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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100년](30)일제강점기의 지방체육 ④광주는 축구와 야구로 목포는 정구가 유행해

2020-06-04 10:56

목포체육협회가 주최한 제6회 전조선정구대회 결승에 전주 엄병율-이응린조가 목포의 엄달석-곽성록 조를 이겨 우승했다, 시잔은 목포조선명화회사 코트 결승에 진출한 선수들.
목포체육협회가 주최한 제6회 전조선정구대회 결승에 전주 엄병율-이응린조가 목포의 엄달석-곽성록 조를 이겨 우승했다, 시잔은 목포조선명화회사 코트 결승에 진출한 선수들.
광주를 중심으로 야구, 축구 꽃피워
전남체육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1907년 미국 남장로회 선교사인 유진 벨이 광주에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설립한 뒤부터 두 학교의 외국인 교사와 선교사들에 의해 야구, 축구, 정구 등이 학생들을 대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광주의 야구 붐은 1917년 도쿄유학생 야구단이 광주를 방문해 시범경기를 가진 것이 계기가 됐다. 이보다 먼저 1913년 숭일학교 교장 로버트 녹스(한국명 盧羅福)가 미국을 다녀오면서 야구용구 한 벌을 가져와 야구부를 창단했으나 한동안 상대할 팀이 없어 선교사 등과 섞여서 경기를 벌인 것이 고작이었다. 그 뒤 1920년 일본과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정상호가 양림구락부를 만들어 제1회 광주소년야구대회를 가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야구 붐이 일었다. 회를 거듭하면서 소년야구대회에 담양 나주 순천 등지에서도 참가했고 광주고보와 광주중학의 대항전도 가끔 열렸다.

1920년 4월 6일 설립된 사립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제일고등학교의 전신)는 1923년 야구부를 창단했고 목포상업고등학교는 1930년 고시엔대회 예선에 출전해 일본인 중학야구계의 최강자인 경성중학을 꺾고 본선에 진출하기도 했으며 1932년과 1933년에 전일본중등학교야구우승권대회에 참가해 3위와 준우승을 차지하는 성과도 올렸다.

당시 일반 사회팀으로 ‘북동팀’ ‘남동팀’ ‘대인동팀’ ‘양림동팀’ 등 동네를 단위로 팀이 있었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광주세우회, 전남도청, 광주부청, 종방, 남철, 호남은행, 법원, 도립병원 등 10여 개 팀이 있었으나 대부분 선수들은 일본인들이었다.


광주에서는 1930년 여름부터 약 7천 원의 공사비로 4개월에 걸친 정비작업을 벌여 11월에 운동장을 완공한 뒤 운동장 개장기념으로 11월 15일과 16일에 목포상, 군산, 이리, 광주 등 4개 학교가 출전한 호남도시대항야구대회를 가져 목포상이 우승했다.

또 이때 양림구락부는 축구팀도 만들었는데 ‘무호단’(武虎團) ‘화성단’(華城團)과 같이 축구경기를 벌였다. 축구선수들은 대부분 야구선수들이 겸했다. 전남체육사(1989년 12월 1일 발행)에 따르면 당시 ‘무호단’을 ‘남바께(南門 밖)’, 화성단을 ‘분바께(北門 밖)’라고 하였으며 양림구락부를 ‘물건너’라고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현 충장로를 기준으로 위쪽을 남문 밖, 반대쪽인 북동 누문동을 북문 밖이라고 했다. 또 광주의 서양문화촌이라 일컫는 양림촌은 광주천 건너편에 있다 해서 ‘물건너’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것.

1931년 7월 19일 조선일보 광주지사가 제1회 남조선축구대회를 주최했는데 여기에는 광주뿐만 아니라 순천 구례 영광 정읍 군산 이리 전주 고창에서 팀이 참가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때부터 ‘들어뻥 식’ 축구에서 나름대로 격식과 기술을 갖추면서 전남축구가 전국제패의 꿈을 안고 전국대회에 진출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육상은 1920년 경부터 이미 실시하고 있는 일본이들의 육상경기에 맞서 광주청년실업구락부의 최한영이 주도해 동앙리보 광주지국의 주최로 1923년 광주시민육상운동회를 묵정밭(현 전남의대 뒤쪽)에서 개최했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3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1935년에도 주봉식의 주도로 광주육상구락부가 결성되었으나 곧 일제의 압력에 해산되고 주봉식은 옥고까지 치러야 했다.

목포를 중심으로 정구, 야구가 인기몰이
전남은 목포에서도 근대체육 활동이 활발했다. 전북의 군산과 함께 일제 강점기 물자 수탈의 중심지였던 목포가 1897년 10월 1일 개항하면서 일본인을 비롯해 미국, 영국인 등 외국인의 거주가 증가한 때문이었다.

1923년 8월 17일 순수하게 조선인들로 구성된 목포체육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하면서 이 협회 내에 육상, 수영, 정구, 야구 등 4개부를 두었다. 이는 이미 당시 목포뿐만 아니라 전남 지역에 이들 4개 종목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이들 가운데 정구는 1922년 5월 20일 보성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2회 전조선정구대회에 ‘영광청년회’와 ‘목포청년회’가 출전해 목포청년회가 결승까지 진출해 아깝게 금강청년회에 3-1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또 1924년 8월 2일 전조선정구회와 목포체육협회가 공동으로 삼양일간당지보교 광장에서 전조선정구대회를 개최한 뒤 1940년까지 이어갔으며 호남은행(전 조흥은행의 전신)은 메이지신궁대회 등 각종 전국대회에 출전해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다. 또 1940년에는 광주와 목포가 친목 정구대회를 여는 등 정구열기가 드높았다.

목포상업고등학교는 야구와 함께 육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오기선, 김상호, 정영수 등이 1930년대 중거리 전남기록 보유자로 이름을 떨쳤다.

이밖에 1927년~1932년 호남축구대회가 열렸고 1930년 여름에는 목포유영협회가 창립돼 이해 8월 11일 바다에서 실시하는 원거리 수영인 호남유영대회가 개최됐으며 1939년 9월 3일에는 권투도시대항전이 열려 일반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광주와 목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도 야구, 축구, 정구 등이 성행했다. 1917년 여수와 광양에 정구가 상륙, 두 지역은 이해부터 매년 친선경기를 가졌으며 나주에는 1918년 정구와 야구, 1919년 축구가 보급되었다. 특이하게 도서지역인 완도군 신지교에도 이때 축구팀이 있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1920년에는 고흥 강진 진도에 축구, 순천 강진에 정구가 선을 보였으며 1922년에는 순천 광양에 축구, 함평 광양에 정구가 보급됐다. 여수에서는 1925년 여수항 매립지에서 조선축구대회를 개최했고 다음해는 남조선축구대회를 갖는 등 축구가 최고 인기종목으로 떠올랐다.

또 1926년에는 구례에 축구가 보급되었고 여수수산대학교에는 야구부가 창단되었으며 1927년 담양, 1930년에는 해남에 축구가 출현하고 구례에도 정구가 모습을 보였다. 이외에도 1933년 화순에 상륙한 정구는 이해 평양에서 열린 전국정구대회를 제패할 정도로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으며 1935년에는 장흥에서도 정구가 등장했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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