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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스포츠 100년](25)뒤늦은 육상대회 개최...연구회 구성해 준비

대회 개최전 창던지기 연습하다 체육대회 첫 사망사고 일어나

2020-05-18 10:07

조선체육회가 출범한 뒤 4년이 지나 뒤늦게 시작한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 입장식 모습
조선체육회가 출범한 뒤 4년이 지나 뒤늦게 시작한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 입장식 모습
육상경기연구회 구성해 개최 준비
근대적인 육상경기는 우리나라에서 조선체육협회가 1920년 5월 16일 육상대경기회라는 이름으로 용산 신연병장(현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처음 개최한 것이 처음이다. 이때 함흥청년구락부를 비롯해 밀양, 수원, 평양에서 참가해 트랙과 필드에서 15개 종목이 열렸다. 일본선수들은 단거리와 필드에서 석권하고 우리선수들은 경성 시내를 일주한 10마일 레이스(경성일주마라톤, 16.09㎞)에서 최홍석, 김상동, 김용만이 나란히 1·2·3위를 하고 인천~경성코스 벌어진 25마일 레이스(경인마라톤, 40.23㎞)에서는 임일학이 2시간45분11초, 조창환이 2시간45분12초로 1·2위를 차지했다.

이때 장거리에서 입상한 선수들이 주로 인력거꾼이거나 신문배달원이었다. 일본인들은 우리 선수들이 장거리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이듬해인 1921년 4월 17일 일본경기위원회와 조선체육협회 주최로 제5회 상하이극동올림픽대회(1921년 5월 20일 개최)에 파견할 대표선수를 선발하면서 각력을 쓰는 이들의 특정직업을 문제 삼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조선체육협회가 처음으로 근대육상경기를 열기 시작한 사흘 뒤인 1920년 5월 19일 중앙기독교청년회 운동부 주최로 경성에 있는 사립중등학교 6개교가 참가한 육상경기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가 조선인 중심의 체육단체가 주최한 최초의 육상경기대회로 당시 긴 공백기에 있던 우리나라 육상경기 발전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23년에는 연희전문학교가 주최한 제1회 전조선중등학교육상경기대회(전조선중등학교연합경기대회)가 열려 배재고보, 양정고보, 중앙고보, 송도고보, 경신학교, 협성학교, 청년학관, 공주영명학교 등 8개 학교가 참가해 10개 종목에서 실력을 겨뤘다. 이 대회는 우리 힘으로 개최한 최초의 연례육상경기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그 뒤 1922년 조선 내 7개 전문학교로 구성된 조선학생회가 1924년 5월 11일 훈련원에서 전조선학생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렇게 육상경기가 모든 경기의 기본으로 인식되면서 조선체육회도 본격적인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체육회는 1923년 7월 4일 제4차 정기총회에서 김동철을 고문으로 허성, 서병희, 원달호, 강낙원, 이중국을 위원으로 하는 육상경기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육상경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이와 함께 대회 3개월 전에는 인사동에 있는 계명구락부를 본부로 해 육상대회를 위한 각종준비를 했으며 1924년 5월 10일에는 원달호가 ‘육상경기규칙’을 편찬했고 영국 옥스포츠대학 킹스칼리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하고 육상에도 조예가 깊었던 서병희가 영문과 일본어로 번역했다.

아울러 육상경기대회 개최를 위해 시설 정비에 나선 조선체육회는 각종 대회를 개최하면서 모은 수익금 가운데 일부를 들여 허들기구와 투척종목 기구 등을 구입했으며 서병희는 계동궁을 사들여 학교를 확장한 휘문고보 운동장 한가운데 100m 직선 코스를 긋고 둘레에 333m 트랙을 만들어 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기본 터전을 만들었다.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결승점에 들어오고 있다.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이 결승점에 들어오고 있다.
조선체육회 수익금 일부로 허들기구 등 구입

근대식 시설이 갖춰진 뒤 조선체육회가 주최한 최초의 육상경기대회인 제1회 전조선육상경기대회는 6월 14일과 15일 이틀 동안 휘문고보 구장에서 열렸다. 후원사인 동아일보는 대회 10일전인 6월 3일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면 육상경기대회에 참가하라’라는 제목의 예고 기사를 싣고 육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략)다섯 해 전에 쇠퇴한 조선체육계를 살려보겠다는 취지아래 조선체육회라는 것이 생기어 해마다 축구 정구 야구대회를 여러 운동계에 공헌이 많음은 세상이 다 아는 바이어니와 이번에 열리는 육상경기대회는 다른 운동회와 같이 어떠한 한두 가지 부분의 운동이 아니라 실로 모든 운동을 모아 대성하여 놓은 조직적 운동이라 더욱이 이후부터는 조선인의 운동계도 세계적으로 확대되어 갈 것이오, 극동올림픽이니 세계올림픽이니 하는 중대한 회합을 앞에 두고 있는 지라 장래 세계적 운동회에 참가하여 영광의 월계관을 얻으려는 웅장한 선수는 미리부터 이회에 참가하여 재주를 단련하라! 용기를 단련하라!”(동아일보 1924년 6월 3일 자)

이어 앞서 조선체육회는 동아일보 5월 30일자에 경기종목, 강령, 주의사항을 고지했다. 이에 따르면 경기종목은 100m, 200m, 400m, 800m, 1,500m, 5,000m, 마라톤(15마일), 100mH, 200mH, 높이뛰기, 멀리뛰기, 삼단뛰기, 장대높이뛰기, 원반던지기, 창던기, 포환던지기와 800mR, 1600mR 등 모두 18개 세부종목이며 릴레이는 중학정도 이상 학교 생도로 학교장의 재작증명서를 제출하도록 하고 마라톤은 각력을 사용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자는 참가를 불허하며 마라톤 경로는 고양 숭인면 번리(소근내·현재 서울의 번동) 번교까지 왕복하는 코스로 정했다고 되어 있다.

강령으로 ►본 대회는 육상경기를 장려함을 목적으로 하며 ►전조선의 트랙 및 필드의 선수권을 결정하고 ►대정13년(1924년) 6월 14, 15일 이틀 동안 경성부 원동 휘문학교운동장에서 개최하며 ►각 우승자에게는 상품을 수여하고 ►체육회에서 발행한 육상경기규칙에 의하여 경기를 하며 ►심판은 심판장의 감독을 받으며 각 해당심판원이 이를 행하되 심판에 이의가 생겼을 경우는 심판장이 이를 결정하며 심판장의 결정은 최종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으며 ►각종 경기(마라톤 제외)는 예선을 행하여 예선우승자끼리 다시 결승을 행하되 각 경기 참가선수의 숫자로 경기 1조에 들어갈 인원을 정함과 동시에 예선 우승자의 수를 정하고 혹 예선을 폐지하는 일은 임시로 이를 결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연습 도중 선수가 불의의 사고로 숨져
이렇게 조선체육회가 의욕 차게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엉뚱한 곳에서 사고가 터졌다. 대회가 열리기 사흘 전인 1924년 6월 11일 양정고보 운동장에서 육상대회에 참가할 선수들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좁은 운동장에서 여러 종목이 연습을 하다 보니 창이나 원반이 날아다닐 때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상 첫 희생자가 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당시 이 상황을 동아일보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한세렬은 3학년생으로 대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와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학력과 품행이 매우 우량하였으며 또한 재주 있는 청년이라 운동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어 이번에 열린 전조선육상경기대회에도 그 학교를 대표하여 출마할 창던지기 선수라 하며 창을 던진 사람은 경남 하동군에서 올라온 김두환이라는 청년으로 역시 3학년 동급생으로 평일부터 두 사람 사이는 특히 남다른 친교를 가지고 있었다는데 지난 11일 오후 첫째 시간에 영어시간을 마치고 둘째로 체조시간을 당하게 되어 십분 간의 휴가를 할 즈음에 두 사람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에 나아가 창던지기를 하던 중 바람에 방향이 좋지 못한 까닭에 한세렬은 김두환이가 창을 던지는 줄도 모르고 마주 오던 중 마침 김두환의 던진 창이 그 사람에게로 떨어지게 됨에 마침 옆에 있던 학생들은 급한 소리를 질렀으나 한세렬은 얼른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고개를 들때에는 벌써 무심한창이 그의 가슴 한복판을 뚫어 박히고 말았다. 그러나 평일에 씩씩한운동가 한세렬은 그 자리에서 곳 자기의 손으로 그 창을 뽑아 버리고 한번 그 자리에서 맴돈후에 여러 학생들에게 매달려 사무실을 향하고 층계를 올라오는 도중에 그만 땅위에 업어져 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을 그 학교 교원실에다 누이고 세브란스 의사 정규원을 청하여 응급치료를 베풀었으나 의사가 달려온 뒤는 이미 20분이 지난 2시30분경으로 벌써 수술할 여유도 없이 그는 최후로 마지막 한숨을 두세번 쉬었을 뿐 한마디 말도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창상은 가슴 한 복판에 가로로 6㎝, 세로로 1.3㎝며 심장이 파열되어 내출혈이 많은 모양이었다.”(동아일보 1924년 6월 13일 자)

이 사고로 인해 양정고보 선수들은 대회에 참가하느냐 마느냐로 의견이 분분했으나 결국 참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참가 단체는 양정고보, 청년학관, 경성상업, 협성실업, 제2고보, 보성전문, 중앙고보, 동래고보, 휘문고보, 배재고보 등 나름대로 조선에서 육상 꽤나 한다는 학교는 모두 출전했으며 여기에 은행원, 상인들까지 대거 참여해 참가인원은 400명에 이르렀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은 모두 모여 상견례를 하고 경기에 들어갔다. 각 학교 응원전은 릴레이경주에서 절정에 달했다. 800m 릴레이에서는 양정, 휘문, 배재가, 1600m 릴레이에서는 양정, 배재, 휘문이 1, 2, 3위를 차지에 학교마다 순위가 바뀌면서 경쟁이 더욱 치열했다. 100m와 200m에서는 숭실 교사인 최응천이 12초와 25초2로 우승해 유일한 2관왕이 됐으며 1,500m에서는 휘문의 최도흥이 4분45초5로, 5,000m에서는 양정의 김희천이 17분43초8로, 마라톤에서는 송도의 강찬격이 1시간31분으로 각각 우승했으나 기록은 국제기록에 크게 못 미쳤다.

[정태화 마니아리포트 기자/cth082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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