고 사회 각층의 지원을 받아 5월 11일 경성축구단을 창단했다.

출범 당시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관련 인사는 다음과 같다.

◇경성축구단
►이사장 여운형 ►이사 유억겸 이용설 배석환 현정주 김상익 ►간사 이영선 이창진 ►선수감독 현정주 이영민 ►현역선수 이혜봉(연희전문) 정용수(경성전기) 박석연(연희전문) 이영민(식산은행) 이창용(연희전문) 김용식(보성전문) 백기주(진남포) 송기수(송도고보) 채금석(경신고보) 서형남(세브란스의전) 최성손(경신고보) 강영필(연희전문) 한우간(보성전문) 하영득(보성전문) 이용겸(세브란스의전) 유약한(철도) 윤중호(세브란스의전) 송기우(보성전문) 김화집(보성전문) 이조안(연희전문)

◇평양축구단
►총재 최정묵 ►고문 김건영 이필상 이석찬 최능진 정동규 최응천 송석찬 차재일 ►전무 최용순 ►상담역 장수천 성환 손치민 이덕인 안기번 양동지 김광신 김기수 오신겸 조수증 ►간사 박의현 한용호 장병오 ►서무 한영택 ►서기 이정식 ►선수 김신복(숭실전문) 장병오(운송업) 한수한(미곡상) 정용수(연희전문) 윤창선(강북중) 박기윤(상업) 김영찬(상업) 송기수(연희전문) 박인식(보성전문) 이치순(보성전문) 김성각(인쇄) 김영근(숭실중학) 한영택(상업) 박영철(일체) 박의현(숭실전문) 이정식(연희전문)출범 당시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 관련 인사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경평축구 출범
이렇게 우리나라를 최대 도시인 경성과 평양을 대표하는 축구단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두 팀의 교류전이 성사되기에 이르렀다. 정식 명칭은 '경성대 평양 축구대항전'으로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그대로 경평축구라고 불렀다. 새롭게 시작된 경평축구는 평양축구단이 경성축구단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1933년 10월 20일 첫 추계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춘계(4월 6일)와 추계(10월 22일) 대회로 열렸고 이 대회는 1935년까지 이어졌다.

1929년 조선일보사가 탄생시킨 '전경성과 전평양 축구대항전'이 1차 경평축구라면 1933년에 출범한 경평축구는 2차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1차 경평축구가 제3회 대회 9차례 경기를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2차 경평축구가 자리를 잡게 된데 당시 사회 분위기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순수 체육 측면으로 보면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축구단체들을 총괄하는 단체가 없는 상태에서 신문사가 주최를 함에 따라 경성과 평양의 대표선수를 선발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여기에 선발해서도 서로 손발을 맞춰 볼 시간적 여유도 없이 훈련도 하지 못하고 대회에 출전을 함에 따라 단체정신 함양이라는 축구경기 본래 측면에도 맞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다. 당연히 여러 곳에서 선수들을 급조하다 보니 선수 통제도 문제점을 드러낸 탓으로 보인다.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은 한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팀이었다. 결국 지역을 대표하는 팀들끼리 경기를 함에 따라 별도로 신문사에서 전경성과 전평양을 내세워 축구대회를 할 명분이 없어져 버린 셈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경평축구도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경성과 평양의 라이벌 의식이 워낙 강해 충돌이 잦은데다 일제가 은연중 조선에서의 축구대회를 탐탁치않게 여기면서 1935년을 끝으로 막이 내리고 광복 전까지 공식적으로 경평축구는 열리지 않았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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