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대한민국 스포츠 100년}(32)일제강점기의 지방체육⑥대구 달성공원을 중심으로 발전한 경북체육

2020-06-11 12:39

대구 해성학교(현 효성의 전신) 체조 수업시간 모습
대구 해성학교(현 효성의 전신) 체조 수업시간 모습
경북체육 중심, 달성공원
경북 체육도 외국 선교사들이 신식학교들을 속속 설립하면서 체조를 교과과목으로 넣어면서 각종 근대 스포츠들이 시작된 것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였다.

1898년 10월 한문서당으로 설립된 해성학교(효성의 전신), 김천성의학교(1901년), 계성학교(1906년), 신명여학교(1907년)들이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이라면 1910년 3월 14일에 개교한 대구농림학교는 공립이었으며 1921년 교남학교(대륜의 전신)는 민족주의 학교였다.

이들 학교들을 통해 근대스포츠들이 퍼져 나갔지만 학교 스포츠가 지역사회의 스포츠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일정기간 준비가 필요했다. 체육교육을 전담하는 교사뿐만 아니라 이를 시행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도 선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이들 학교들이 체계적인 체육 교육을 실시하기 전부터 대구에서는 야구, 축구, 정구 등 구기종목들이 성행했다. 작은 공터와 공 하나만 있으면 축구경기가 벌어졌다. 양측의 숫자만 맞으면 오전이나 오후나 가릴 것 없이 경기를 벌였다.

소학교(현재 초등학교)에서 시작된 체육수업이 10년 쯤 지나 조금씩 체계가 잡혀가기 시작할 즈음인 1911년 가을 달성공원에서 대구시민운동회가 열렸다. 민족주의 민간단체인 간이회가 기획하고 강의원이 주관하여 펼쳐진 시민운동회의 경기종목은 육상 단 한 종목에 그쳤지만 그 열기는 대단했다. 운동회를 열수 있는 인공적인 시설은 일제 군대들이 점령해 버린 탓에 달성공원뿐이었다.


달성공원에는 억지로 돌면 250m 트랙을 할 공간이 있었고 강둑 같은 흙으로 만든 스탠드가 있는 덕분이었다. 이때부터 달성공원은 운동회의 단골장소로 사용됐고 이곳 주변이 자연스레 대구 체육활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1914년 도쿄유학생모국방문단이 대구를 방문해 야구경기를 가졌다. 제대로 장비도 없는 대구팀에 견주어 유학생팀은 통일된 유니폼에 반짝반짝 빛나는 스파이크, 그리고 글러브까지 갖추었다. 이때부터 야구를 배우겠다는 청년이 늘어나면서 야구 열기가 일었고 자연스레 대구 야구는 ‘짜다’는 소문도 돌았다 언제 어디서나 공간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야구와 축구 소문이 퍼지면서 이때까지 명절에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그네뛰기, 널뛰기, 줄다리기 등 민속놀이들을 단숨에 압도하고 말았다.

이런 야구와 축구가 나름대로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3·1 운동 후 일제의 문화주의 정책에 편승해 1920년 1월 24일 발족된 대구청년회에 이어 1922년 3월 23일에 설립된 대구운동협회 덕분이었다. 대구운동협회가 1935년 6월 17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영남체육회로 변신을 하지만 일제 강점기동안 대구와 경북 지역 각종 스포츠를 보급하고 대회를 개최하는 주역으로 활동했다.


1925년은 대구 체육의 새로운 전환기로 기록할 만하다.

이해 5월 31일 키가 5척1촌(약 156㎝) 이상이면 출전할 수 없다는 규정을 새로 만든 대구소년야구대회, 7월20일에는 처음으로 여자부도 참가한 전조선정구대회를 개최했다. 여자부는 2팀만 참가해 교남여학생부가 순도여학교에 이겨 우승했다. 10월 20일에는 계성학교 운동장에서 일반 20전, 학생 10전씩 입장료를 받은 전조선축구대회가 개최됐다. 전조선이란 대회 명칭은 특정한 기준이 없이 당시 각 지역에서 사용했다.

1925년을 전후에 수상 및 빙상경기도 선을 보였다. 스케이트는 몇 년 지나지 않아 계성, 대구고보, 대구상업, 대구농림에 빙상부를 만들 정도로 일반화됐고 대구여고보, 신명학교 등 여학교 학생들도 남학생들과 어울려 스케이트를 배웠다. 이와 함께 이해 2만5천원을 들여 지은 길이 63m, 폭 27m 규모의 동운정 수영장이 개장하면서 여름 수영, 겨울 스케이트로 청소년들의 체육이 활성화되었다,

1934년 경북 의성에서 열린 소타기 씨름대회 모습
1934년 경북 의성에서 열린 소타기 씨름대회 모습
낙동강을 끼고 씨름이 성행

무엇보다 영남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강인 낙동강을 끼고 있는 덕분에 모래사장이 많아 자연스럽게 씨름이 성행했다. 본격적인 스포츠 형태를 갖추기 전의 씨름은 각희(角戱)라고 불렀다. 1912년 6월 12일 경산군청에서 열린 각희경기를 보던 관리들이 각희를 하는 선수들이 생명이 위험할까 두렵다며 각희를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씨름이라기보다는 격투기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경북지역에서 열린 최초의 씨름대회는 1922년 5월 대구토목공려회가 주최한 대회였다. 일제는 씨름대회가 열리면 많은 관중들이 몰려 소요가 일어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허가를 해 주지 않았는데 이때는 공려회 회장인 박기돈이 사정을 해 경찰들이 감시하기 쉬운 대구경찰서와 인접한 대화정에서 열렸다.

사월초파일인 5월 4일 시작된 경기는 사흘 동안 이어져 결승에 나갈 장사를 뽑았는데 당시는 일정한 선수의 숫자를 제압해야만 다음 경기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연승제였다. 보통은 최소 10명은 이겨야 다음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웬만한 체력과 기술을 갖추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었다. 경북의 각 고을은 물론 전국에서 장사들이 몰려와 경기를 벌인 끝에 중인부(경량급)에서는 대구의 김방우가 우승해 당목 1필을 받았고 대인부(중량급)에선는 고령군의 곽숙제가 1등을 차지해 100원 가치가 있는 소 한 마리와 이승 한필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유달리 일경들의 감시가 심했던 대구에서 성대한 씨름대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 달 여전 부산온천장여관조합이 개설한 경기회, 합천군경기회 등이 먼저 대회를 연 덕분에 허가를 해 주지 않을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구대회가 성황리에 마쳤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면서 전국에서 갖가지 씨름대회가 생겼고 덩달아 정기대회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렇게 씨름이 인기를 끄는 한편으로 각급 신식학교들을 통해서는 근대스포츠들이 하나둘씩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다른 지방처럼 운동회를 통해서였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저작권자 © 마니아타임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쇼!이슈

마니아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